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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육체에의 각인, 그 불편한 시간들에 대하여 - 류인 <불안 그리고 욕망>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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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장소 : 천안아라리오갤러리
전시기간 : 2015. 1. 20 - 4. 19
글 : 조은정(미술평론가, 미술사학자)

  류인(柳仁, 1956-1999) 15주기 전이 열렸다. 2주기, 5주기, 10주기 그리고 15주기까지 나이 마흔 셋에 작고한 이 작가의 전시는 지속형이다. 작고작가 게다가 좀 이른 죽음에 크기와 무게 그리고 제작 시간의 한계가 있는 조각가의 작품이 이토록 지속적인 ‘전시’의 형태로 보여질 수 있다는 것은 매우 특이한 일이다. 그것은 이 작가를 우리가 어떻게 관찰하고 평가하는 일을 지속적으로 해오고 있는가를 알게 하는 일이기도 하다. 한국 근현대조각사에서 김복진(金復鎭, 1901-1940), 권진규(權鎭圭, 1922-1973) 이후 그는 형상조각의 계승과 새로운 창조라는 점에서 매우 소중한 작가라는 점은 의심할 바 없다. 

  1956년생인 류인은 여전히 마흔 세 살이고 20년이 지나도 마흔 셋일, 이 세상 사람이 아니다. 신이 하사한 시간(時間)이라는 것이 어떤 이에게는 물리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다른 차원으로 적용되기도 하는 것을 종종 경험하는데 조각가 류인도 바로 그러한 경우이다. 흔히 물리적 나이보다 더디 가는 것이 미술가의 길이지만 그의 나이 서른에 이미 조각가로서 양명(揚名)의 길에 들어서 있음을 증명하듯, 자신의 세계에서 굳건히 뿌리를 내리는 손의 주인공 조각가는 역사의 주체자로서 당당함을 잃지 않고 있음을 본다. 

  사실 증언자나 관찰자로서가 아닌,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는 자전적 모습을 전시장에 디밀어 놓는 조각가의 독선에 관객이 굳이 말려들어갈 이유는 없다. 그럼에도 그 지극히 개인적인 모습에 눈길을 주게 되고, 작품이 주는 잊을 수 없는 마음의 움직임을 경험하게 되는데 그것은 오히려 자신을 타자화시켜 역사적 존재로 나타낸  인체가 바로 그곳에 있기 때문이다. 류인은 작가로서 오랜 시간을 산 것이 아니어서 많은 수의 작품을 남기지는 않았으나 다채로운 인간상을 통해 그는 많은 이들에게 감흥과 영향을 주었으며 기념비적인 작품을 남긴 작가로 평가된다. 

  류인 인체의 가장 큰 특징은 ‘강력한 남성상’이라는 점이다. 조각의 역사에서 미를 찾는 여정에서 추구되어온 피그말리온적 여성상과 거리가 있는 그의 인체는 비록 얼굴이 없을지라도 남성형이며, 얼굴만 있을 때도 남성이다. 실지로 ‘춤의 해 기념조각’인 <하나비>와 청년시절의 몇 작품을 제외하고는 그가 보여주는 형상은 명확히 남성이다. 이 남성형의 조각은 분명 그 자신의 자전적 신체에서 발원한 것이다. 


  초기작들은 아주 충실한 구상적 인체의 범주에 속하며, 대상의 재연성이 강하지만 류인 조각의 특성인 파토스적 상황의 일부인 강력한 힘은 이미 이때부터 드러난다. 남성 입상인 <입허(立虛)>는 허공을 향한 응시, 앙상한 갈비뼈, 호리호리한 몸매에 이등변 삼각형처럼 벌리어 선 두 다리와  긴장한 두 발 등이 자신의 모습(입허)이라는 의식의 세계를 읽어낼 수 있다. 이번 전시에서는 그동안 보여지지 않은 한 작품이 눈을 끈다. 바로 형상화 혹은 의식화한 자전적 신체와는 달리 작가 스스로 자신을 표현한 자소상이 처음으로 공개된 것이다. 이는 작가의 원본이라 칭할 수 있는 FRP로 주조된 작품들을 이번에 소개하기 가능한 일이기도 하다.


