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명 : 간송문화전 - 문화로 나라를 지키다
장소 : 동대문디자인플라자 배움터 2층 디자인박물관
기간 : 1부 - 2014년 3월 21일 ~ 6월 15일
2부 - 2014년 7월 2일 ~ 9월 28일
해마다 두 번씩. 때론 변덕스런 비바람 속에 꼼질 꼼질 발을 움직이며 서 있어도 행복한 미소 떠나지 않았고, 아직 무더운 열기 속에 뜨거운 빛을 온몸으로 받으며 꼼짝없이 두어 시간 서 있어도 그 봄과 가을날은 행복했다.
애호가들만이 손꼽아 기다리던 간송미술관의 전시는 이제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아침 일찍부터 길고 긴 줄을 서는 전시로 유명하다. 언젠가부터 성북동 간송미술관의 추억은 지식인 혹은 문화를 사랑하는 이들의 자랑거리이듯 그맘때쯤이면 이미 전시를 둘러보아야 식자연할 수 있는 분기가 된 것이다. 사람들은 작품에 대한 기대 가득한 담소로, 미술관을 건립한 간송선생의 행적을 더듬는 대화로 그 긴 시간 어렵지 않게 보낸단다. 이 열기는 우리나라 국민 전체의 문화적 소양이 높아진 증거일 터이니 간송선생께서는 하늘에서라도 이 소식 전해 들으시고 흐뭇하실 것이다.
성북동에서 1년에 단 두 번 볼 수 있고 어쩌면 내 생애 다시는 보지 못할 지도 모른다는 조급증이 성북동이라는 말만 들어도 간송미술관을 떠올리게 하는 이유일 것이다. 그 간송미술관의 작품들이 지나치게 세비를 많이 썼다는 둥 입방아에 오르내리는 자하 하디드가 지은 엄청나게 큰 건물인 DDP에 들어온다고 하였을 때 놀란 것은 당연할 것이다. 성북동 골목길을 들어서야 볼 수 있는 그 ‘조용한’ 작품들을 떠들썩한 장소에서 본다는 것은 어떤 모습일지 상상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만큼 관계자들도 DDP에서의 전시를 결정하는 과정이나 전시를 하는 행위 자체가 부담스러웠을 것이다. 간송미술관이라는 기대치 높은 공간을 다른 ‘상품’들이 널려 있는 곳에 한 자리 차지하게 하는 것에 대해 누가 두려워하지 않겠는가.
간송문화재가 소개된 DDP야경과 특별전 도록
간송, 사람과 문화
디자인 박물관의 일부에서 열린 전시는 1부 간송 전형필, 2부 보화각이다. 현재 전시는 간송이라는 인물에 대한 조명이 목표이므로 각 섹션은 간송의 문화재와 문화를 접근하는 과정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러면서 이른바 교과서에서 볼 수 있는 명품들이 그득함을 표방하고 있다. 간송이 어떻게 그 작품을 소장하게 되었는가 전해주는 내용들은 우리 문화재가 저절로 우리 앞에 놓인 것이 아님을 알려준다.
오세창으로부터 감화받고 이후 우리 문화를 후원하고 문화재를 지켜온 한 개인의 활동이 오늘날 국보가 그득한 컬렉션을 만들 수 있었던 과정을 유추할 수 있다. 문화재를 되찾아오기 위해 기와집 400채 가격을 지불하고 찾아온 청자들은 그의 문화재 애호활동이 단지 ‘애호’라는 감상적 취미활동이 아니었음을 증명한다. 누군가는 목숨을 바쳐 구하려던 그 나라의 정신을 간송은 실물, 문화재로서 지켜낸 것이다.
부제 ‘문화로 나라를 지키다’를 통해 근대기 간송선생의 문화재 애호가 결코 개인적 취향이나 호사가 아닌 구국의 일환이었음을 알려준다. 간송미술관에서와 달리 이번 DDP에서는 일반인들에게 접근하기 쉬운 제목을 보여주고 있어서 시정에 나온 미술관의 적극성을 드러내는 단서라 하겠다. 많은 이들이 그들만의 리그가 된 간송미술관의 전시관람을 일정 액수의 입장료만 지불하면 접근할 수 있는 것은 오히려 무료가 아닌 유료를 통한 관람의 저변확대라는 아이러니를 낳는다. 몇 시간씩 줄을 서는 사이에 끼지 못하는 많은 사람들이 있었고, 그들은 자본을 통해 접근할 수 있는 것이다. 이는 분명 일반 미술관이나 박물관의 유료관객과 무료관객의 태도 차와는 확연히 다른 부분일 것이다. 그래서 조바심을 내지 않고 줄을 길게 서지 않고도 전시를 관람할 수 있는 조건의 형성은 진정 기쁜 일 중의 하나일 것이다.
