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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흙으로 응고시킨 영속성 <박미화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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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박영택(경기대교수, 미술평론)

 흙은 원초적인 물질이다. 모든 신화는 그 흙으로부터 인간의 기원을 설명한다. 그러니 우리의 살은 저 흙의 탄성과 색채로부터 연유하는 내력을 지닌다. 내 몸과 흙과의 친연성을 생각해 보는 것이다, 흙은 질료덩어리다. 그것은 본래의 형체가 없다. 돌이나 나무, 금속처럼 고체로서, 경질의 물체로서의 완강함이 부재하다. 그것은 물의 농도에 따라 질퍽이고 물컹하다가도 단단해지고 이내 말라버리며 균열을 일으키다 먼지로 흩어지기도 한다. 그러나 불을 받으면 더없이 단단해진다. 물과 불, 공기의 양에 따라 흙은 자유자재하고 변화무쌍하다. 따라서 흙은 가변성이자 본래의 확고한 자기 정체성으로서의 물질에서 벗어나있다. 그것은 여백 같은 물질이고 구멍과도 같다. 고형과 액체성 사이에서 유동하는 물질이 흙이다. 흙의 이 수동성은 외부환경을 자기 온 몸으로 끌어안으며 수시로 몸을 바꾸는 넓고 깊은 포용성과 맞닿아있다. 가연성을 지니며 더없이 활성적인 물질인 흙은 미술에 있어 가장 흥미롭고 매력적인 재료이다. 그것은 보는 이를 상상하게 하고 그 손길과 육신의 노동을 받아들이며 원하는 형상으로 마음껏 변할 순종의 마음으로 편하게 자리한다. 흙을 다루는 이들은 미지의 표정으로 질펀한 이 촉각적인 물질을 주무르고 쳐대고 굳혀서 원하는 상 하나를 만들어가는 체험, 신비스러운 유희에 빠진 이들이다. 그 체험은 흙으로부터 나와 그와는 전혀 다른 물질로 환생하는 기이한 경험이자 세계의 기원을 이룬 창조주의 능력에 근접한 매혹적인 행위, 놀이이다.  


<소녀상> 조합토, 1220도 산화소성, 21x14x45cm, 2015


 박미화의 작업은 흙으로부터 시작한다. 그녀에게 흙은 모든 상념과 상상력을 가능하게 해주고 그로부터 발아한 상을 받아내 주는 한편 마음을 비추는 거울이기도 하다. 그러니 작가는 찰진 흙덩어리를 놓고 그 흙에서 자신이 원하는 상 하나를 부풀려낸다. 마치 흙에 숨을 불어넣고 자신의 온기를 밀어 넣어 저 흙과 자신의 마음과 정신이 맞닿은 접점에서 파생한 결과물을 조심스레 건져 올린다. 그러니 그것은 작가의 계획된 의도나 목적에 부합되기보다는 흙 자체의 본성과 작가 자신의 성향이 손상되지 않는 지점에서 밀려나온 것들이다. 흙으로부터 출발하는 박미화의 작업은 흙의 본성과 느낌, 그 상태를 가능한 유지하면서 그로부터 발아되는 이미지를 따라가는 여정이다. 생각해보면 박미화의 몸과 사유는 흙의 성질과 유사한 부분이 있거나 다른 어떤 물질보다도 흙이란 매체가 작가에게 작업을 가능하게 해주는 매력을 품고 있는 것 같다.    

 1980년대 후반에서 1990년대 초반에 만든 최초의 작업들은 흙을 장독이나 기둥처럼 밀어올린 형태다. 당시 내가 본 그 작업들은 미지의 것이자 더없이 덤덤하고 단출한 형상들이었다. 그러나 그 단순한 형태를 감싸고 있는 피부는 많은 생각을 가능하게 해주는 지점이었다. 인체를 연상시키는 붉고 어두운 색채를 머금은 덩어리들은 불에 의해 뜨겁게 덥히고 그로인해 갈라지고 찢어진 상처를 불현듯 드러내고 있다. 표면은 주름과 선, 굴곡이 있고 질감이 극대화되어 있다. 몸통의 한 가운데 부분은 찢어지고 구멍이 나 있는데 이는 모종의 상흔이자 외부와의 교류가 가능한 지점이고 여성의 성기를 연상시킨다. 더러 이 원통의 기둥은 천에 감싸여져 있어서 그 모습이 흡사 아이를 업은 어머니의 모습과 유사해 보였다. 작가는 흙에서 사람의 살을 떠올리고 자신의 신체적 속성을 투사하며 다시 자기 생애의 추억과 상념을 얹혀놓는다. 인간의 몸통을 연상시켜주는 한편 여성으로서의 삶과 자신의 개인적인 추억 등과 연관된 이야기들을 내재하고 있는 상징적인 형상들이다. 그것들은 한 쌍으로 혹은 몇 개씩 놓여있거나 나무와 흙으로 구워낸 다른 형상과 맞물려 풍경을 만들며 상황을 연출한다. 무엇보다도 당시 작업들은 "자연의 물질이 주는 소박한 아름다움"을 극대화하고자 하는 의도를 보여준다. 흙을 그 자체로서 존중하고 그것이 지닌 속성과 질감, 색채 및 이후 불에 의해 변형된 상황 자체를 그대로 풍경처럼 보여주는 편이다. 따라서 작가가 만든 기둥, 원통형의 형상은 흙을 밀집시키고 일으켜 세우면서 만들어진 자연스러운 원형이 된다. 한편 불에 타고 갈라진 흔적이 표면에 그대로 각인되어 있어서 그 질감과 색채가 또한 회화적인 일루전을 안겨준다. 공간에 놓인 덩어리의 물체성과 동시에 자연스럽게 생겨난 표면의 흔적이 어우러진 이 작업은 광의의 조각이자 오브제, 회화, 설치가 공존하는 하이브리드적인 작업이기도 했다. 

