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시 명 : <자주독립의 꿈, 대한제국의 국새>展
전시장소 : 서울 국립고궁박물관
전시기간 : 2014.5.13.-2014.8.13.
글 : 고재식(한국서화연구소 대표)
국립고궁박물관 2층에서 열리고 있는 ‘자주독립의 꿈, 대한제국의 국새-60여년 만에 돌아왔다’라는 작은 전시에 소개된 인장들은 6.25 한국전쟁 기간중 유실된 것으로 지난 4월25일 한미정상회담때 미국정부로부터 반환받은 것이다. 이 인장들은 고종황제의 국새 3과와 어보 1과 헌종대왕의 명으로 편찬된 《보소당인존(寶蘇堂印存)》에 수록된 5과를 포함하여 모두 9과이다.
국새(國璽)는 왕실과 국가의 중요한 통치 행위의 결정과 외교 문서에 사용하던 인장으로 최고 권위를 가진 행정용 관인을 말한다. 고종때 사용된 국새는 국서에 사용하던 <대한국새(大韓國璽)>, 훈기(勳記)에 사용하던 <황제지새(皇帝之璽)>, 친임관칙지에 사용하던 <황제지보(皇帝至寶)>, 조칙(詔勅)과 주임관칙지(奏任官勅旨) 등에 사용하던 <칙명지보(勅命之寶)>, 교명(敎命)·교서(敎書)·교지(敎旨)에 사용하던 <시명지보(施命之寶)> 그리고 <제고지보'(制誥之寶)>, <대원수보(大元帥寶)>, <원수지보(元帥之寶)> 등이 있다. 이들은 금, 금동, 옥, 은, 등이 쓰였으며, 손잡이는 거북이, 용, 신수(神獸) 등을 새겼다.
반면 어보(御寶)는 국왕, 왕비, 왕세자, 왕세자빈을 해당 지위에 임명하는 책봉(冊封)때, 재위 또는 사후 왕과 왕비의 공덕을 찬양하거나 공적을 종합·재평가하여 존호(尊號), 시호(諡號), 묘호(廟號) 등을 정하며 제작한 의례용 인장이다. 이들 어보는 종묘의 동쪽 장고인 동장(東欌, 보장(寶欌)이라고도 한다)에 봉안하는게 보통이다.
국새와 어보가 포함된 이들 인장의 환수에 담긴 의미는 자주독립 국가를 지향하던 고종황제(1852-1919)가 사용하던 <황제지보(皇帝之寶)> 국새와 19세기 전각의 수준을 말해주는 《보소당인존》의 편찬 당시의 인장 실물이 포함돼있다는 점이다.
특히 1897년에 제작된 <황제지보>는 고종이 황제로 즉위하며 연호를 광무(光武)로 바꾸고 국명을 대한제국(大韓帝國)으로 정해 조선의 자주국으로서의 위상을 드러내고자 한 때에 제작한 국새이다. 나라의 위상이 달라진 만큼 이때 만들어진 국새는 손잡이가 거북이에서 용으로 바뀌었다. 또 도장내의 글씨인 인문(印文)은 인(印)에서 새(璽)와 보(寶)로 바꿔 불렀으며 서체도 복잡한 구첩첩(九疊篆)에서 간단한 소전(小篆)으로 바뀌었다.
구첩전은 인장을 새기는 전서의 한 종류로 가로 획의 수를 6,7,8,9,10 또는 그 이상 직각으로 구부려 새기는 특수한 전서로서 자획이 좌우 대칭을 이루는 것이 특징이다. 획을 아홉번 구부린다는 것은 수의 끝인 9의 ‘많다’라는 뜻을 차용하고 위조를 방지하기 위해서인 것으로 추정된다.
이는 또한『주역』 건괘(乾卦)에서 ‘건원(乾元 : 하늘)이 9를 씀은 천하가 다스려짐이다’와, 전(傳)에서 ‘9를 쓰는 방법은 하늘과 성인이 같으니, 그 씀을 얻으면 천하가 다스려 진다’와 같이 하늘의 덕인 9를 인장의 자법(字法)에 써서 인장을 통해 하늘의 덕을 실행하는 즉, 나라를 평안하게 다스리기를 바라는 마음이 담겨있다고 할 수 있다. 구첩전으로 쓴 인장은 모두 주문(朱文) 즉 양각이며 중국 송나라 관인에서 유래해 원나라에서 유행했다.
참고로 대한제국 이전 조선에서 사용한 국새와 1897년 대한제국 성립 이후 사용한 국새를 살펴보면 아래와 같다.
1876에 제작된 <유서지보(諭書之寶)>는 대한제국 시기에 <칙명지보(勅命之寶)>로 바뀌었으며 그 명칭, 재료, 크기,
장식, 용도와 사용에 대한 법전 규정 등의 자세한 사항이 『보인부신총수(寶印符信總數)』에 수록되어 있다. 규장각과 장서각에 각각 소장돼 있는 『보인부신총수』는 대한제국 시기에 사용한 국새, 보인, 부신 75종에 대한 각각의 명칭, 인문, 도면, 설명-재료, 크기, 용도와 사용법, 음양각의 높낮이, 모서리의 넓이. 손잡이의 양식, 글자의 너비, 법전 규정 등을 싣고 있는 책이다.
