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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백자에게 묻다, 나는 누구이며 어디로 갈 것인가 - <백자예찬, 미술 백자를 품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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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소 :서울미술관
기 간 :2014. 4. 18 - 8. 31
글 : 조은정(미술사학자, 미술평론가)



       산 첩첩 내 고향 천리이건만  자나깨나 꿈속에도 돌아가고파 
       한송정 가에는 외로이 뜬 달  경포대 앞에는 한 줄기 바람 
       갈매기 떼는 모래밭에 모였다 흩어지고 고깃배들 바다위로 오고 가는데 
       언제나 강릉 길 다시 돌아가 색동옷 입고 앉아 바느질 할꼬


신사임당(申師任堂, 1504-1551)이 어머니를 그리워 읊은 이 시에는 고향, 정자, 소나무, 달, 바람, 바다, 배, 색동옷 같은 마음 깊숙한 기억을 자극하는 언어들이 드러나 있기도 하고, 몸을 감추어서 오히려 진하여 절절히 그리운 것들이 자리잡고 있다. 이 시는 묘하게도 오늘날 한국을 상징하는 것들이라 일컬어지는 사물을 내포하고 있다. 시각과 청각 그리고 볼을 스치는 바람까지 넘실대는 시에서 ‘외로이 뜬 달’에 이르러서는 사임당의 미어지는 외로움을 절절히 느낄 수 있다.

전통 동양화속의 달은 밤풍경을 위한 포석이겠지만 백남준의 <달은 가장 오래된 텔레비전이다>에 이르면 여러 곳에서 모두가 함께 볼 수 있다는 속성이 동원된다. 그것은 한 공간에 있지 않아도 함께 있음의 공동체를 의미하기도 한다. 실지로 작품에서 그것이 어떤 모양이든 ‘달’이란 말을 듣는 순간 마음속에 둥근 달을 그리게 되는 것은 비단 필자만의 경우는 아닐 것이다. 또한 ‘달’ 하면 생뚱맞게 ‘항아리’가 떠오르는 것도.



유백색의 태토에 투명유를 시유해 1,300도 이상의 고온에서 얻어진 자기(磁器)인 백자는 여러 기형(器形)으로 존재함에도 ‘백자=달 항아리’라는 공식이 떠오른다. 희고 둥글고 안에 무언가를 채울 수 있는 이 그릇은 어느덧 한국의 상징, 전통의 표상이 되었다. 

둥글지만 무언가 어른어른하고 빛을 발하지만 곧바로 찌그러져 버리는 달처럼, 백자항아리는 삼불 김원룡(三佛 金元龍, 1922-1993)이 말한 것처럼 ‘원은 둥글지 않고, 면은 고르지 않으나’ 그저 마음으로 느끼면 되는 대상으로 받아들여졌다. ‘물레를 돌리다 보니 그리 되었고 바닥이 뒤뚱거리나 뭘 좀 괴어 놓으면 넘어지지야 않을 게 아니오’라고 무념무상으로 만들어진 자연을 닮은 존재로 백자항아리를 규정한 삼불의 <백자 대호>는 일명 달 항아리에 대한 세간의 이해를 함축적으로 보여준다.

근대기 백자 항아리를 사랑한 많은 인사 중 유독 미술가가 많은 것은 그들이 심미안이기도 하겠거니와 ‘조선의 미’를 백자가 함축하고 있다고 여긴 탓도 있다. 우현 고유섭(又玄 高裕燮, 1905-1944)이 말한 ‘무기교의 기교’ 혹은 ‘무계획의 계획’, ‘비균제성’ 등은 ‘민예’에 적합한 수식어들이다. 

그것은 또한 기술적 완결성보다 미적 가치를 소중히 한 태도를 밝히는 용어들이며 정말 백자 달항아리를 설명하는 데 똑 들어맞는 수사들인 것이다. 민족적 미의 표상을 찾아 헤매던 이들에게 달 항아리는 말 그대로 기술을 넘어선 심미안, 졸(卒)이 교(巧)를 넘는 경지를 보여주는 대상이었던 것이다. 


그러한 미술가들 중에 유독 수화 김환기(樹話 金煥基, 1913-1974)는 백자 사랑이 지독했다. 그가 6.25 전쟁으로 피난 간 부산에서도 내내 못 잊어한 것은 광이며 마루 밑에 넣어둔 백자 항아리들이었다. 당연히 수화의 작품 속에서 수많은 백자를 만날 수 있거니와 심지어 백자가 그려져 있지 않은 때조차, 화면 한가득 호수에 담긴 달이 백자항아리라고 나는 믿는다.   