 일정한 시간이 흘러 1995년도에 선보인 작업은 그녀 특유의 형상과 방법론이 보다 확실하게 틀 잡히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얼굴이 지워지고 모호한 흔적으로만 나앉은 형상들은 암시적인 표정, 미완성에 가까운 마무리, 희미해진 표면처리, 중성적인 색채들과 무심한 손길에 의한 소박함, 그리고 지극히 자연스러운 상태를 지닌 것들이다. 그것들은 마치 오랜 세월 흙 속에서, 땅 속에서 머물다 출토된 유물처럼 아득한 시간의 잔해를 잔뜩 두르고 마모되고 형해화 된 안타까운 표정으로 머물고 있었다. 명시성과 구체성에서 한 발짝 물러난 얼굴이고 몸이다. 머지않아 사라질 얼굴이고 몸들이다. 겨우 끄집어내 형상들이고 마지못해 드러난 잔해들이다. 기억과 추억 속에서, 상처 속에 나온 것들은 모두 슬프거나 외롭거나 아련하다. 그것들은 일종의 트라우마로 인한 상징들이다. 빗물에 녹아내린 듯한 색감과 흙 자체의 물성과 그 사이로 베어 나오는 이미지가 경계 없이 뒤섞여 있다. 그래서 그것이 흙인지 아니면 흙으로 빚어낸 도조인지 가늠하기 어렵기도 하다. 거의 자연석이나 나무 그 자체로 보이는가 하면 저고리와 치마 차림의 여인상을 보여주는 것조차 명확한 형태와 표정을 읽기는 쉽지 않다. 다만 암시적인 덩어리로 다가온다. 그러나 오히려 잘 안 보여주는, 의도된 미완이 자아내는 아련한 분위기가 사뭇 매혹적이다. 모호한 상을 통해 보는 이들은 상상력을 증폭 하고 자신이 보고자 하는 부분을 겹쳐놓게 된다. 사실 미술에서 완성이란 개념은 무의미하다. 완성은 있을 수 없고 가능하지도 않다. 그래서 한국의 전통미술에서는 완성이란 개념이 부재했다. 그래서인지 작품들은 한결같이 우리의 전통 유물들, 오래된 것들, 그리고 자연을 그대로 연상시켜주는 분위기를 지녔다. 흙 자체를 무심하게 다루고 불에 구워내 인간의 손길이 깃든 인공의 것인지 혹은 돌이나 나무 둥치 그대로인지 구분이 안가는 지극히 무심한 작업들이 박미화의 특유의 솜씨다. 
모든 작업들은 흙 자체가 지닌 소박하고 무심하게 주무르고 구워낸 흔적을 지문처럼 지녔다. 그 모습이 강렬하다. 입체나 부조가 모두 회화적인 분위기와 오래된 흔적을 두텁게 지니고 있어서 매혹적이다. 그러니까 표면의 균열과 탈색되거나 희박한 색채가 다분히 회화적이며 따라서 인상적인 피부의 색감이 신비스러운 분위기를 강하게 환기시킨다. 무위적인 제스처와 자연그대로의 물성을 끌어내면서 수수께끼 같은 형상과 표정, 신비스러운 색채를 가득 안겨주고 있다. 흡사 오랜 흙벽에 난 알 수 없는 스크래치나 부분적으로 박락된 벽면의 느낌이 나기도 하면서 어딘지 성스러운 분위기를 풍기도 있다. 이 종교성은 특정 종교를 떠나 박미화 작업에 깊숙하게 자리하고 있는 아우라다. 물론 불상과 피에타를 다룬 작업처럼 직접적인 것들도 있지만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거의 모든 작업은 대부분 성스러움이나 신비한 종교적 분위기를 은연중 피워낸다. 부적, 삼두조, 인간의 머리를 한 새, 목이 잘린 몸, 바퀴, 창, 새, 그리고 <동자승>의 제목을 단 형상들은 다분히 한국 고유의 민간신앙이나 샤머니즘, 그리고 불교적 세계를 강하게 환기시킨다. 이 개별적인 형상들, 흙으로 구워 낸 오브제들은 마치 특정 텍스트의 행간을 암시하는 낱말이나 부호들처럼 전시장 공간에 흩어져 있다. 먼지를 잔뜩 뒤집어쓰거나 화산재를 맞거나 깊은 지층 속에 박혀있던 것들이 출토되어 햇살 아래 파리하게 자신의 몸을 드러내는 장면이고 성소에서 기능했던 이미지들이 이제는 사라져버린 옛공간을 추억하며 졸고 있는 듯 하다.    
목 없는 몸과 저고리와 치마차림, 임신한 여성, 아기를 안고 있는 여인, 덩어리가 얼굴을 대신하고 있는 한복차림의 여인상이 흡사 한 여인의 삶이 일대기처럼 연결되어 등장하고 있는 작업들조차 종교적인 분위기가 배어있다. 그것은 모성과 어머니의 헌신과 사랑, 희생이라는 종교다. '결혼과 생명의 잉태를 수반하는 여인의 일생'을 암시하는 다양한 형상들이 즐비하게 출현하고 있는 <어머니의 초상>이란 작품이 대표적이다. 아마도 작가에게 어머니란 존재는 작업의 근원으로 작동하고 있는 것 같다. 아니 작업보다도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핵심적인 존재일 것이다. 따라서 작업에는 어머니로 대변되는 한국 여성의 생애에 대한 작가의 여러 상념이 녹아있고 동시에 자신 역시 여자로서의 삶에 대한 애환 같은 것들이 누벼있다.
“특별한 이상도, 고매한 이데올로기도 포함되지 않은 가장 근원적인 것, 메마른 일상에서 돌아가 쉴 수 있는 어머니의 집, 그 어머니의 체온과 심장이 고동소리를 느낄 수 있는 어머니의 등이 우리에게 필요하다”(작가노트)

