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시 명 : 수묵인 남천 송수남
전시장소 :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
전시일정 : 2014. 5. 13-2014. 7. 27
수묵인 남천 송수남
국립현대미술관, 2014. 5. 13-2014. 7. 27
송수남, 붓의 놀림, 1995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에서는 기증 작가 특별전으로 ‘수묵인, 남천 송수남’전이 2014년 7월 27일까지 열리고 있다. 한 해 전인 2013년 6월에 타계한 송수남(1938~2013)의 작품 중에서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소장한 작품과 사후 유족이 기증한 작품을 모아 회고전을 꾸린 것이다.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 전시실 2층의 3관과 4관을 지나치게 번잡하지 않을 정도로 채우고 있는 그 그림들은 남천이 열정을 품고 한평생 추구해온 먹의 세계가 추상과 구상, 선염과 파묵, 적묵의 여리고 짙은 밀도의 차이만큼이나 자유롭게 펼쳐져 있다. 평생을 수묵의 현대화를 위해 일로매진한 결과였다.
먹빛을 쫓다.
남천 송수남은 전주 출신으로 어려서 서예를 즐겼던 조부의 영향을 받아 홍익대학교 서양화과에 진학하였으나 3학년 때 동양화로 전과하였다. 전후의 빈곤함과 부모의 반대라는 어려움을 오직 그림에 대한 열정으로 뚫고 나가며, 1962년 국전에서의 입선으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하였다. 1960년대 송수남의 수묵화는 주로 종이에 먹이 스미고 번지는 효과의 실험이었다. 과감히 선을 없앤 몰골 기법의 선염은 추상이면서도 보는 이의 심상에서 산과 폭포로 재구성된다. 이 같은 발묵의 다양한 실험은 1960년대 초반 앵포르멜 미술운동의 여파이기도 했으나, 추상적 몸짓이 그 목표는 아니었다.
송수남, 작품 66, 1966, 150x120, 한지에 수묵채색
근대 화단과 현대 동양화의 계보에서 수묵을 한국미의 근간으로 보고 투신한 화가가 비단 송수남뿐만은 아니다. 1930년대 후반 신문인화 운동은 수묵의 선조와 맑은 색조를 복원하였고, 1950년대 김영기나 이응노는 활달한 운필의 즉흥성으로 국제화를 추구하였다. 남천보다 조금 앞선 연배의 묵림회 화가들은 추상화된 현대 수묵화에 한국화의 활로를 걸기도 했다. 그러나 송수남은 한국 수묵화의 변화와 갈림길에서 조금씩 다른 경계를 추구했는데, 근본은 향토적 서정과 소박한 자연관을 바탕으로 한 것이었다.
진경, 고향 산천의 풍경
남천의 이러한 주류에서 빗겨선 개별성은 1970-80년대 이후에도 일관되었다. 색과 면을 아끼는 미니멀 미학이 풍미했던 단색화 시기에도 송수남의 그림은 엘리트적인 관념성을 따르거나 무위자연의 세계로 쉽사리 탈속하지 않았다. 추상과 구상의 구분 짓는 현대 미학에 쉽게 동조하지 않았으며, 산수화와 풍경화의 세대적 구별에도 무심하게 대했다. 그래서인지 어떤 때는 미점이나 피마준이 선명한 산수화를 그리기도 하고, 때로는 넓적한 면과 빠른 선으로 모던하게 구성된 여름 풍경을 시원스레 그리기도 하였다. 멀어지는 수평선과 산세가 애잔한 강변 풍경화는 그것이 실경이든 상상의 공간이든 옛 고향의 향수가 묻어난다. 남천은 1991년 글에서 이렇게 진술하였다.
“나는 수묵으로 우리의 자연과 이 자연에서 형성되고 있는 우리의 심성을 표현하려 한다. 수평으로 중첩되는 산, 화평하고 정겨운 고향의 들판과 황톳길, 이웃과 함께 돌담 너머로 음식을 나누던 사람들의 인정......같은 것이다.”
이는 압축적 산업화와 도시화를 경험하고 있던 1970-80년대 한국인들의 보편적 상실의 정서에 바탕을 둔 것이었다. 1970년대 <도시와 자연> 연작의 현장 풍경화도 사실 변모하는 현실경 이전에 원초의 공간을 상정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남쪽의 하늘이라는 그의 호, 남천(南天)은 그의 정서의 기조가 어디에서 기인하고 있는 것인지 잘 보여준다고 하겠다. 송수남은 조형 실험과 재료 확장의 와중에서도 한국 산천에 대한 그리움의 서정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데, 이러한 미학적 감수성은 1980년대 사회 비판과 계급의식이 강했던 현실주의 수묵화 운동과 애초에 선을 긋게 되었던 이유이기도 했다.
