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시 명 : 간송문화 제3부 <진경산수화>
전시기간 : 2014.12.14-2015.5.10
전시장소 : 서울 동대문디자인 플라자
한때 세상을 호령하던 노키아나 소니의 몰락과 추락을 보면 영웅호걸의 흥망성쇠만이 역사가 아닌 듯하다. 富도 마찬가지다. 식민지시대 조선에도 세상을 떠들썩하게 한 큰 부자들이 더러 있었다. 공주갑부 김갑순은 ‘민나 도로보데스’라는 천하의 명대사名臺詞를 남겼지만 역사 속에서 자취도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정선 <월송정(越松亭)> 지본담채 32.3x57.8cm
富만으로 보면 당시 또 다른 갑부 간송의 富 역시 세월과 함께 사라지고 말았다. 그는 선대에게 물려받은 10만석의 富를 자신의 代에 거의 다 소진했다. 식민지 시대라는 여건을 생각하면 그가 지녔던 富는 곱게 지키기 어려웠을 것이다. 뿐더러 한편으로 보면 어떻게든 뜯겨도 뜯길 재산이었는지도 모른다.
정충엽 <헐성루망만이천봉(歇惺樓望萬二千峰)> 견본담채 23.5x30.3cm
그런 富를 그는 미래를 위해 거시적으로 장기적으로 투자를 했다. 아무도 돌보지 않는 만점도 넘는 조선의 서화, 골동을 한데 모으는데 그 막대한 富를 쏟아 부은 것이다. 그로 인해 富는 사라졌다. 하지만 이름은 영원히 남았고 또 그가 富와 바꾼 서화, 골동은 천하의 보물이 돼 시대마다 새롭게 주목을 받고 있다. 누군가 적어도 ‘부자로 오래 살아남기’라는 책을 쓰고자 한다면 이런 기막힌 사례를 빼놓고는 쓰지 못할 것이다.
김홍도 <묘길상(妙吉祥)> 지본담채 23.6x18.2cm
그가 당시에는 있지도 않은 문화 투자를 시도하면서 주위의 어드바이저(當代 최고의 감식안으로 유명했던 위창 오세창이 이 역할을 했다)의 도움으로 투자대상으로 집중한 것은 몇 가지가 있다. 서화 쪽만 보면 하나는 겸재 정선이고 다른 하나는 추사 김정희이다. 추사 작품의 집중 수집은 그가 조선 5백년 통 털어 가장 위대한 학자이자 서예가인 때문이다.
김득신 <북악산(北岳山)> 지본수묵 29.8x36.5cm
겸재도 조선 5백년을 통 털어 중국문화권의 영향에서 가장 멀리 벗어나 조선의 그림을 그린 화가인 때문이다. 겸재 그림과 그의 영향을 받은 화가들의 그림을 집중적으로 수집한 결과, 후대에 그곳을 지킨 연구원들은 70년대 이래로 진경시대, 진경문화라는 17세기후반-18세기에 걸치는 새로운 문화양상을 정립할 수 있었다.
이 전시는 그런 점에서 간송이 億萬의 富를 쏟아 부어 결과적으로 훗날 진경문화라는 독창적인 문화를 정립할 수 있도록 해준 先見之明에 대한 오마주라 할 수 있다.(실제로 금강산을 그린 진경산수화 한 점 없이, 그 그림이 그 그림 같아 보이는 남종화만 2백년, 3백년동안 그렸다고 한다면 오늘날 미술을 감상하는 일이 얼마나 재미없는 일이 되었을 것인가)
이방운 <총석정(叢石亭)> 지본담채 24.8x15.7cm
더러 18세기에 세계화가 진행되면서 주변의 실제 경치를 그리는 일이 조선뿐만 아니라 중국도 있었고 일본도 있었다는 주장이 있기는 하다. 하지만 중국도 일본도 畵派를 이루고 또한 금강산과 같은 명승을 실감나게 그리고 보면 볼수록 감동적으로 그린 사례는 없다.(공연히 보편성 운운하면서 독자적 발전을 貶下하는 일은 반대를 위한 반대로 보일 우려가 크다)
노수현 <천불봉(千佛峰)> 지본담채 22.2x37.0cm
겸재가 창안한 진경산수화풍은 당대 大유행을 하면서 많은 추종자를 낳았으나 1세기 정도가 지나면서 성장의 動力을 상실했다. 다른 말로 하면 겸재 만한 천재가 두 번 다시 나오지 않으면서 껍질만 남게 됐는데 이는 모든 흥망성쇠가 그런 것이니만큼 크게 탓할 것은 아니다. 말기에 몇몇 반짝이는 명작이 없는 것은 아니다. 걸작 감상에 이어 진경산수화풍의 흥망성쇠를 훑어가는 것도 관람의 한 포인트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