1889년부터 사용된 <준명지보(濬明之寶)>는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 관원의 교지에 사용된 국새이며 이와 비슷한 용도로 쓰인 인장으로는 <흠문지보(欽文之寶)>, <명덕지보(明德之寶)>, <광운지보(廣運之寶)> 등이 있었다. 이 역시 『보인부신총수』에 수록돼있다.
1907년 순종황제(1874-1926)가 융희원년 고종황제에게 ‘수강(壽康)’이란 존호를 올리면서 제작한 <수강태황제보(壽康太皇帝寶)>는 손잡이 아래부분의 옆면을 팔각으로 하고 각 면에『주역』의 팔괘(八卦)를 새겼는데 이러한 양식은 예를 찾기 어렵다. 아울러 존호를 올린 내용을 기록한『옥책(玉冊)』도 함께 전한다.
사구인(詞句印)을 새긴 <우천하사(友天下士 세상의 선비와 벗하다)>, <춘화(春華, 봄날의 꽃 또는 화사한 봄 경치)>, <연향(硯香, 벼루의 묵향)>, 길상과 권위를 나타내는 <쌍리(雙螭, 두마리 용)> 등 3과와 헌종대왕이 감상하고 소장한 서화에 찍은 감장인 <향천심정서화지기(香泉審定書畵之記)>의 5과 가운데 <춘화> <쌍리> <연향>의 3과는 장서각에 소장된 『보소당인존』에 채색한 인장의 형태와 인재(印材)의 종류, 손잡이의 형태가 그대로 수록돼 있는 것이어서 주목된다.
『보소당인존』은 문예 군주인 헌종대왕(1827-1849, 재위 1834-1849)이 자하 신위(紫霞 申緯, 1769-1845)와 심암 조두순(心庵 趙斗淳, 1796-1870)에게 명하여 편찬한 것으로 창덕궁 낙선재(樂善齋)에 보관되어 있었다. 여기에는 774과의 목록과 776과의 인장이 수록되어 있다. 고종때 화재를 겪은 이유도 있겠지만 헌종이후 지속적으로 모각(摹刻)과 개수가 이루어졌음을 추정할 수 있다.
소동파를 보배롭게 여기는 사람이 사람이 사는 집이란 뜻의 <보소당(寶蘇堂)> 편액은 2종류가 존재한다. 낙선재에 걸려 있는 예서본은 ‘보’ 자의 글자풍으로 보아 금위대장으로 헌종대왕의 신임을 받았던 위당 신헌(威堂 申櫶, 1810-1888)의 작품으로 추정해볼 수도 있다.
특히 국립고궁박물관 소장 편액은 고종이 1885년(을유년) 음력 11월 하순에 쓴 것으로 두인은 잎사귀 모양의 <일천성두환문장(一天星斗煥文章, 온 하늘의 별들이 문장으로 빛나다)>이 찍혀 있으며 글씨 끝에는 주문의 <주연지보(珠淵之寶)>와 백문인 <만기지가(萬機之暇, 온갖 나랏일을 살피는 틈)>가 찍혀 있다. 참고로 주연은 고종황제의 호다.
이런 예는 <보소당> 편액뿐만 아니라 <곤령전(坤寧閣)> <관문각(觀文閣)> <사무사(思無邪)> <장안당(長安堂)> <향원정(香遠亭)> <우방재(藕芳齋)> <장안당(長安堂)>, <평원루(平遠樓)> <수방재(潄芳齋)> 편액 등에서도 동일하게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잎사귀 모양의 두인 <일천성두환문장>은 탁본으로 이루어진《어필현판첩》에는 <우방재>에서만 나타나고 실제 현판에서는 모두 보여 이들이 판각할 때 별도로 넣어진 것인지는 확인하기 어렵다.
이런 예는 <보소당> 편액뿐만 아니라 <곤령전(坤寧閣)> <관문각(觀文閣)> <사무사(思無邪)> <장안당(長安堂)> <향원정(香遠亭)> <우방재(藕芳齋)> <장안당(長安堂)>, <평원루(平遠樓)> <수방재(潄芳齋)> 편액 등에서도 동일하게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잎사귀 모양의 두인 <일천성두환문장>은 탁본으로 이루어진《어필현판첩》에는 <우방재>에서만 나타나고 실제 현판에서는 모두 보여 이들이 판각할 때 별도로 넣어진 것인지는 확인하기 어렵다.
참고로 고종황제가 즉위 원년인 1864년에 쓴 <평원루> 시 편액을 보면 주문인 <중헌(重軒)>과 백문인 <만기지가>가 찍혀 있어 고종이 즉위 초년에 쓴 호가 중헌임을 알 수 있다.
국새는 나라를 주권과 권위를 상징하는 인장으로 현재도 헌법공포, 훈장 및 포장증서, 중요 외교문서 등에 사용하고 있다. 이번 국새와 왕실 인장의 환수는 단순한 문화재 환수가 아니라 조선과 대한제국의 국권 회복을 의미하며,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자주독립국을 세우기 위해 애쓰던 ‘고종황제(高宗皇帝)의 꿈’을 다시 만날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