송수남, 풍경, 1992년
송수남, 여름나무, 2000
붓의 놀림
송수남의 1990년대는 <붓의 놀림> 연작의 시대였다. 먹과 붓과 종이가 하나가 되는 수묵화의 묘미가 어느 때보다 풍부하고도 다채롭게 모색되었다. 그러나 이 시기는 조절할 수 없는 우연의 효과보다는 붓을 쥐고 주도적으로 화면을 장악하려는 화가의 의지가 어느 때보다 강하게 나타났다. 그것을 화가는 한국의 ‘얼’이자 ‘정신’이라 부르기도 하지만, 기실 물질과 에너지의 만남에 다름 아니었다. 붓은 먹을 안고 종이에서 노닐 수 있는 온갖 종류의 선조와 질감의 표정을 만들어낸다. 바탕은 힘찬 붓과 짙은 먹의 질량을 견디게 하기 위해 두터운 밀도와 장력을 가지게 되었는데, 남천은 때때로 아예 종이 대신에 캔버스와 아크릴을 쓰기도 했다. 송수남은 “화선지는 싸움터와 같고 붓은 창칼과 같으며, 먹은 갑옷과 같고 물과 벼루는 성지(城池)와 같고 마음과 뜻은 장군과 같다”는 옛말을 인용하길 즐겼다. 아닌 게 아니라 전시장을 압도하는 대형 화면에는 온통 갈필과 유려한 선조, 대범한 묵흔으로 전쟁에 나선 화가의 신체가 기록되어 있었다.
평생 때로는 지나치다는 의구심 속에 먹을 추구하던 송수남이 2004년 이후 한동안은 화려한 채색화를 그리기도 했다. 만개한 꽃과 나비의 향연이었다. 시장에 부응한다는 비판도 있었지만, 그 역시 화가의 직관과 변화된 정서에 솔직했던 결과였다고 이해된다. 화가가 전투적 대결의식을 누그러뜨리고 그려낸 생명 그대로의 화사함은 그래서 담백하게 다가오기까지 한다.
송수남, 붓의 놀림, 2012, 한지에 수묵과 아크릴, 227x182
큰 나무 넓은 그늘, 수묵 현대화의 오늘
생의 말미에 고향, 전주로 돌아간 남천 송수남은 다시 먹의 세계로 귀향하였다. 회고해 보건대, 송수남의 그림은 소탈하면서도 탄력이 있다. 한국적인 것을 추구하였으나 관념으로 흐르지는 않았다. 추상에 대한 강박으로부터도 자유로웠다. 획일적이지 않은 작품세계는 자칫 방만하게 보일 수도 있다. 관념을 배제한 미학은 까딱 즉흥이 되기 쉽다. 구상과 추상을 모두 허용하는 송수남의 포용력은 작가의 미학적 이념의 부재로 보일 수도 있으리라. 그러나 송수남은 이러한 함정에 쉽게 빠지지 않은 듯하다. 1973년 석남 이경성은 남천의 세계를 다음과 같이 간파하고 평했다.
야물지 못하고 대법한 그의 구상
아물리지 못하고 덤덤한 그 솜씨
그러면서도 그림의 진실한 준법이나 묵법이나 구도 등이
한국미의 본질에 육박하고 있다.
어두우면서도 밝고 허술하면서도 짜임새가 있고
어리석은 듯하면서 지혜로운 것이 그의 작품의 표정이기에
따뜻하고 정다움을 느끼게 된다.
송수남의 소탈함은 인터뷰의 모습에서, 재연된 화실에 걸린 화가의 사진에서 풍겨 나온다. 무엇보다 남천의 미술 세계를 매주 릴레이로 회고하는 제자, 권기수, 유근택, 홍지윤과 박철량 등의 강연은 그 자체로 화가의 일생을 증언하고 있었다. 그러나 풍성한 남천의 회고전을 관람하는 마음의 한편에서는 침체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한국 수묵화의 그림자를 완전히 지워버릴 수는 없었다. 묵향에서 옛 정신을 되살리고, 깊은 먹빛과 힘찬 붓질에서 한국미의 골간을 찾겠다던 한국 미술가들의 숙원은 이젠 더는 유효하지 않은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