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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감로(甘露), 슬픈 날을 위로하다 - <광주비엔날레20주년기념 특별프로젝트 - 달콤한 이슬:1980 그 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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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은정(미술평론가)

  광주비엔날레 20주년의 문을 여는 전시가 광주시립미술관에서 시작되었다. 공식명칭은 ‘광주비엔날레20주년기념 특별프로젝트 달콤한 이슬: Sweet Dew’이다. 

  “풀잎 끝에 달려 있는 작은 이슬방울들, 무엇이 이 숲속에서 우리를 데려갈까” 

  전시가 열리는 중외공원 곳곳에 걸린 현수막에서 <달콤한 이슬>이란 글자가 눈에 들어오는 순간 흥얼거리게 되는 노래. 노래가 힘이 되고 노래가 우리 모두 함께임을 일러주던 시절이 있었음을 기억해낸다. “달콤한 이슬은 참이슬”이란 장난스런 말이 나올 수도 있는 전시명이건만, ‘1980년 그 후’의 미술을 보여주는 야심찬 전시의 시작은 결코 달콤하지 못하였다. 그도 그럴 것이 광주비엔날레특별전이라는 전시에 대해 대중에게 홍보가 가 닿기도 전에 홍성담 작가의 대형 걸개그림이 수정요구를 받았다는 기사에서부터 시작된 전시가 아니던가. 전시장에 들어서야 ‘달콤한 이슬’이 감로(甘露)임을 알았다. 1전시실 정면에 <수도사 감로탱>이 걸려 있고 이를 중심으로 나눔의 집 할머니들의 작품이 전시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전시장은 크게 광주시립미술관 전관과 야외를 이용하였고 밤샘 퍼포먼스에 이르기까지 안과밖, 낮과 밤을 아우르는 입체적인 전시의 형태를 띠고 있다. 전시장 밖에는 최병수의 솟대 설치작품 <감로수>와 타오 G. 브로백 삼볼렉의 가 있지만 유기적 관계나 맥락으로 이해되지는 않는 것은 어수선한 중외공원에 기존의 설치작품과 구분할 수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전시장 입구 1층에 광주시립미술관 소장 이이남의 <변용된 달항아리>는 사계의 아름다움과 나비의 황홀한 군무를 보여주는 작품이었는데, 이번 전시에는 <침묵-달항아리>로 이름도 바뀌고 붉은 나비가 산산이 부서져 꽃잎처럼 흩날리는 처연한 동영상으로 옷을 갈아입었다. 아름답게 유영하던 나비가 처참한 핏빛으로 남은 조선백자, 달항아리 1980년의 상처를 그대로 안고 있는, 이곳이 ‘광주’임을 알려준다.


  1,2전시장에서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앞서 말한 <수덕사 감로도>이다. 감로도는 우란분재일에 죽은 이들을 편히 쉬게 하는 영가천도를 위한 장치로서 재를 지낼 때 부각되는 불화이다. 죽은 자를 위한 제사에 사용되는 그림이자 이것을 보는 이들로 하여금 지옥세계와 부처님의 세계를 함께 보여주어 바르게 살아야겠다는 다짐을 하게 하는 동시에 사랑하는 이가 무주구천을 떠돌지 않고 편히 저승세계에 갈 것을 확인받는 매체이기도 하다. 그 옆에 나눔의 집 할머니들의 작품이 전시되어 있다. 그동안 숱하게 보아오던 작품이지만, 전시장에 걸린 할머니들의 작품은 예사롭지 않아 보인다. 아마추어 작품임에도 그 진실의 힘이 한눈에 이미지로 들어오는 것은 전시의 미장센 덕분일 것이다. 액자를 이층 삼층으로 쌓아 걸고 있음에도 살롱의 권위가 아닌 조화로운 구조로 자신의 이야기를 전달하고 있는 장면은 호화찬란한 기교보다 진실이 담겨 있는 고졸의 미가 더 윗단계라는 미의 이치를 확인하는 시간이기도 하다. 말 그대로 상처를 드러낸 날것의 그림들은 역사적 전시관에서와는 달리 개인의 고발이나 치유행위의 결과로만은 비쳐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홍성민의 장대한 수묵산수화는 가까이 들여다보면 일제에 의한 식민지 경험과 근대화의 발톱에 할퀸 상처들이 공통으로 남아 있는 아시아를 보게 된다. 그 보편성 속에서도 광주에서 나고 자라 겪은 5월 18일 그날의 의미가 담보되어 있다. 이러한 역사적 시각은 지우 시아오후, 이세현 등에서도 공통되는 점이다. 근대사의 상처들을 보듬은 이 전시장은 ‘저항의 미술’이 이번 전시의 주흐름임을 알려 준다. 그것은 또한 주재환의 빈 액자를 통해 드러나는 것처럼 관객의 경험이 작품이해의 단서라는 사실을 그 어느 전시보다도 더 극명히 드러내는 것이기도 하다. 과연 액자의 건너편 벽을 보여주며 이것도 그들이 가져갔냐는 물음을 수탈과 압제를 경험마지 못한 이가 의미를 파악할 수 있을까. 강요배의 불타는 장소들과 오원배의 암흑을 떠도는 어린 아기들, 이윤엽의 외침, 임남진의 전통민화의 구조를 통해 5월의 한 장면을 말하는 화면 등은 임흥순의 기록사진을 통해 무엇인지 인식하게 한다. 제주와 광주, 중국에서의 사건들은 인간이 인간에게 퍼부은 가장 극악한 행위인 학살에 공통분모가 있음을 보는 것이다. 작품들은 작가 개인의 것이면서 상호 이해의 단서를 제공하는 것은 이들 작품 모두가 무엇인가 하나를 말하고 있기 때문에 알게 된 사실이기도 하다.   