국보 제68호 청자상감운학문매병 높이 41.7cm 국보 제65호 청자기린유개향로 높이 19.7cm
‘간송 전형필’이란 인물의 행적을 더듬는 전시이므로 간송 개인의 비망록이나 작품 등을 소개하는 데서 전시는 시작한다. 실지 소장품 전시는 <길을 열다>부터인데 겸재 정선이 72세에 금강산을 다녀오고 혼신을 다해 표현한 <해악전신첩>과 현재 심사정의 <촉잔도권>을 전시하고 있다. 특히 818센티미터에 이르는 기다란 두루마리여서 여느 공간에서는 펴기조차 어려운 길고 긴 <촉잔도권>을 완전히 펴서 보여준 것은 인상적이다. <지켜내다>는 사재를 털어 고려청자를 지켜낸 과정과 그 작품들을, 그리고 마지막 훈민정음에서는 그가 그토록 애타게 찾았고 결국 손에 넣어 우리나라 음운의 확인과 정리에 큰 기여를 한 <훈민정음>을 밀폐된 방을 마련하여 전시하고 있다.
국보68호 <청자상감운학문매병>의 활기찬 학의 날갯짓을 다시 볼 수 있음도 즐겁고 원숭이 모양 연적의 해학과 깨달음에 대한 은유를 환기하는 선비문화의 유구함에 경탄도 한다. 하지만 무엇보다 놀라운 것은 혜원의 풍속도첩을 즐거이 한없이 바라볼 수 있다는 점이다. 게다가 진열장 옆 벽면에는 친절하게도 3D로 입체감을 높였다는 삼성UHDTV 화면을 통해 육안으로 확인할 수 없는 세세한 부분, 이를테면 단오날 그네를 타는 여인의 입가에 찍힌 점이라든가 당집에 어른들과 함께 굿을 하러 와서는 담장 밖 남정네에게 보내는 아름다운 아낙의 안타까운 눈짓까지 확인할 수 있다.
국보 제70호 훈민정음
가히 디지털 기술을 통해 더욱 좋은 감상을 할 수 있다는 경험을 제공받은 순간이다. 하지만 그리 편안한 마음으로 감상에 몰입하게 하는 환경은 아니었다. “삼성전자는 ‘훈민정음 해례본(국보 70호)’, ‘청자상감운학문매병 (국보 68호)’, ‘혜원 신윤복 전신첩(국보 135호)’ 3점을 UHD 콘텐츠로 제작해 관람객들에게 전할 예정이다.”라는 신문기사는 영상으로 재현된 옛 그림에 대한 기대를 높였다. 하지만 정작 그 화면들 앞에서 불편한 마음이 가라앉지 않는 것은 끊임없이 화면 우측과 좌측에서 사라지지 않고 한글과 영문으로 존재를 드러내는 ‘삼성UHDTV’ 때문이었다. TV 광고 화면을 미술관 전시에서, 그것도 간송전에서 마주할 지는 몰랐었다. 그것은 하드웨어에 대한 협찬이 아닌 소프트웨어, 컨텐츠의 잠식으로 보였다. 문화재는 그렇게 소비되고 광고의 대상으로 전락하고 있는 현장을 목도하는 듯하다.
성북동 메마른 골짜기에는
조용히 앉아 콩알 하나 찍어 먹을
널찍한 마당은커녕 가는 데마다
채석장(採石場) 포성(砲聲)이 메아리쳐서
피난하듯 지붕에 올라 앉아
아침 구공탄(九孔炭) 굴뚝 연기에서 향수를 느끼다가
산 1번지 채석장에 도루 가서
금방 따낸 돌 온기(溫氣)에 입을 닦는다.
김광섭이 읊은 <성북동비둘기>의 한 구절이다. 수십 년 전 성북동은 번잡한 곳으로 변해버렸다고 한탄하였지만 지금 우리가 기억하는 성북동, <간송미술관>은 고즈녁한 산자락에 새가 지저귀고 온갖 야생초가 만발하는, 도시 한가운데 아르카디아가 솟아나 존재하는 것만 같은 공간이다. 그 친숙하지만 생경하고 자연적인 공간에서 만나는 간송의 수장품들은 역사화하고 보물보다 소중한 가치로 각인되었다.
신윤복 <단오풍정> (혜원전신첩 중) 지본담채 35.6x28.2cm
이제 울긋불긋한 옷을 진열하고 온갖 물건들을 늘어놓은 시정에 간송의 수장품들이 그 면목을 드러냈다. 그 생경함은 이미 예견했던 터라 전시에 대한 충격은 덜한 것 같다. 그만큼 우리 모두가 간송의 수장품을 사랑한다는 증거이기도 하겠다. 성북동 산골짜기에서 시정에 내려온 간송의 수장품은 이제 언제든지 보기 원하는 이들이 8천원만 지불하면 들여다볼 수 있는 장소에 당분간이나마 자리잡았다. 대중 속으로, 대중을 위해 그리하여 문화재의 정신을 계승하기 위해 진정 간송문화전이 지속되기를 바라는 이들이 그득하다. 그런데 이전의 성북동에서 길게 줄을 서서 보던 미술관이 아닌 입장료를 낸 미술관에서 적어도 얇은 종이 한 장이라도 간송문화전에 대한 안내문은 있어야 할 것 같다. 커다란 도록이 아니어도 그 전시를 내가 보았고, 또 떠올리기를 바라는 이들이 가는 곳, ‘시정잡배’들이 우글대는 시정에 위치하였으니 말이다.
삼성전자 관계자는 “간송문화전은 소중한 우리 문화재의 아름다움을 널리 알리고 우리 것에 대한 자긍심을 고취시킨다는 데에 큰 의미가 있다”며 “우리 문화재의 가치를 보존하고 더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는 이번 전시에 참여하게 되어 뜻 깊게 생각한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