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명 : 백자호-너그러운 형태에 담긴 하얀 빛깔
장 소 : 서울 호림미술관
기 간 : 2014.3.13.-2014.6.21.
한국의 일상 식탁에 오르는 도자기는 흰 도자기 일색이다. 큰 접시, 작은 접시, 둥근 것, 네모난 것 같은 반찬접시는 말할 것도 없이 국그릇, 밥공기까지 흰 색 아닌 것이 없다.
하얀 도자기 표면에 일체의 장식이 없는 백자는 가히 한국인의 DNA화됐다고 할 만하다. 전 세계 어디를 둘러보아도 아무런 문양 없이 뽀얀 백자를 그대로 사용하는 민족은 찾아볼 수 없다.
청자 매병을 닮은 <백자호> 15세기 높이 47.2cm
흙이 두꺼워 둔중한 느낌이며 주둥이가 살짝 안으로 꺾여있다.
이처럼 한국인이 애호하는 백자 가운데 백미로 꼽히는 것이 바로 백자 항아리이다. 백자 항아리 하면 흔히 달 항아리를 연상하기 마련이다. 달 항아리의 유명세이기도 한데 실은 달 항아리가 출현하는 것은 여러 백자 항아리가 제작되고 300년이 지난 뒤의 일이다.
달 항아리로 이어지는 대형 <백자호> 18세기 높이 61.0cm
위 아래를 붙어 만든 자국이 지나치게 선명해 흠이지만 당당한 기세가 일품이다.
이 전시는 그런 점에서 백자 항아리=달 항아리라는 좁은 시각을 교정시키며 조선 전반에 걸쳐 제작된 백자 항아리의 다양한 세계를 소개한 전시이다. 계통을 따라가면 자연히 초기의 백자 항아리에서 달 항아리가 발전해 나오는 과정을 볼 수 있는 것은 물론이다.
조선시대 백자 항아리의 시작은 고려의 영향부터다. 청자 영향을 받은 매병(梅甁) 형식의 백자 항아리가 우선 등장한다. 이런 항아리는 분류의 편의를 위해 입호(立壺)라고 하지만 궁중 기록의 정식명칭은 호(壺) 이외에 준(樽, 尊)이나 항(缸) 앵(罌) 등의 이름이 쓰였다.
태항아리로 쓰인 <백자호> 내, 외호 1643년경 높이 각 30.9cm 19.4cm
태지석에는 ‘을묘년시월십칠일 묘시생 왕자아지씨태(乙卯年十月十七日 卯時生 王子阿只氏胎)라고 적혀있다
위아래로 길쭉한 이런 백자 항아리는 궁중의 혼례와 회갑연과 같은 국가적 의례에 사용됐다. 이 시대에 만들어진 또 다른 백자 항아리로 궁중의 장례 행사에 쓰인 것들이 있다. 태를 잘 묻으면 국가가 번영한다는 믿음에 따라 길지를 택해 왕자, 공주의 태(胎)를 묻었는데 이 백자 항아리를 사용한 것이다. 태 항아리는 의례용 항아리와는 달리 어깨의 네 곳에 홈이 있는 고리를 만들어 실을 꿰어 뚜껑과 함께 잘 고정되도록 한 것이 특징이다.
번천리 제작으로 여겨지는 <백자호> 15세기 높이 13.7cm
초기 백자를 대표하는 항아리로 밝고 맑은 백토 색이 특징이다.
궁중 행사에 쓰인 백자 항아리는 애초부터 사옹원이 수급을 전담했다. 사옹원은 왕의 식사나 궁중 연회 등을 관장하는 기관이다. 사옹원은 식사와 관련되는 도자기를 제때 공급하기 위해 15세기 후반부터 경기도 광주에 왕실용 백자 제조공장을 설치했다. 이것이 분원인데 분원은 처음에는 땔감이나 좋은 흙이 나는 곳을 돌아다니며 백자를 만들었다. 그 중에 번천리 시절에 제작한 백자는 특히 색이 투명할 정도로 밝은 것이 특징이다. 이어서 금사리 역시 불에 강한 좋은 백토를 구한 덕에 크고 발색이 좋은 백자 항아리를 만드는데 성공했다.
전형적인 달항아리 모습을 보여주는 <백자 대호> 18세기 높이 41.4cm
이 즈음 백자 항아리는 문화의 하향전파 과정을 거치면서 민간에도 확산됐다. 오늘날 보게 되는 다양한 형태의 둥근 달 항아리는 금사리를 전후에 만들어진 백자 항아리이다. 달과 같이 둥그스름하게 생긴 백자 항아리는 좌우대칭의 세계는 아니다. 백토의 문제, 불의 관리 등 제작상 어려움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보다는 계산된 기하학적 선은 한국인들이 싫어하는 것이었다. 그런 점에서 백자 달 항아리는 보는 방향에 따라 천변만화의 얼굴을 보이는 세계 유일의 도자기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