  2층의 3, 4전시실은 이번 전시의 의미를 드러내는 작품들을 보여주는 동시에 미술사적 흥미를 만족시켜주는 공간이다. 중국에서 대여를 요청하였으나 계속 상부 결재가 나지 않아 결국 중국의 큐레이터가 작품들을 자신의 가방 안에 넣어와 이곳에서 액자를 끼워 걸었다는 루쉰 판화운동의 결과물들은 80년대 한국의 판화운동이 모법으로 삼았던 그 작품들을 만나게 하였다. 민중에게 진실을 전하는 가장 효과적안 방법, 글자가 아닌 조형언어로 대중에게 말을 거는 방식의 기초훈련과정을 유추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는 중에 민중의 단결과 힘을 인지하게 되었으리라는 것은 이 판화의 많은 부분이 연대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20세기 초기의 노동운동을 보여주는 벤샨의 <노동자에게 예장접종을 하는 의사>는 흑백 이미지들 속에서 눈길을 끈다. 케테 콜비츠의 자화상을 비롯한 어머니들, 죽어가는 아이를 안은 어머니 같은 그의 주옥같은 화면들은 일본 사카나미술관의 소장품들이다. 전시장에서 만난 사카나미술관장은 이 전시에 작품을 보여주어 매우 기쁘며, 오키나와의 미술가 작품을 보여주며 자랑스러워 하였다. 제국주의와 맞서는 오키나와의 우리나라 혹은 광주와의 동질성에 감격스러워함이 분명하였다. 킨죠 미노루, 오우라 노부유키의 거칠지만 강한 힘이 웅변적인 작품들은 그의 긍지를 증명해주었다. 인도작가 아마르 칸와르의 는 아마도 이번 전시에서 가장 세련된 공간을 창조한 작품일 것이다. 철제 프레임에 아슬아슬하게 걸린 종이에 프로젝션된 화면들은 수없이 변화하며 공통의 식민 경험이 우리 삶을 어떻게 조율하였나에 대해 생각하게 만들었다. 

 

케테 콜비츠 <자화상>


아마르 칸와르


  5, 6전시실은 광주시립미술관의 ‘하정웅콜렉션’에서 선별된 작품들이 먼저 보였다. 일본에서 활동한 재일작가들과 한국의 저항 작품들이 시리즈로 선보였는데, 박불똥의 그림과 콜라주들 20점이 한 벽면을 장식하였다. 이러한 장면은 내게 꽤나 인상깊었는데, 유럽의 고풍스런 미술관처럼 진하고도 광택있는 페인트를 바른 ‘고급스런’ 벽면에 걸린 그의 작품들은 콜라주회화의 시작지점인 초현실주의회화를 연상시켰던 것이다. 광주의 항쟁 보도를 보고 생산한 작품인 김석출의 <1980. 5. 27>을 비롯하여  강연균의 <하늘과 땅 사이>는 생을 위한 저항을 죽음으로 선사한 공권력에 대한 분노를 보여준다. 오일, 전정호, 송영옥, 고삼권, 강운 등의 작품은 광주를 사건화에서 역사적 기록으로 어떻게 나아갈 것인가에 대한 작가들의 고민이 담긴 작품들이기도 하다. 도미야마 다에코는 한복입은 인물들의 죽음과 절규를 통해 광주의 슬픔에 동조하고 있음을 알린다. 
  마지막 6전시실은 줄리 메테루의 에칭으로 만든 커다란 화면을 보여준다. 그 거칠고 상처로 뒤범벅된 화면은 오히려 갈대 혹은 나뭇잎이 흔들리는 서정적 장면으로 보인다. 정영창은 서승, 홍성담, 정대세 등 자신이 알고 있으며 민주화를 위해 노력하는 이들을 초상으로 표현하고 있다. 윤광조의 도자기는 기형을 벗어난 입체의 조형적 작업으로도 보였지만 다른 작품들과의 의미적 맥락을 찾기는 어려워 보였다. 반면 맥주병, 소주병들을 일그러뜨려 다양한 자세로 걸고 세우고 놓은 킨죠 미츠루의 작품은 한눈에 그 술병 하나하나가 우리 자신임을, 불의 시련과 억압 속에서 휘고 조금은 깨졌더라도 살아있음을 그래서 여기 있음을 보여준다. 싸구려 재료가 예술이 되고 술병 하나가 나 자신을 알게 하는 흥미있는 작품인 동시에 처참한 나의 하루를 보여주기도 한다. 


줄리 메테루


킨쵸 미츠루



글 조은정(미술평론가) 관리자
업데이트 2024.11.13 1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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