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명 : 박수근 탄생 100주년 기념전
전시장소 : 가나인사아트센터
전시일정 : 2014. 1. 17 - 2014. 3. 16
박수근, 고목과 행인, 1960년대, 53x40.5, 캔버스에 유채
궁핍했던 시대를 화강암 같은 질감으로 담담하게 그려낸 박수근의 그림을 바라보는 관객들의 표정이 애잔하다. 가정의 생계를 책임져야 했던 가난한 화가의 일생이 애틋하고 하루를 살아내는 것이 고달팠던 가난한 전후의 풍경들이 아련하기 때문일 것이다. 미석(美石) 박수근(朴壽根, 1914-1965) 탄생 백 주년을 기념하는 전시가 인사동 가나인사아트센터에서 2014년 3월 16일까지 열리고 있다. 우둘투둘한 질감의 유화와 맑고 선명한 수채화, 판화와 드로잉 등, 그간 한 점 두 점 귀하게 만나던 박수근의 작품이 전시장 4층 전관을 가득 채우고 있어 간만에 박수근의 인생과 예술을 넘치도록 느껴볼 절호의 기회가 펼쳐졌다.
중첩되는 문화적 기억들
‘국민화가’라는 명성이 낯설지 않은 박수근은 이미 한국에서 가장 비싼 작가로 여러 번 방송에 소개되었고, 독학으로 이룬 선하고 진실한 일생은 전기로도 출판되고 교과서에도 실려 대중에게 잔잔한 감동을 안겨 주었다. 이러한 폭넓은 인지도를 고려하더라도 박수근의 전시장은 여느 다른 미술 전시와는 확연히 다른 점이 있는데, 그림을 관람하는 관객들의 풍부한 공감의 표정과 몸짓들이 그것이다. 손님을 애처롭게 기다리는 거리의 아낙네와 가지가 부러진 헐벗은 나무들, 머리에 짐을 이고 집으로 총총걸음을 옮기는 모자의 모습 등, 빛바랜 듯 부러 흐리게 그린 그림들은 관객들로 하여금 어느덧 자신들의 추억을 떠올리게 하고, 전시에 동행한 이에게 그 시절을 얘기하게 한다. 그렇게 전시장을 울리며 도란거리는 낮은 소리는 당대를 살았던 이들뿐 아니라 전후 고단함을 상상으로만 알고 있는 젊은 세대들의 무심한 감정마저도 공명시키고 있었다.
박수근, 귀로, 1964년, 26.8x34.3, 하드보드에 캔버스
이 같은 현상은 개인의 체험이 시간의 벽을 넘어 사회적 기억으로 전환되는 데 있어 미술이 중요한 매개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일깨워준다. 기름기 없는 무채색의 유화를 쌓아 올려 선명했던 윤곽선을 애써 감추는 독특한 박수근의 회화 기법은 시간을 캔버스에 착상시키는 데 최적의 방식이었다. 그래서 과거의 물증인 화석처럼 박수근의 풍경은 1950년대 전후 한국사회에 대한 가장 신뢰성 있는 시각적 기록으로 다가오는 것이다.
소박하고 정감 어린 박수근의 작은 그림들은 가난하지만 행복했던 시절을 되살린다. 그리고 관객들은 궁핍했던 시절에도 잃지 않았던 가족애와 인정을 되살리며 사회의 원초적 동질성에 대한 믿음을 잠시나마 회복하게 된다. 현실에서의 상실을 미적 체험으로 대체한다고 할까. 그런 점에서 서민화가 박수근에 대한 애정이 세대를 넘어 이어지는 현상은 발전지향의 한국 사회가 지닌 독특한 문화적 징후로까지 느껴진다.
실제로 박수근 그림의 명성과 평가는 한국 사회의 급속한 변화 속에서 이루어졌다. 1950년대 박수근의 그림은 이국적인 것을 찾던 주한 외국인들이 더 좋아했었다. 비추어 생각해 보건대 오늘날 박수근이 ‘국민화가’로 큰 사랑을 받는다는 것은, 우리가 이미 예전의 우리가 아니라는 사실의 반증이기도 할 것이다. 1970년대 도시화로 인한 고향에 대한 한국인들의 집단적인 상실감이 박수근의 회화를 재발견하게 한 것처럼, 오늘날 신자본주의 시대 원자화된 현대인들의 공허는 박수근을 더욱 한국적 서정의 화가로 애착하게 하는 것이다.
