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눈으로 전체를 볼 수 있는 전시가 있는가 하면, 작정하고 시간을 들여야 하는 전시가 있다. 작품에 러닝타임이라는 것이 있는 비디오 아트라면 실제 관람시간은 훨씬 길어질 것이다. ‘시간’이 뉴미디어 미술의 달라진 형식조건인 셈이다.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에서 열린《비디오 빈티지 1963-1983》와 《미래는 지금이다!》전은 파리의 퐁피두 센터와 국립현대미술관이 기획한 뉴미디어 아트 전시로서, 전자가 세계적 맥락에서의 비디오 아트의 역사를 보여주는 것이라면,《미래는 지금이다!》는 한국 비디오아트의 역사를 요약하고 있다. 이 두 전시는 이미 반세기의 연륜을 쌓은 비디오 아트의 어제와 오늘을 학구적으로 재정리하는 값진 기회였다.
‖ 비디오 빈티지 VIDEO VINTAGE 1963-1983 ‖
《비디오 빈티지》전은 퐁피두가 소장하고 있는 비디오 아트 초기 20년간의 문제작 72점이 선별되어 나온 방대한 전시였다. 퐁피두센터에서 직접 기획해 순회하게 된 이 특별전은 빈티지풍 안락의자에 앉아 지직거리는 구형 브라운관 TV 그대로를 ‘즐감’할 수 있도록 한 공간 디자인이 단연 돋보였다. 관람객들은 어느 때보다도 편안하게 ‘카우치 포테이토’의 일상으로 돌아가 작품을 보는 재미를 만끽할 수 있었을 것이다. 전체 러닝타임 18시간을 소화할 충분한 시간만 있었다면 말이다!
빈티지 뉴미디어, 비디오 아트의 아카이브
비토 아콘치 Vito Acconci, 중심들(Centers), 1971, 흑백, 사운드, 23분
전시는 ‘퍼포먼스와 셀프촬영’, ‘텔레비전: 연구. 실험. 비평’, ‘태도, 형식, 개념’ 이렇게 세 파트로 나누어졌다. 16세기 유화가 정교한 물질감으로 초기 자본주의의 물신을 캔버스에 완벽하게 재현하여 미술의 혁신을 이룬 것처럼, 1960년대 초 발매된 포터블 카메라의 편리함은 막 시작된 미디어 혁명에 동력이 되어 대중 소비사회 현대인의 삶의 양태를 단숨에 포착해냈다. 첫 번째 장에서는 백남준이 소니 휴대용 카메라를 사자마자 제작했다는 위트 있는 <버튼 해프닝 Button Happening>(1965, 흑백 러닝타임 2분)이 눈에 띈다. 《비디오 빈티지》전에 출품된 백남준의 초기 두 작품과 그의 어록을 차용한 기획전《미래는 지금이다!》는 비디오 아트의 시조로 미술사에 이름을 올린 백남준의 위상을 새삼 실감하게 된다.
이어 2부와 3부에서는 비디오를 통한 문화비평과 개념미술의 문제작들이 준비되었다. 윌리엄 웨그만(William Wegman)의 미디어 시대 무감각해진 일상에 대한 조크, 브루스 나우만(Bruce Nauman), 크리스 버든(Chris Burden)의 전설적인 신체 퍼포먼스 외에도 사회의 억압과 암묵적인 검열을 비판하는 행동주의 계열의 작업들을 감상할 수 있었다. 이중 마사 로즐러(Martha Rosler)의 <부엌의 기호학 A-Z Semiotics A-Z>(1975)은 무료한 부엌 퍼포먼스를 통해 가정의 억압을 다룬 초기 페미니즘 미술의 고전이고, 3인조 그룹 앤트팜(Ant Farm)이 실현했던 <미디어 불태우기 Media Burn>는 미국적 삶을 대변하는 두 아이콘 텔레비전에 캐딜락이 충돌하는 박진감 넘치는 퍼포먼스로 과도한 애국주의와 미디어 독점을 비판했다. 그런가 하면 현존 최고의 비디오 아티스트라 불리는 빌 비올라(Bill Viola)는 <뒤집힌 텔레비전, 관람자의 초상>을 통해 새로운 미디어에 직면한 인간 행동을 성찰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코리아 아메리칸의 정체성을 다룬 한국계 미국인 미술가 테레사 차학경(Theresa Hak Kyung Cha)의 작품을 놓칠 수는 없다. 차학경은 <순열들 Permutations>(1976)과 <입에서 입으로, 딕테>(1975)의 모래처럼 흐려지는 브라운관을 통해 언어의 불투명성과 모국어의 상실을 안타깝게 전달한다.
차학경, 입에서 입으로, 딕테, 1975, 흑백, 사운드, 8분
이 외에도 프랑스 영화가 장-뤽 고다르(Jean-Luc Godard), 팔레스타인인 미술가 모나 하툼(Mona Hatoum), 사무엘 베케트(Samuel Beckett), 요셉 보이스(Joseph Beuys)의 영상도 출품되었다. 1984년 위성 전파를 타고 방영된 ‘굿바이 미스터 오웰’의 밑그림이자 세계화를 예견한 백남준의 대표작 <글로벌 그루브>(1973) 도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작품이다. 일목요연하게 정리된 비디오 미술의 연대적 기록과 중요한 작품들의 풀 버전 재생, 중요한 작품이 한꺼번에 쏟아져 나온 이 전시는 비디오 미술의 오픈 텍스트라 할 만했다.