 박미화의 작업은 한결같이 가마에서 구워진 채색 테라코타다. 조합토로 성형된 형태에 화장토를 바르고 초벌한 후 다시 화장토를 발라 1,200도에서 소성한 것이다. 저 뜨거운 불을 맞아 성형된 흙은 새로운 생명체로 탄생한다. 온기를 품은 흙이 사람의 형상이 되고 그 무엇인가를 연상하는 오브제가 되었다. 불의 뜨거운 열기는 표면이 간직하고 있다. 따라서 작품의 피부는 그 흙이 맞았던 불의 힘과 품은 열기와 시간의 양을 고스란히 지닌 세계다. 
"따뜻한 것이 제일이다. 차가운 촉감의 점토가 뜨거운 불 속에서 따뜻한 사람이 되어 나온다." (작가노트)
작가는 또한 색채에 깊이를 더하기 위해서 화장토를 바르고 소성하는 과정을 여러 번 반복했다. 꽤나 오랜 시간이 경과하는 지루하고 참을성을 요구하는 작업이다. 작가는 말하기를 자신의 이러한 제작방법은 본인에게 참는 연습을 요구한다고 한다. 오늘날과 같이 속도와 빠름이 강제되고 현란한 볼거리와 장식성, 거창한 이념이 난무하는 현대미술의 속성에 비추어 볼 때 박미화의 작업은 그와는 사뭇 다른 방향에서 이루어진다. 가장 전통적인 흙이란 물질을 가지고 작업을 하며 또한 오랜 수공의 손길을 요구하는 테라코타작업을 하고 있으며 작업을 자신의 의도나 목적에 종속시키기보다는 재료 자체의 발언을 존중해주고 이념이나 논리, 개념을 앞세우기 보다는 재료와 자신이 만나 불가피하게 이루는 것을 용인해내는 태도 등이 그렇다. 특히나 작가는 흙이 가지고 있는 특성과 매력을 최대한 살리고 있다. 1,200도의 고온에서 구워낸다 해도 여전히 흙의 자연스러운 느낌이 남아있도록 조율하고 있다. 그로인해 박미화의 작업은 느림, 참음, 자연스러움, 소박함을 지닌다. 세세한 정보를 지우고 암시적이고 지워진 듯, 미완성인 듯 혹은 인공과 자연의 경계가 지워진 상황에서 지극히 자연스러운 미감이 번득인다. 기존 도조나 조각 작업과는 무척 다른 감성이다.
 