서울미술관의 <백자예찬>전은 소재주의적인 측면이 없지 않다. 그럼에도 김환기, 도상봉의 화면 속 백자로부터 사진, 설치, 미디어 작업 등 현대적으로 해석한 작품들과 그릇으로서 백자의 전통을 한 번에 볼 수 있는 편의성이 넘치는 전시였다. 게다가 한참을 머물러도 더 들여다볼 것이 많은 관심 가는 작품들이 즐비했던 것도 사실이다.




백자에게 묻다, 나는 누구이며 어디로 갈 것인가

<백자예찬>이란 전시명의 부제는 ‘미술, 백자를 품다’이다. 백자를 다른 장르의 작품들에서 어떻게 해석하고 나타나고 있는가를 주요관심사로 하고 있음을 드러내는 것이다. 전시는 크게 3개의 섹션으로 구성되어 있다. 

작품 안에 백자가 드러나는 도상봉, 김환기, 손응성, 변종하, 정창섭, 박서보, 정상화, 이동엽 등의 작품은 ‘백자, 스미다’로, 백자를 테마로 한 고영훈, 구본창, 손석, 이승희, 강익중, 박선기, 황혜선, 신동원, 김병진, 노세환, 주세균, 장화진 등 현대작가들의 작품은 ‘백자 번지다’로, 현대백자의 맥을 잇는 한익환, 김익영, 박부원, 한상구, 김정옥, 박영숙, 권대섭, 백진의 백자 작품들은 계승이란 의미에서 ‘백자 이어지다’로 소개되고 있다. 


도상봉 <백자항아리>, 1967, 캔버스에 유채, 50.5x43


도천 도상봉(陶泉 都相鳳 1902-1977)의 라일락 가득 꽂힌 백자항아리는 70년대 인사동 화랑가를 점령하고 있었다. 이제 미술관에서나 만나보는 그의 오래된 기물이며 백자들을 늘어놓은 화면을 보며, 그 생생하지 않은 것들에 대한 탐닉이 어린 내게는 낯설었던 이유를 알 수도 있을 것 같다. 그저 오래된 물건으로 보였던 백자는 그에게는 사람 대신 인생을 말하는 하나의 장치였던 성 싶다. 그러하니 수만 가지 표정으로 백자는 이러저리 옮겨 앉아 자태를 드러내는 것일 터이다. 그에게 백자는 물건이 아닌 인간, 자신의 모습에 다름 아니었을 것 같다. 


김환기의 세계미술을 겨냥한 한국적인 표현이라는 야심은 백자와 매화가 흐드러진 화면에 세로로 미당 서정주(未堂 徐廷柱, 1915-2000)의 시가 흐르고 낙관이 찍힌 화면에서 확인된다. 사군자(四君子), 화중서(畵中書) 그리고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위에서 아래로 읽어 내려가는 글과 그림의 형식은 전통 회화의 그것을 서양화에 적용시킨 것이다. 한국적인 것의 서양과의 조우, 그 안에서 세계적인 미술의 탄생을 꿈꾸었던 수화의 열정은 백자가 그려진 화면 어디서에나 만날 수 있다. 이경성이 성북동 그의 집에 가면 마당이며 집안에 조선백자가 굴러다녔고 그것을 들어 쓱쓱 문지르며 이것을 만지면 영감이 떠오른다고 하였다던 수화는 이렇게 자신의 생각을 전한다. 

“내 뜰에는 한 아름 되는 백자 항아리가 놓여있다. 보는 각도에 따라 꽃나무를 배경으로 삼는 수도 있고 하늘을 배경으로 삼은 때가 있다. 몸이 둥근 데다 굽이 아기리보다 좁기 때문에 놓여 있는 것 같지 않고 공중에 둥실 떠 있는 것 같다. 희고 맑은 살에 구름이 떠가도 그늘이 시시각각 태양의 농도에 따라 청백자 항아리는 미묘한 변화를 창조한다. 철야 삼경에도 뜰에 나서면 항아리가 엄연하여 마음이 든든하고 더욱이 달밤일 때면 항아리가 흡수하는 월광으로 인해 온통 달이 꽉 차 있는 것 같기도 하다.…한아름 되는 항아리를 보고 있으면 촉감이 통한다. 싸늘한 사기로되 김이 오른다. 사람이 어떻게 흙에다가 체온을 넣었을까.”(김환기 에세이 「청백자 항아리」)
 