‖ 미래는 지금이다! ‖
《미래는 지금이다!》는 1987년 개관부터 백남준의 <다다익선>을 설치하고 실험적인 뉴미디어 미술을 적극적으로 수집해오고 있는 국립현대미술관의 관심을 담은 소장품 기획 전시이다. 전시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3부로 이루어져 있어서《비디오 빈티지전》에 화답이라도 하듯이 한국 비디오 미술의 역사를 보여주었다. 백남준의 <자석 T.V>를 프롤로그로 삼은 1부 ‘한국 뉴미디어 아트의 선구자들’에서는 한국 비디오아트 1세대에 속하는 박현기, 곽덕준, 육태진의 작품이 나왔다. 백남준에 가려져 있던 이들 1세대들은 한국 최초의 실험영화인 김구림의 의 맥을 잇는 전위적인 작업을 선보이고 있다. 한편 2장 ‘테크놀로지와 예술의 결합: 실험과 도전의 시대’ 에서는 1990년대 영상세대에 속하는 공성훈, 육태진, 김영진, 문주, 이불의 작품이 소개되고 있다. 특히 1999년 베니스 비엔날레에서 특별상을 받은 이불의 <영원한 삶>은 관람객들이 그 미끈한 자동차에 직접 시승하지는 못하지만 가라오케의 B급 영상은 올드팝의 선율과 함께 강퍅한 현실의 대체물이 되어 잠깐의 위안을 제공한다. 1세대와 2세대를 포괄하는 이들의 작품에서 공통으로 느껴지는 소외와 노스탈지의 정서는 한국 뉴미디어 미술에 지속해서 주입된 문제의식이 산업화 시대의 깊은 상실감이었음을 깨닫게 해준다.
미디어는 메시지! 비디오로 발언한다.
국립현대미술관은 현재 전체 소장품 7,051점 중에서 107점을 2001년 도입한 새 분류체계에 따라 뉴미디어(New Media) 아트로 지정하고 있다고 한다. 상영시간을 가지고 플레이 되는 뉴미디어 미술이 기존의 영화나 드라마와 어떻게 다른 장르인지 설명하기는 쉽지 않다. 그래서 “미술관에 놓이면 미술, 상영관에서는 영화”라는 조롱 섞인 반문도 할 수 있겠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영상이 엔터테인먼트를 넘어 미술의 자격을 얻으려면 그 필요조건으로 사회와 인간에 대한 성찰의 메시지를 담고 있어야 한다.
그래서인지 한국의 비디오 미술가들은 마셜 맥루한이 언급한 대로 “미디어가 메시지”가 되는 비디오 아트 본래의 기능을 십분 활용하고 있는 것 같다. 소위 포스트 민중시대의 새로운 현실주의 작가라 불리는 함양아와 임민욱 등이 그러한 작가군의 대표자들이다. 이들은 영상을 통해 민주주의 이후 민주주의의 실패, 경제발전 이후 도시의 빈곤에 대해 가장 통렬한 목소리를 내고 있다. 지나치게 차분한 블랙박스 전시장에 빠른 비트의 드럼으로 활력을 불어넣고 있는 임민욱의 <뉴타운 고스트>는 무자비한 개발의 틈에서 유령이 되어버린 도시 속 타자들의 목소리를 소환시키고, 김홍석은 국가(國歌) 퍼포먼스, 영상을 통해 자본과 권력으로 재현된 세계질서와 국가주의를 조소한다. 기존의 회화나 조각이 제시하기 어려운 주제를 뉴미디어 미술은 다큐와 허구, 편집과 비디오 콜라주, 사운드의 강렬함과 기계적 이미지의 변환을 통해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임민욱, 뉴타운 고스트, 2005년, 10분 59호, 싱글채널 비디오
새로운 질문, SNS 시대의 미디어 아트는?
3년 전 국립현대미술관 첫 미디어 미술 소장품전인 《조용한 행성의 바깥》(2010년)이 열릴 때, 미술관은 삼성 갤럭시 태블릿을 전시장에 투입한 적이 있다. 기업 마케팅의 일환이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인터넷 환경을 미디어 미술 전시에 개입시켰다는 점은 의미가 있었다. 그로부터 2년이 지난 시점에서 다시 만난 뉴미디어 미술 소장품전, 평자가 가장 궁금했던 부분은 미술에 접목된 뉴미디어 테크놀로지의 최전선이었다. 그래서 더욱 전시의 세 번째 장인 ‘인터넷의 출현과 뉴미디어 아트의 저변확대’는 기대를 불러일으킨다.
인터넷이라는 상호교환적 테크놀로지의 등장은 뉴미디어 미술의 변화에 가장 강렬한 도화선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아쉽게도 인터넷 혁명이 폭발적인 변화에 직면한 현시점에서 쌍방향의 수평적 커넥션을 보여주는 실험을 이번 전시에서는 찾을 수 없었다. 물론 관람 동선의 마지막에 만나는 이수자의 <실의 궤적> (2010)이 펼쳐 보이는 장중한 영상은 문명의 원형과 토착적 삶의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이 전시는 인류학자 엘네라 호지가『오래된 미래』에서 주장한 느린 삶에 대한 예찬으로 결말짓고 있는 것인가?
입구에 적힌 백남준의 글귀, “미래는 지금이다”와 수미상관을 이루지 못한 밋밋한 전시의 엔딩이 아쉽다. 한국의 뉴 미디어아트 기획전에서 퐁피두의 빈티지풍 전시에 비견될 만한 ICT(Information & Communication Technology)강국, 한국형 미디어 아트의 제안이 절실했다면 너무 전략적 요구일까?
유비호, 황홀한 드라이브, 2008년, 싱글채널 비디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