사실 한 사회의 집단 기억이 공동체로 하여금 끈끈한 연대감을 가질 수 있게 하는 정서적 기조라는 점에서 이러한 미체험은 문화적일 뿐 아니라 정치적이기도 하다. 얼마 전 한 신문에서는 법관들이 ‘서민화가’의 작품을 보기 위해 전시장을 방문한 것을 기사화했다. 제법 크게 실린 문화면 기사에는 법조계가 서민들의 삶을 더 가까이 이해하기 위해서라는 설명이 덧붙여져 있었다. 박수근의 작품이 사회적 연대의식을 끌어내는 데 공헌하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진실하게 한 시대를 담아낸 박수근의 작품이 지나간 시절의 추억으로만 남는다면 그건 화가가 바라는 일이 아닐 것이다. 그가 살던 창신동 골목과 언덕은 여전하고 언제나 낮은 곳의 삶은 지속되고 있기 때문이다.
1959년 창신동 자택에서의 박수근과 부인 김복순
“국민화가” 신화를 넘어 열린 텍스트로
이중섭도 그렇지만 박수근은 학술적인 평가와 연구 이전에 대중적인 인기가 먼저 높아진 경우이다. 켜를 이루고 있는 박수근의 화폭처럼 국민화가라는 명성도 사후 거듭되는 전시와 소설, 방송 등을 통해 쌓여 왔다. 1965년에는 소공동 중앙공보관에서 《박수근 회고전》이 열렸고 1970년 현대화랑의 《박수근 소품전》에서 다수의 작품이 판매되었다. 1975년 문헌화랑에서 기획된 개인전이 성공리에 끝난 이후, 10주기마다 기획전이 이어졌으며, 1985년 20주기를 기념해서는 민주운동이 한창이던 1980년대의 흐름에 맞게 “민중의 화가 박수근”이라고 평가되었다. 그리고 2010년 45주기 기념전에 이르러서는 《국민화가 박수근》이 되었다. 향토적 정서와 서민의 화가라는 대중적 호감이 1970대 이후 국내 미술시장의 확대와 점증하던 민족주의 정서와 작용하면서 점점 단단하게 굳어져 온 것이다.
한국의 대표 작가로 이중섭, 김환기와 더불어 박수근은 이제 아동들의 위인전에도 포함되는 친숙한 이름이 되었지만, 그에 대한 학술적인 분석이나 연구는 예상보다 많지 않다. 2002년 국립현대미술관이 ‘한국근대미술사학회’가 공동으로 “박수근 회화에 나타난 사회성과 여성성” 이라는 주제의 심포지엄을 개최한 것이 근자의 학술적인 시도였다. 박수근이 여인을 많이 그린 탓에 전후 사회 재현에 대한 페미니즘의 시각으로 해석된 것이다. 이후 학위논문으로는 빨래터 진위 논박이 계기가 된 박수근의 서명과 작품론, 박수근 미술품 가격의 형성과 서구적 시각에서의 수용에 대한 석사논문 정도가 눈에 띈다. 이러한 대중적 신화와 학술적 연구 사이의 괴리는 박수근 미술이 전위적인 현대미술과 거리가 있다고 여겨지거나, 외국인들이 선물용으로 구매한 상업적 그림이라는 암묵적 인식 때문이기도 하다.
박수근, 빨래터, 1950년대, 37x72, 캔버스에 유채
박수근 탄생 100년을 축하하는 기쁜 자리에서 굳이 이러한 문제를 들먹이는 이유는, 이제는 박수근의 미술을 취향을 넘어 문화적 해석의 대상으로서 바라볼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박수근은 전후 어떤 화가보다 명실상부한 전업 화가였다. 그의 독창적인 화면의 질감과 주제는 컬렉터들과의 적극적인 상호 관계 속에서 이루어졌고, 작품가격은 경제발전기 미술시장 메커니즘에 의해 형성되었다. 특히 시간의 흔적을 입히는 덧바르기 방식은 시기에 따라 혹은 판매나 전시의 용도에 따라 다양하고, 화면의 공간과 구조도 시기적으로 변모하고 있어서 분석의 여지가 많다. 무엇보다 2008년 <빨래터> 사건에서 보듯 박수근은 실질적인 작품 감정의 중요성을 새삼 부각시킨 작가이기도 하다.
우리가 사랑하는 박수근의 작품은 거듭 판매가를 갱신할 것이고 앞으로도 꾸준히 전시회가 열릴 것이다. 이제 박수근의 미술을 “국민화가”라는 울타리로 가두지 말고 전후 사회의 시각 문화와 집합적 기억의 구축, 한국 미술시장의 형성과 근대미술사의 구성과 같은 다양한 해석을 위한 열린 텍스트로 ‘해체’되길 기대해 본다. 그것이 박수근의 미술 세계를 더욱 풍성하게 하는 일일 것이다.
박수근, 노목과 어린나무, 1962년, 22x33.5, 하드보드에 유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