  소년과 청년의 중간. 그 지점에 작가의 모습이 있다. 소매 없는 런닝셔츠에 통이 넓은 청바지 그리고 뭉툭한 신발에 뒷머리가 다소 긴 깡마른 청년이 서 있다. 양 손을 깊지 않은 앞 호주머니에 찔러 넣은 채. 두 눈은 약간 위를 향하고 입은 꺽 다문 채 턱은 아래로 끌어당겼다. 무릎, 허리, 어깨가 각기 포인트가 되어 삐딱한 자세를 보이는 청년의 모습을 한마디로 설명하자면 ‘반항’이다. 대한민국미술전람회 1회 대통령수상자로서 서울대학교 교수인 화가 아버지와 극작가 강성희의 막내아들이었던 그는 카리스마를 뿜어내던 부모 사이에서 몸 약하고 크게 자랑할 것 없는 아들이었다. 그 청년의 우울과 고독, 결핍의 내면을 이 크지 않은 인체 앞에 선 누구나 알게 되는 것은 작가 자신의 마음을 형상에 투사할 수 있었던 때문일 것이다. 이 왜소한 인체와 터질듯한 볼륨과 엄청난 고통으로 일그러진 근육으로 무장된 인체가 결코 달라보이지 않음 또한 그 마음의 표현인 때문일 것이다.


  류인 조각의 남성적 형상은 그리하여 작가 자신일 터인데, 우리 모두에게 마음을 열어 그 고통에 동참하게 하는 것은 같은 시대를 산 이들이 공유하는 경험에 기인할 것이다. 전시장에서 손을 끌어 <급행열차>가 ‘민중미술’임을 강조하던 그의 제자의 말도 맞고 자신의 욕망이라 말하는 주위 사람의 말도 맞다 할 수 있는 ‘열린 조각’은 류인의 작품들을 제외하고는 한국현대조각사에서 그리 흔한 것이 아니다. 

  작품의 대개가 남성형을 띠고 있는 것은 그의 작품 목적이 에너지, 힘의 표현이었던 때문일 것이다. 자의식이 그의 작품 전체를 지배하는 에너지로서 작용하고 있다는 말이다. 자신의 존재방식에 대한 끊임없는 물음이 작품을 생산하는 원동력이기에 그것이 어떠한 성(性)이 아닌, 원형으로서 존재한다. 그것은 또한 폭력이며 부조리함으로 가득한 그가 살던 사회, 그 구조의 부조리한 상황을 드러내기에 적합한 것이기도 했다. 내부의 드릴과 신체의 껍데기로 이루어진 <살해동기>나 총과 대포로 전쟁의 모습을 띤 <동방의 공기>는 역사적 신체의 표현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류인은 자신의 인체에 대해 이렇게 설명하였다.

  “현실을 재생산하는 수단으로써, 단지 미적인 가치만을 지닌 인체가 아닌 작가의 삶 속에서 투영되고, 자신의 조형언어로써 선택되어진 인체는 이미 작품이라는 물질성을 넘어 정신적 차원에서 관객(觀客)과 만나게 된다.”

 

  인체를 통해 구현된 형상이 사실은 형상의 구형이 아닌 무형의 것임을 말하는 것이다. 이러한 인체에서 고통, 폭력, 희망을 발견하는 것 또한 외형으로서의 형상이 아닌 인체가 의미하는 정신을 그 물질 안에서 보기 때문이다. 역사 앞에 의연히 대처하는 인간의 유형은 <부활-조용한 새벽>, <그와의 약속>, <황색해류Ⅱ>에서처럼 영웅적인 모습일 수도 있고, <망각의 그늘>이나 <황색음-몽골리안> 또는 <부활-그 정서적 자질>에서처럼 패배적인 경우도 있다. 그러나 그 모든 형상에 담긴 것은 우리가 아팠던 시대, 그 역사성에 있는 것이다.

글/사진 관리자
업데이트 2024.10.16 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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