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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함부로 쓰면 장 팔십에 처하노라 - <조선 청화, 푸른빛에 물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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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시 명 : 조선청화 푸른빛에 물들다
전시기간 : 2014.9.30.-2014.11.16.
전시장소 : 서울 국립중앙박물관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도자기는 누가 뭐라 해도 백자일 것이다. 그런데 그 백자 위에 미지의 이국을 상징하는 푸른 안료로 그림을 그린 청화백자 역시 그 조선시대 내내 제작된 사정과 그 쓰임의 위상을 보면 백자와 나란히 가히 조선을 대표하는 또 다른 도자기라 할 수 있다. 


공작석과 청금석(라피스 라줄리) 


그런데 이 청화백자는 백자와 달리 그것이 제작되고 사용된 역사를 보면 국가 권력의 통제와 그 틈을 비집고 아름다움을 누리고자 했던 민간의 욕망이 뒤엉켜 엮어온 역사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 사정을 단적으로 말해주는 금제 조항이 있다.


백자 청화매죽문 호(白磁靑畵梅竹文壺) 15세기 높이 41.0cm 국립중앙박물관





‘크든 작든 관청 근무자로서(...) 금, 은, 그리고 청화 백자기를 사용하는 자는 모두 장 팔십에 처한다.’ 이 내용은 조선시대 기본 법전인 『경국대전』 의 「형전」에 나오는 조항이다.

물론 백자도 조선초기에는 제작이 녹녹치 않아 왕실에서만 사용했다. 더욱이 청화 백자는 중국을 통한 수입에만 의존해야 하는 구하기 힘든 청화 안료를 그림을 그린 것이라 한층 귀했다. 따라서 청화백자도 애초에는 당연히 궁실용이었다. 


백자 청화매죽문 호(白磁靑畵梅竹文壺) 15-16세기 높이 36.4cm 오사카시립동양도자미술관


이는 우리뿐만이 아니라 중국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원나라 때 산화 코발트를 사용해 도자기 위에 청색 효과를 내는 기법이 개발되고 이것이 명나라 전해진 뒤 명나라에서도 왕실용으로만 이의 사용을 엄격히 국한하면서 시중의 판매는 물론 외국사신에게 팔거나 줄 경우에는 사형에 처했다.   


따라서 왕실용으로만 소량 제작한 초기의 청화백자는 현재 전하는 것이 극히 적다. 수량이 늘어나는 것은 사회 전체의 경제가 발전하는 조선시대 후기이지만 이때에도 왕조의 정통성을 유지하는 상징 그리고 민간의 사치를 금한다는 명분이 합쳐지면서 여러 차례 사용에 제한이 가해졌다. 


백자청화제명 접시(白磁靑畵祭銘楪匙) 18세기 지름 25.5cm 국립중앙박물관


1754년 7월17일에 영조는 ‘자기의 그림에 예전에는 석간주를 썼는데 이제는 회청(回靑*산화코발트의 다른 말)으로 그린다고 한다. 이 역시 사치한 풍습이니 앞으로는 용준(龍樽)을 그리는 외에 일체 엄금하도록 하라’는 명을 내린 것이 『조선왕조실록』에 전한다.(용준은 백자 항아리에 용 문양을 그린 것으로 왕실 의례에 사용되는 장식물이었다)  


흥녕부 대부인 묘지(興寧府大夫人 墓誌) 1456년 37.8x27.1cm 고려대박물관



그러나 권문세가, 부유층들은 왕실의 관요에서 제작되는 이 청화백자를 어떻게 든 손에 넣어 사용해왔다. 그 사정은 현재 전하는 가장 오래된 청화 사용의 사례를 살펴보아도 알 수 있다. 이는 도자기가 아니라 세조의 비인 정희왕후의 모친인 흥녕부 대부인(興寧府 大夫人)의 무덤에서 나온 묘지(墓誌)이다. 백자 판위에 사자(死者)의 기록을 적은 이 묘지는 청화로 글이 적혀 있는데 이때가 1456년이다. 뒤이어 두 번째가 유명한 황희 정승의 아들이었던 황수신의 묘에서 나온 묘지로서 1467년이다. 
 


백자 청화산수인물문 호(白磁靑畵山水人物文壺) 18세기 높이 44.5cm 국립중앙박물관



이런 사례만을 보아도 조선 초기부터 왕실의 위엄과 정통성을 위해 사용을 엄격히 제한했던 청화자기였지만 권문세가에서는 조용히 이를 사용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오늘날 전하는 청화백자의 대부분을 이루는 18세기와 19세기 제작품들은 국가의 통제가 느슨해진 틈 사이로 비집고 나온 민간 사회의 욕망의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랬던 만큼 전통적이지 않고 자유분방하고 또 기발한 의장, 도안이 했다고도 말할 수 있다. 


백자 청화영지당초문 운현명 호(白磁靑畵靈芝唐草文雲峴銘壺) 19세기 높이 19.4cm 국립중앙박물관 


이 전시는 청화백자를 놓고 궁실과 민간이라는 두 씨줄이 커다랗게 꼬이면서 엮어온 역사를 통사적으로 재구성한 기획이라 할 수 있다. 청화백자의 대표작을 이루는 국보, 보물이 시대별로 총망라된 것은 물론 19세기말 왕실 이상의 지존한 지위를 누린 대원군 이하응의 운현궁에서 사용하기 위해 특별 제작된 청화백자를 대거 선보이는 점도 특별하다. 더욱이 청화백자 역사가 조선에서 새롭게 막 써질 무렵 중국의 사정까지 비교 소개하고 있어 보다 거시적 안목에서 청화백자의 가치를 조명할 수 있게 해준다. 


    
(좌)백자 청화운룡문 호(白磁靑畵雲龍文壺) 18세기 높이 57.5cm 국립고궁박물관
(우)백자 청화운룡문 호(白磁靑畵雲龍文壺) 18세기 높이 55.2cm 오사카시립동양도자미술관


전시의 하이라이트를 한 가지만 꼽자면 18세기 궁중에서 사용된 백자청화 용항아리의 대표작 4점에 나란히 한 자리에 소개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 점 하나만으로 이 전시를 가리켜 일생에 두 번 다시 보기 힘든 전시가 될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좌)백자 청화운룡문 호(白磁靑畵雲龍文壺) 18세기 높이 52.4cm 국립중앙박물관
(우)백자 청화운룡문 호(白磁靑畵雲龍文壺) 18세기 높이 54.5cm 국립중앙박물관 박병래기증 


하지만 옥에도 티가 있는 법. 민간 개인컬렉터 소장의 걸작 청화백자를 일체 외면함으로서 여민동락(與民同樂)의 기회를 스스로 저버렸다는 점 그리고 의미 불통의 현대 회화작품과 현대 도예 작품으로 말미를 장식하고 있다는 점은 아쉬움이 남는 대목이다.(y)  
글/사진 관리자
업데이트 2024.10.28 0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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