김환기 <섬 스케치>, 1940년대, 캔버스에 유채, 80x99.6cm, 서울미술관 소장

그의 화면 가득한 달이며 호수가 백자와 다름없음은 이러한 이유에서다. 그것은 또한 자신의 고향인 섬이 바다 가운데 둥실 떠있는 것처럼 하늘의 달과 같고 육지에 들러싸인 호수와 같으며 백자항아리와 같음이다. 음과 양, 튀어나옴과 들어감, 흰 것과 파란 것의 조화는 바로 그의 원초적인 고향에의 향수, 자신의 땅에 대한 찬가임을 이번에 새로 본 1940년대의 <섬 스케치>를 보며 확언하게 되는 것이다.

손응성(孫應星, 1916-1979)의 백자는 근대기 그 어느 작가에게서도 볼 수 없는 꼼꼼한 색채의 도포, 치밀한 구도를 보여준다. 소설가 최인호가 외삼촌인 그를 일컬어 ‘조선의 빛깔과 영혼을 추구한 사람’이라고 한 것처럼 그는 ‘조선적인 것의 표현’에 심혈을 기울여왔다. 그는 비원 등 풍경이나 인물과는 다른 이번 전시에 소개된 백자의 모습은 관조의 대상으로서 거리감을 간직한 것이 아닌, 들여다보고 만지려는 듯한 백자를 묘사해냈다. 실제 공간에 위치한 단단한 물체로서의 백자는 사물로 존재하는 것이다.



따뜻하면서도 낭만적 화면을 구사하는 변종하(卞鍾夏, 1926-2000)는 자연의 모습, 자연의 색감으로 백자를 재현하고 있다. 정창섭이나 박서보, 정상화 그리고 이동엽의 화면을 이번 전시에 함께 한 것은 바로 그 색감에 기반한 것으로 보인다. 실지로 동양과 한국의 자연에 기반한 추상임을 강조한 이들의 작품에서 ‘백자’의 영향을 추출한 것이며, 그것은 한국적 미감의 특성으로서 추상에 닿게 하는 의도를 반영한 것이기도 하다. 미니멀, 모노크롬, 단색조로 일컬어지는 이들의 작품은 백자라는 전통의 언어를 동원함으로써 동양에 근거한 사상적 추상으로 위치지어지는 것이다. 
 

     

표상, 한국인의 한국성

모든 새로움이 전통에 기반해 더 안정적인 이해를 마련할 때, 미술은 지지자의 층을 넓힌다. 한국 현대미술에서 백자는 의심할 바 없는 전통의 언어로서 그것은 자연의 다른 이름으로 존재한다. 결국 백자를 대하는 여러 태도는 가장 익숙한 형태라는 전통과 그것을 변주하는 새로움으로 무장하여 ‘전통을 기반으로 한 새로운 미술’의 역사를 써내려갈 수 있는 것이다.   
고영훈은 화면 안에 백자를 재생시킨다. 그의 화면은 멀리서는 도자기가, 가까이 가면 회화가 존재하는 이중구조이다. ‘그리기’의 과정이 존재하면서도 백자의 모습이 그대로 재현되었다고 생각게 하는 화면은 백자의 환영과도 같다. 그 치밀한 재현의 목적은 시각의 문제를 벗어나 우리가 믿는 것에 대한 다양한 생각들을 불러일으키게도 한다. 구본창의 사진은 실상 고영훈의 작품과 나란히 자리 잡았을 때 멀리서는 언뜻 구분이 어려워 보인다. 


이승희 , 2013, 세라믹, 85x84cm, 작가소장

사진의 회화적 감성과 회화의 사진적 기록성이 공존하는 두 화면의 조우인 탓이다. 백토물을 입혀가며 쌓아올린 백자토를 화포 삼아 도자기의 모양을 그대로 나타내고 유약까지 처리하여 하나의 평면도자기를 창조한 이승희의 작품은 입체이며 평면이며 동시에 도자기이면서 회화의 세계를 보여준다.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오른쪽에서 가운데로, 시선을 옮기면 백자는 다양한 색채와 형태로 모습을 드러낸다. 손석의 옵티컬한 화면은 도자기 자체, 백자의 이미지가 일루전일뿐 임을 드러낸다. 박선기의 그림자와 함께 형태를 이루는 백자의 드로잉은 벽이 백자의 몸이 되고 단지 선이 백자의 형태가 됨을 보여줌으로써 공간 속의 드로잉, 부유하는 형태로서의 백자를 드러낸다. 그 드로잉의 재료가 엄청난 쇠파이프라는 것을 감안하면 불에 의해 단련된다는 공통점을 지닌 도자기와 쇠의 만남이라는 점에서도 흥미롭다. 