 이후 한참의 시간이 지난 2007년이 되어서야 다시 그녀의 작업을 볼 수 있었다. 이후부터 작가는 상당한 탄력을 받아 왕성한 작업을 선보였다. 당시 작업들은 1995년도에 선보인 <어머니의 초상>시리즈의 연속선상에서 풀려나온 듯 했다. 현재의 작업도 그렇다. 얼굴(초상), 치마 차림의 목 없는 여체, 사람의 얼굴을 한 새, 목이 없는 상태에서 직립한 사람, 기다란 배, 부적을 형상화한 도판, 운주사 석불 같은 동자승, 창문 등 그녀가 반복해서 다루는 특화된 도상이 전시장 곳곳에 설치화 되어 있다. 개별적인 작품 하나하나가 의미를 부여받는 게 아니라 마치 단위별 작품들이 단어처럼 모여서 문장을 형성하고 있다. 서술에의 강한 욕망이 두드러진다. 무엇보다도 우리네 전통미술에서 흔하게 접하는 유물, 특히 석불이나 목 잘린 불상, 운주사의 해학적이고 소박하기 그지없고 무심하게 만들어놓은 석불의 느낌이 강하다. 한국미의 매혹을 강하게 환기시키는 작업들이다. 박미화의 작업은 특별한 목적이 배제된 상태에서 자신의 마음속에 간직한 상, 원형 같은 이미지를 반복해서 호출해 내고 이를 자연스럽고 무심하게 빚고 불에 쐬인 후에 가능한 오랜 시간, 낡고 퇴락하고 박락된 느낌으로 응고시킨 것 같다. 따라서 그것은 수 백 년, 수 천 년 땅속에서 이제 갓 나와 핼쓱한 얼굴로 우리를 맞이한다. 그래서 작가가 빚은 얼굴, 몸은 무수한 이들의 생애와 사연과 상처, 추억이 혼재된 상이다. 자신의 생애를 이루었던 시간의 결과 자기 몸이 기억해내는 모든 것들을 호명해 이를 흙과 불로 이겨 만든 것들이다. 그래서 작가는 "얼마나 많은 내가 이름도 모르고 얼굴도 모르는 많은 사람들의 삶이 쌓여있는 것인지" 라고 말한다. 다시 작가는 "그날의 심상心象에 따라 흙속에 그려지는 이미지다. 그 잔상이 사라지기 전에 흙 위에 손가락으로 형태를 그리고 나무칼로 흙을 잘라낸다. 수수께끼 가득한, 나도 알 수 없는 눈빛들,,.어설프고 모호한 상, 전혀 새로울 것도 없는 재료와 기법이지만,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질문들을 불러올 수 있다면..."이라고 읊조린다. 
지워지고 문드러지고 떨어져나가고 뭉개진 얼굴과 몸체는 헤아릴 수 없는 없는 시간의 힘과 아득한 사연과 도저히 이해하기 어려운 그 존재의 생애를 다만 희뿌옇게 어른거리게 해준다. 따라서 그녀가 만든 이 희박해진 상은 결정적인 볼거리를 망막에 안기는 상이 결코 아니다. 그것은 심안으로 보아야 하는 상이고 희미하고 사라져버리기 직전의 추억의 이미지들이다. 잔해이고 죽은 것들이고 망실된 것들이자 도저히 잡히지 않고 포착하기 어려운 것들이다. 그것은 흙이 1,200도의 불을 맞은 자취이자 녹슬고 희미해지는 절묘한 색채를 피처럼, 녹처럼 뒤집어 쓴 것이고 다시 흙으로 돌아가기 직전의 마지막 불꽃같다. 그 불꽃같은 상들은 주술적이며 신비스러운 영감으로 가득하다. 박미화는 인간과 동물의 구분도 없고, 자연과 인공의 경계도 지우고 전통과 현대의 갈등도 없고 죽음과 삶의 가늠도 더 이상 무의미한, 완성과 미완성을 넘어 자리하는 영속성, 신비한 종교성, 유한한 생애를 초월하는, 아니 포월 하는 수수께끼 같은 표정(아우라) 하나를 불멸로 새겨놓고자 한다. 흙으로 응고시켜놓고자 한다.    
 
"나는 나 자신과 다른 사람들 그리고 다른 동물들이 보여주는 수수께끼 같은 표정들을 바라본다. 그리고 생각한다. 작업을 통해서 내 스스로가 인간과 세상 속에 공통적으로 존재하는 영속성을 발견하기를..."(작가노트)

글/사진 관리자
업데이트 2024.11.13 1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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