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시 명 : 최치원 風流誕生
전시기간 : 2014.7.30.-2014.10.12
전시장소 : 서울 예술의 전당 서예박물관
아무리 작은 가게라도 잠시 문을 닫는 리뉴얼 공사라도 하면 내붙이는 알림 종이가 있다. 대개 ‘그 동안의 성원에 감사드리며 더 나은 모습으로 여러분 곁을 찾아갈 것을 약속 드립니다’ 하는 내용이다.
그렇지만 그 앞을 늘 지나가기만 하고 한 번도 들어가 보지 않았던 사람들에게는 다소 멋쩍은 얘기가 된다.
쌍계사 진감선사탑과 비 탁본(226.5x98.0cm, 성균관대 소장)
멋쩍을지 어떨지는 알 수 없지만 서예박물관의 최치원전은 말하자면 그런 알림판 같은 의미의 전시이다. ‘그 동안 성원에’ 하며 지금까지 해온 테마의 연장선상에서 큼직한 기획을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소개하고 있다. 또 아울러 ‘더 나은 모습으로’라고 하면서 새로운 모습에 대한 예고편을 살짝 선보인 것이다. 서예관은 계획에 따르면 이번 전시를 마지막으로 대대적인 리뉴얼공사에 들어가 1년 이상 문을 닫을 예정이다.
최치원 글 <진감선사탑> 일부
마지막의 시작으로 선보이는 테마치고는 의미심장하다. 한국 서예는 신라에서 시작한다 해도 과언이 아닌데 그 출발은 김생(711-?)과 나란히 최치원(857-?)에서 시작되고 있기 때문이다.(고구려와 백제는 신라에 흡수 통일됨으로서 독자성을 확립하지 못하고 말았다) 김생보다 150년 뒤이지만 최치원은 순수 국내파인 김생과 달리 국제파라고 할 수 있다. 한마디로 시야가 터져 있는 학자, 전문가, 예술가였다.
서용선 <출세> <입산> 자연석, 목제판 높이 428cm
12살 때 당나라에 유학을 가 현지에서 과거 급제로 성공한 뒤 28살 때 실력 있는 컨설턴트가 돼 금의환향한 것이나 다름없다. 그리고 현실 개혁에 몸을 담았으나 결국은 좌절하며 정신적인 자유를 찾아 가야산으로 들어간 것이다. 그 이후의 생활은 한마디로 ‘풍류 생활’로 정의된다. 이는 실력 위에 자유로운 정신을 추구한 태도로서 조선시대 유가들이 지향하는 바와 일맥상통하고 아울러 인문학적 소양을 갖춘 문화적 창조와도 맥이 닫는 지점이다.
박대성 <풍류 Ⅰ,Ⅱ> 각 354x150cm
전시는 여기서 시작해 그가 남긴 글-대부분 탁본이다-을 보여주는데서 시작한다. 그리고 리뉴얼 계획으로 보면 시작의 끝에 해당하는 지점에서 현대작가가 바라본 최치원을 꾸몄다. 여기에 참가한 작가들은 그림과 글씨의 구분이 없는 것은 물론이고 한국화, 서양화, 디자이너, 사진, 설치미술과 개념작가 등이 모두 초대됐다.(이들은 5월말 쌍계사 일대를 현지 답사하며 남아있는 최치원의 유적을 함께 살폈다)
장인선 <바람의 공간> 테이프
그리고 아주 오랜 과거에서 시작되면서 풍류로 포장돼 자유, 정신, 지식, 창조가 모두 하나가 된 거대하며 동시에 지금까지 실체가 불분명한 것으로 여겨온 맥에 도전한 것이 전시의 또 다른 한 면이다.
김영기 <최치원시 가야산 독서당> 200x200cm
김종원 <차고운가야산독서당> 210x150cm
어느 한 테마 밑에 동양과 서양이 만나고, 손과 기술이 만난 일은 많이 있었다. 하지만 그 중심에 서예가 놓이고 서예가라는 한 시대의 사상적 정신이 놓인 가운데 40명 가까운 작가들이 작품을, 생각을 펼쳐놓은 경우는 정말 이번이 처음이다. ‘그동안 성원에 감사드리며 더 나은 모습으로 여러분 곁을 찾아갈 것을 약속 드린다’는 말 그대로, 다시 선보일 서예박물관이 과거의, 전통의, 지나간 서예 문화 또는 예술이 아닌 현재 속에 살아 있는 서예관련 문화와 예술을 보여주겠다는 약속으로 믿어보고 싶은 전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