황혜선 <백자-일상을 품다>, 2014, 알루미늄, 160x120x10cm, 작가소장


드로잉으로 도자기 형태를 만든 황혜선은 형태 내부에 일상을 일기처럼 그려나간다. 도자기의 그림처럼 선으로 이루어진 형태들은 흰 벽에 흰 선으로, 하지만 검은 그림자에 의해 입체감을 갖게 된 형태들은 백자의 전통에 대한 현대적 해석과 미술에서의 3차원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김병진의 작품에서는 도자기 외면에서 시각적으로만 감지되는 빙렬은 도자기의 형태를 이루는 골조가 된다. LOVE라는 알파벳으로 이루어진 그 빙렬은 도자기의 몸체는 비고 빙렬로 형태를 이루는 도자기는 음과 양, 안과 밖이 위치를 바꾸는 동시에 팝아트의 상투적인 문구가 도자기의 형태에 덧붙여져 기시감, 새로움, 소비 등의 문제를 상기시킨다.  

주세균의 도자기에 분필로 끝없는 노동을 투사하여 흰색으로 만드는 과정은 백자를 만드는 도공의 노동력을 상기시키며 동시에 역설적이게도 전통에 대한 무비판적 용인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는 것으로 보인다. 무게감은 사라지고 도립한 주전자의 형태, 몽글몽글한 김이며 물방울이 벽면에 그림처럼 아주 ‘얇게’ 드로잉 된 신동원의 작품은 몽상적이며 위트가 넘친다. 흙으로 만든 도자기는 심각한 것만은 아니라는 창작의 즐거움을 보여주는 작품이랄까. 

노동의 전통, 도자기에 대한 일반적 인식은 노세환에 의해 다시 비판과 관조의 렌즈를 통과하게 된다. 도자기의 모습이지만 실은 값싼 플라스틱으로 만든 자장면집에서 사용하는 식기와 양념통들을 ‘백자처럼’ 근사하게 촬영하여 보여주고는 아무렇지도 않게 대좌에 그 촬영대상을 오브제로 보여주며 백자의 전통, 그것의 소비와 가치에 대해 묻고 있기 때문이다.


강익중 <달항아리 E16A-2006>, 2006, 패널에 혼합재료, 120x120cm, 서울미술관 소장


광화문을 복원할 때 가림막에 수많은 백자를 그린 판넬을 세웠던 강익중의 <백자대호>는 모국이자 고향이며 어머니의 상징이다. 열린 누마루 문살 안에는 백자가 놓여 있고 영롱한 빛이 변화하며 백자를 비춘다. 백자 자체를 화면으로 사용한 듯하여 일견 당황스럽다. 동행한 도예가들의 얼굴에서 약간의 불쾌감과 같은 것을 발견한 탓이다. ‘빛’에 착안한 장화진의 설치작품은 밤이면 영롱한 하나의 달 그것을 상상케 하였다. 방안에 뜬 달이라니. 여전히 백자는 하늘에 뜬 달, 마음에 뜬 달의 행로를 지나고 있는 것이다.

백자, 전통과 혁신의 화두

전통의 상징으로서 백자를 화두로 삼은 듯한 전시는 조선백자의 전통을 ‘잇는’ 도자들을 모은 3부의 ‘백자 이어지다’에서 의도성을 드러낸다. 넓은 장소에 도자기를 알고 체험할 수 있게 한 교육부분이 중심에 자리하고 있는 점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처럼, 이 전시는 전통의 언어를 분해한 미술계 내부의 담론을 위한 전시가 아닌 것이다. 그리하여 ‘백자’라는 화두를 도자기의 물질 자체에 이르게 함으로써 전시 전체의 의도가 불명확해지는 결과를 낳았다. 그럼에도 우리 시대 ‘좋은 백자’들을 한자리에서 볼 수 있는 호사는 누릴 수 있음에 감사할 일이다.         

