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명 : 부산의 옛 기억
전시장소 : 부산박물관
전시일정 : 2013-12-21 ~ 2014-02-23
‘기록은 기억을 지배한다’라는 카메라광고 카피처럼 기억은 언젠가 희미하고 흐릿해지기도 하지만 기록은 손실되지만 않는다면 오랜 시간동안 또렷하다. 그렇다면 흔적은 어떠할까?
흔적은 하나의 기록이자 기억일지도 모른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에 그 옛날 누군가 살았고 그 흔적을 발견하는 일은 이제부터 하나의 기록이 되고 기억이 된다. 그래서 발굴조사가 중요하고 유적이 소중하며 유물발굴이 경이롭고 놀랍다.
전시를 통해 보자면 어쩌면 발굴조사 성과전은 완전한 형태의 유물을 볼 수 있는 전시보다 그리 흥미롭지 않고 지루하게 여겨질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성과들이 완전한 형태로 발견되는 유물의 연결고리 또는 카테고리로 이어질 수도 있고 또 다른 유물의 존재를 알게 해주는 발판이 된다. 무엇보다 우리가 무심코 걸어 다니는 길에 그 옛날 누군가가 걸어 다녔고 그 흔적이 남아있다는 것 차체를 생각한다면 호기심정도는 생기지 않는가. 그 정도 호기심으로 전시장에 발을 들여놓고 보면 흥미롭지 않다고 생각했던게 오산이었음을 알게 된다.
부산박물관에서 진행중인 5년간의 발굴조사의 성과를 보여주는 [부산의 옛 기억]전은 각 시대에 따른 6개의 주제와 부산지역 사찰의 발굴조사 성과를 살펴볼 수 있도록 기획되었다.
굽다리접시, 연산동 고분군 M10호 무덤
굽다리접시, 연산동 고분군 M3호 무덤
긴목항아리, 연산동 고분군 M3호 무덤
긴목항아리와 그릇받침, 연산동 고분군 M10호 무덤
낚시바늘과 작살, 연산동 고분군 25호 무덤/구랑동 고분군 22호무덤
장신구, 연산동 고분군 3호 조선시대 무덤
조선시대 전반기 까지는 남성도 귀고리를 착용하였으나 '신체발부수지부모'라하여 유교윤리에 어긋난다는
비판으로 인해 선조(1567-1608)대에는 착용금지 법령까지 내렸고 이후 여성들도 귓바퀴에 걸게 되었다고 한다.
족집게, 연산동 고분군 30호 조선시대 무덤 외 철제가위, 연산동 고분군 73호/35호 조선시대 무덤 ㄹㅇㄹ
반지출토 상태, 연산동 고분군 43호 조선시대 무덤
연산동 고분군의 조선시대 무덤 9기에서 총 13점의 반지가 출토되었는데 모두 동(銅)제품으로
서민들이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반지는 조선시대 남성들도 가장 많이 애용한 장신구였다고 한다.
각 시대별 무덤에서 출토되는 유물을 통해 시대의 변화 또한 살펴볼 수 있는데 고려․조선시대 무덤에서는 장신구와 화장도구인 청동거울, 족집게 등이 출토되어 그 시대 사람들의 미의식을 살펴볼 수 있다.
한글새김 분청사기. 하장안유적 5호 가마 폐기장
분청사기에 한글이 새겨진 사례로는 광주 충효동 가마에 이어 두 번째인 이 도자기의 한글은 부산에서 나온 가장 빠른 예이다. 서체가 1527년에 발간된 훈몽자회에서 나타나는 한글학습방식으로 분청사기의 제작시점인 16세기 전반과 일치한다. 1446년 훈민정음이 창제된 이후 반세기가 지난 시점에 한글 보급이 지방에 까지 이루어졌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유물이다.
기비사(祇毗寺)명 기와, 전 만덕사지
발굴조사를 통해 이와 같은 중요한 유물의 발굴뿐만 아니라 문헌기록이나 절터의 흔적만으로 막연히 추정되었던 절터의 사찰명 등을 구체화 하기도 했는데 통일신라 시대에 창건되었다고 구전으로 전해지는 장안사는 발굴조사를 통해 통일신라시대의 유물과 문화층을 확인하였고 만덕고개 부근에 이름 없는 절터는 만덕사가 아니라 출토 기와에 새겨진 기비사일 가능성을 제기하였다.
막연히 또는 어렴풋이 누군가 하겠지 싶은 일을 해내고 뿌듯해하고 여러 사람에게 알리는 일을 하는 숨은 주역들이 많은 분야에서 활동할 것이다. 그리고 미래엔 또 누군가가 그런 일을 통해 우리 삶의 흔적을 찾겠지?.. 굳이 발굴하지 않고 컴퓨터보다 스마트폰 보다 더 편리한 기구로 과거를 훑어볼 수 있을까?.. 그 옛날 사람들은 우리가 이렇게 그들의 흔적을 찾아보고 연구할 줄 알았을지 궁금증을 유발하는 전시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