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기간: 2015. 1. 27-3.1
전시장소: 인사아트센터
인사동 인사아트센터에서 열린 이번 이응노 드로잉전은 가나화랑이 2014년에 설립한 ‘가나문화재단’의 첫 프로젝트였다. 두 개 층을 가득 메운 그의 스케치, 드로잉 작업들은 이응노를 연구하고자 하는 이들을 위해서는 훌륭한 자료이자 일반인에게 흥미로운 감상거리로서도 손색이 없었다.
고암 이응노顧菴 李應魯 1904∼1989화백이 1940년대 전후에 그렸던 크고 작은 드로잉들로, 초상인물, 풍속화적인 모습, 동물과 식물, 풍경 등 다양한 소재를 택하여 끊임없이 그리고 또 그렸던 대화가의 숨결을 느낄 수 있었다.
<경성 우신여관> 1941. 3. 7 ink on paper, 27x37.4cm
<여인 초상> 연도미상 pencil on paper, 37.5x28.9cm
<여인> 연도미상 color on paper, 22x29.5cm
종이로 6백점 분량. 앞뒤에 그린 것을 합쳐 8백점이라고 하니 대규모 발굴이라고 할 만하다. 그의 인생의 궤적을 따라 충남과 서울 근교, 일본의 도시와 농촌 모습을 볼 수 있고, 당시의 군상을 때로는 속도감 있게 때로는 정적인 관찰을 통해 묘사하였다. 동식물 산수화훼도 여러 다양한 포즈와 각도로 그린 흔적을 모두 볼 수 있어 대상을 연구하는 그의 태도가 눈에 보이는 듯하다.
<소> 연도미상 pencil on paper, 22.7x30.2cm
<창경원 투우> 1948.8 pencil on paper, 20.5x24.5cm
고암 이응노는 열아홉에 해강 김규진의 문하로 들어가 열심히 대나무를 따라 그렸다. 입문은 문인화로 했지만 이 시점을 지나면서 그는 생계를 위해 전주 등지에서 극장 간판을 그려 가며 열심히 다른 양식의 새로운 그림을 익혀 나갔다. 꾸준히 조선미술전람회에 출품하기도 하면서 화가의 삶을 이어가다가 1936년경 일본으로 가게 된다. 당시 그의 나이는 33세. 일본에서 유명 화가에게 사사받기도 하고 동양화와 서양화를 모두 공부하게 되면서 한동안 사생을 중심으로 풍경화와 인물화를 그리는 시기가 오게 된다.
일본에서 공부한 결과로 그의 풍경화 드로잉은 일본의 화가들이 당시 서양의 풍경화에 영향받아 그리던 신남화의 기법이 농후하다. 문인화적인 감성과 현실의 풍경과 삶을 기록하는 태도가 섞여 있는 것. 부지런히 몸과 손을 놀려 인물, 동물, 주변 풍경과 사물을 관찰하고 화폭에 열심히 담았다.
사생한 스케치 중 많은 작품에 제작연도와 장소를 기입해 둔 덕에 고암의 행보를 알 수 있는 부가적인 결과도 얻었다. 36년 가을에 일본으로 가고 37년 가을에는 화성, 청양, 홍성, 38년 2월에는 서울 화신백화점, 39년 9월에는 도쿄, 40년 2월에는 공주, 삼청동, 도쿄, 4월에는 창경원, 8월엔 아카쿠라,... 동에 번쩍 서에 번쩍하는 수준의 그의 행보를 통해 그가 다양한 소재를 선택하며 그림 연습에 몰두했음을 짐작해 볼 수 있다.
<경성 경운동 천도교 회당> 1939. 6. 7 ink and color pencil on paper, 28.1x36cm
<현저동에서 북악을 보다> 연도미상 color pencil and ink on paper, 28.1x36cm
전시를 보면서 개인적으로는 한 가지 의문이 내내 머리를 맴돌았다. 서양화와 새로운 기법이 국내에 유입될 당시, 동양화의 전통은 어떻게 살아남는 것이 정답이었겠는가가 그것. 한중일이 각각 다른 모양새로 전통 회화를 이어가고 있지만, 우리의 문화와 정서가 담겨 천 년 이상 내려오던 한 전통이 단절에 가깝게 꺾이고 우리의 시각예술에서 현재 어떤 모습으로 자리하고 있는가를 생각할 때 답답한 마음은 풀리지 않는다. 기술적으로 남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어떻게 발전시켜야 하는가가 화두가 되어야 하는데.
화집이나 화보를 따라 그리는 것, 위대한 옛 (중국) 화가의 미덕을 이해하고 따르는 것이 최고 목표가 되어버리면, 서투른 변형이나 창의성은 단순히 치기로 보일 것이다. 이것이 치기인지 전통을 극복하여 발전하는 것인지 누가 판단할 수 있겠는가. 전통의 틀 안에서만 본다면 정확한 판단은 불가능할 수밖에 없다.
적어도 이응노가 현실의 사물들을 화폭에 옮기는 연습을 하는 그 시각은 분명히 전통적인 회화에는 들어있지 않던 리얼리티를 찾고자 했던 것이었음이 느껴진다.
적어도 이응노가 현실의 사물들을 화폭에 옮기는 연습을 하는 그 시각은 분명히 전통적인 회화에는 들어있지 않던 리얼리티를 찾고자 했던 것이었음이 느껴진다.
<공주에서 남쪽을 보며> 연도미상 color on paper, 28.8x37.4cm
<일본 나가노 여행 고부치자와역 앞 여관의 아침> 1940. 8. 22 ink on paper, 28x36.3cm
이 때의 수많은 데생, 스케치들은 1958년 프랑스로 간 뒤 비구상 회화를 그리게 될 때 밑거름이 되었던 그림들이라고 할 수 있다. 동양화 전통적인 미술 교육으로 화가에 입문하였지만 묵죽화를 벗어나 근대적 시각과 방법을 익히고 풍경과 인물에 자신만의 해석을 가한 그림을 그리고자 노력했다는 것. 바로 이 점이 그가 국제적인 무대에서 활약할 수 있었던 저력이 되었을 것이다.
<대나무> 연도미상 pencil on paper, 각 37x28cm
<묵죽> 연도미상 ink on paper, 각 36.6x27cm
<홍성 본가에서> 1948. 4. 19, pencil on paper, 20.4x33cm
<홍성> 1937 ink and color on paper, 28.2x17.4c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