보스턴미술관, 쾰른의 동양박물관, 오스트리아 빈 박물관, 말레이시아 국립공예박물관 등에 있는 조선백자는 한익환(1921-2006)이 재현한 조선백자이다. 그만큼 조선백자의 재현에 평생을 바쳐왔으며 가장 근사치에 이르렀음을 알려주는 말이다. 설백색의 백자는 곱고 깊은 맛을 낸다. 하지만 광폭의 구연부, 좁아진 밑동 등 기형의 변화는 작가의 창작의지의 발현으로 보아도 좋을 것이다. 우리 눈에 조선의 백자는 하나의 전형성으로 인지되어 약간만 운두가 달라도 이질감을 느낀다. 

그러고 보면 그 오랜 시간, 넓은 지역에서 만들어진 조선 백자에 대해 우리 모두가 하나의 이미지를 지니고 있음이 놀랍기도 하다. 어쨌든 사라져버린 백자를 재현하여 장인의 영역에서 예술로 끌어올린 그의 작품은 예전의 미감이 현대에도 크게 다르지 않을 수 있음을 보여준 예로서 기억되어야 할 것이다.

박영숙(1935- )의 달항아리는 단단하고도 여문 느낌을 준다. 접시와 주전자를 만들던 그의 달항아리는 팽만한 몸체에 빠른 물레의 속도감을 담고 있다. 곧추 선 입술은 단단한 감을 넘어선 도전적인 느낌마저 준다. 이우환의 <조응> 시리즈의 접시를 만들어 새로운 미술의 장을 열었다고 평가되는 그는 전통보다 커다란 백자를 만드는 작가로 알려져있지만 이번 전시에는 음전한 달항아리가 둥글게 떠 있다. 환한 발색에 단단한 둥근 백자는 밝지만 차가운 겨울 하늘에 뜬 보름달 같아 보인다. 


김익영 <꼭지 사면합>, 2000, 자기 환원소성, 실투유, 23x25x19cm, 우일요 소장

김익영(1935- )의 백자합들은 전통적인 제기의 형태, 각선과 독특한 면이 눈길을 잡는다. 그 단단한 조형감은 전통의 현대적 계승이라는 차원을 되새기게 한다. 조각과 같은 입체작품에서 느낄 수 있는 단단함과 양감을 갖춘 도자기는 조형의 새로운 면을 보여주지만 생활기라는 욕망을 적용할 때는 다소 무거울 수도 있겠다 싶다. 하지만 유려한 발색을 갖춘 넉넉한 그릇들은 물레가 지닌 원형의 모습을 벗어나더라도 백자가 지닌 포용성을 상상할 수 있게 하는 너그러운 것이다. 

박부원(1938- )의 백자 한 점은 유백색의 부드러운 색조와 넉넉한 품새가 광주 분원의 계승을 보여준다. 각이 지게 깎인 입술과 길게 빠진 하부는 날씬한 느낌을 주지만 자유로운 손놀림에 의한 표면의 굴곡은 전통 백자에서 보아오던 도공의 그것을 닮아 있다. 원형에 가까운 둥글면서 팽팽한 몸통과 각 지게 선 입술의 당당한 미감을 보이는 권대섭(1952- )은 잇잠이 부드러운 작가이다. 그것을 더욱 돋보이게 하는 것은 유약이 흙의 색과 같으면서도 질감이 느껴지게 한 때문이다. 

김정옥(1941- )은 새로움과 전통의 넘나듦이 그 누구보다 쉽지 않을 것임을 아는 사람은 안다. 손자대인 9대째까지 사기장의 맥을 잇는 자부심도 큰 영남요의 맥을 잇는 장인이지만, 현대 도예가로서의 정체성을 찾아야 하는 부담을 함께 안고 있기 때문이다. 

이번 전시에 소개된 팔각항아리는 구연부와 굽은 그대로 둥글게 놔두고 몸통만 각을 준 것으로 예리한 각과 설백색이 시원한 느낌을 준다. 경기도 무형문화재 41호 지정자 한상구(1939- )는 청화백자 용문항아리와 철화용문항아리를 보여주었다. 철화안료로 그린 용문항아리의 천진함과 청화백자의 고졸함은 전통 조선후기 백자의 면모를 보여준다. 


글 조은정(미술평론가) 관리자
업데이트 2024.10.30 05: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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