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명 : 명화를 만나다, 한국근현대회화 100선
일정 : 2013. 10. 29-2014. 3. 30.
장소 :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
이상범 <추경산수> 1954년경 69.3x274cm 종이에 수묵담채
이중섭 <소> 1953년경 35.3x52cm 종이에 유채,에나멜
‘한국미술사의 큰 업적을 남긴 화가 57명의 수묵채색화, 유화 등 회화작품 100점을 엄선해 한국회화의 진수를 살펴본다’는 전시에 대한 예상 밖의 큰 호응은 유난히도 맑은 하늘과 아름다운 은행잎이 빛나는 깊은 가을의 정취도 한몫했다.
적어도 1970년대까지 가을의 고궁은 ‘예술의 광휘’로 가득한 공간이었으며 고달픈 일상에 우아한 향기를 들이마시게 하는 한 잔의 차와도 같은 장소였다. ‘국전’을 안고 있던 가을날의 덕수궁은 그렇게 근대에서 현대를 지나온 장년층에게는 젊은 날의 향기로 기억된다. 적어도 현대, 새로움, 동시대라는 이름으로 진행되는 작금의 전시에서 소외받은 중장년층이 이해할 수 있는 작품들을 만나게 하였다는 점에서도 이른바 틈새시장까지도 개척한 전시라는 점에서 상찬(賞讚)받을 만하다.
김환기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1970년경 232x172cm 캔버스에 유채
전시는 전체 4부로 구성돼있다. 1부 ‘근대적 표현의 구현’에서는 동경유학을 통해 배워온 화가들의 양산에 따른 양화단의 형성을 가늠할 수 있다. 조선미술전람회를 통해 구축된 아카데미즘 미술의 양상을 파악할 수 있다.
1940-50년대의 작품들은 2부에서 ‘새로운 표현의 모색’이라 규정되고 있다. 광복 후 일본을 극복하기 위하여 벌인 각고의 노력과 전후 실존을 다룬 작품들을 선택하고 있다.
오지호 <남향집> 1939년경 80x65cm 캔버스에 유채
근현대 수묵채색화의 변화양상을 ‘전통의 계승과 변화’로 파악한 3부는 케케묵은 세계라고 비판받던 수묵채색화를 어떻게 개량할 것인지 고심한 당대 작가들의 흔적을 담고 있다. 4부는 1960, 70년대의 비구상적인 경향을 ‘추상미술의 전개’로 설정하였다.
변관식 <외금강산선암추색> 1959년경 150x117cm 종이에 수묵담채
전시공간을 분류한 명제들은 ‘새로움’을 근현대 회화의 특성으로 파악하고 있음을 노정한다. 유화라는 새로운 매체의 등장, 새로운 표현법의 모색으로 압축된다. 그 사이에 ‘전통의 계승과 변화’라는 주제를 두어 수묵채색화를 집중적으로 분석하고 있다. 일견 상대적으로 유화에 비하여 소홀해지기 쉬운 수묵채색화에 대한 배려로 보이지만, 전시된 작품의 수에서는 당황스럽다. 구분함으로써 타자화되는 수묵채색화의 현재는 전체 100점 중 30점이라는 수에서 증명되는 듯하다.
박수근 <빨래터> 1954년경 15x31cm 캔버스에 유채
‘미술사적인 의미와 함께 미술을 잘 모르는 일반인들에게 '감동'을 줄 수 있는 작품을 최우선으로 했다’는 전시 작품의 선정기준을 밝히고 있는 것은 ‘명품’이라는 수식어에 대한 부담이 컸던 때문일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이른바 4대가, 6대가, 10대가라고 칭하는 동양화의 거장들이 실은 1960년대 신세계화랑과 신문회관에서 있었던 <10대가전> 그리고 1989년 호암미술관의 <산수화 4대가전> 등에서 발원한 것을 알고 있으며, 전시를 통해 작품이나 작가를 규정하는 것이 미술사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또한 알고 있는 때문일 것이다.
김기창 <아악의 리듬> 1967년경 86c98cm 비단에 수묵채색
한국 근현대사에서 그림은 고난의 시대를 쉬게 하고 비루한 현재를 잊게 해주는 아름다운 세계였다. 소설가 박완서는 화가 옥희도라는 인물로 가공한 박수근을 『나목』에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홀연히 옥희도 씨가 바로 저 나목이었음을 안다. 그가 불우했던 시절, 온 민족이 암담했던 시절, 그 시절을 그는 바로 저 김장철의 나목처럼 살았음을 나는 알고 있다.”
박수근의 <나무와 여인>을 화랑에서 본 작가 박완서가 의자에 기대 쉬려고 찾은 곳수궁이었다. 그는 찬란한 은행잎을 바라보고 황금빛 세례에 몸을 맡기며 ‘가을의 양광은 차라리 봄보다 따습다’고 느꼈다. 지금 <나목>을 볼 수 없는 덕수궁의 전시장을 빛나게 하는 것은, 궁핍한 시대를 잠시 기대 마음과 몸을 쉬어 가게 하였던 옥희도를 닮은 이들의 화면에 쏟아부었던 그 찬란한 빛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