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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은정(미술평론가)

전시명:주태석 전
전시장소:갤러리 마노
전시일정: 2013. 10. 25(금)-11. 16(토)


nature-image / 45.5x53cm(10호 F) / 아크릴, 캔버스 2011

주태석의 화면은 전복적(顚覆的)이다. ‘개인적인 경험으로부터 자유롭기’ 때문에 도출한 결과라는 게르하르트 리히터처럼 그는 부드럽고 흐릿한 채색과 극히 일부이지만 강렬하게 보이기 위한 거친 붓질을 동시에 구사한다. 하지만 과거 ‘하이퍼-리얼리즘’의 추종자가 아니었던 것처럼 물론 그는 지금도 반미학적 신표현주의의 아류가 아니다. 화면 전체를 통관하는 ‘의도적으로 회화적’인 장치들은 작가의 심상과 시선이라는 세계를 경계 짓고 미끌어지게 한다.

1978년 봄 홍익대 서양화과를 졸업한 권수안, 김강용, 김용진, 서정찬, 송윤희, 조덕호, 지석철과 함께 결성한 <사실과 현실 78전> 이후 주태석은 ‘기차길’의 작가로 기억되었고 하이퍼리얼리즘으로 설명되었다. 기차길은 도시의 상업문화와 산업화를 기반으로 한 하이퍼리얼리즘의 본질과 동떨어진 위치에 존재한다.



nature-image / 100x200cm(120호 변형) / 아크릴, 캔버스 2011


거칠거칠한 침목과 찌그러진 자갈들이 뒹구는 그 ‘장소’는 산업의 매끄러운 표면은 사라지고 이동과 부유, 자연이 인간과 만나는 지점이다. 그곳에는 산업화에 따른 농촌의 소외, 그리고 무작정 상경으로 이어진 근대화의 깊은 골이 있었다. 70년대 후반 젊은 작가들에게 하이퍼-리얼리즘은 문명에 대한 성찰이나 도시생활의 반영으로서 서구자본주의에서 발생한 양식이 아닌, ‘형식’으로 소비되었고 그것은 모든 것을 옥죄는 시대를 관통해가는 정신의 겉치레였던 것이다. 

이후 나무를 그리는 작가로서 알려지며 일관되게 라는 제목을 고수하며 숲과 나무, 그림자를 그려온 그는 어느 정도 ‘사진과 같은 사실성을 가진’ 채 오늘에 이른  동료들과는 다른 세계에 속해 있다. 그럼에도 형상이라는 미적 이념을 유기하지 않고 오늘에 이르렀으며, 무심히 자연과 인공의 경계를 드러내던 그때처럼 ‘자연’을 놓지도 않았다. 

‘자연’의 모습과 이를 포착해서 화면으로 옮기는 과정은 자연을 아주 부자연스럽게 만드는 아이러니를 갖게 한다. 묘사를 하면 할수록 멀어지고 다가가면 다가갈수록 아득해지는 자연의 실체이다. 자연의 한 단면의 묘사가 아닌 자연의 느낌을 포괄적인 이미지로 형상화시키려는 내 노력은 결국 아주 부자연스러운 요식행위를 강조한다. (작가노트)


nature-image / 37.9x45.5cm(8호 F) / 아크릴, 캔버스 2012

실제의 자연을 화면에 옮기는 일, 그것은 그림으로 자연을 가져오는 행위이다. 헌데 아무리 똑같이 그려도 그 대상 자체가 될 수 없음을 아는 동양화처럼 주태석의 화면은 이것은 나무, 이것은 잎새 이것은 그림자라고 말한다. 나무가 서 있는 화면은 모든 것이 혼합되어 하나의 장면을 이루는 풍경으로 인지되지 않는 것이다. 숲조차 나무와 나무가 연이어 형성하며 잎은 잎의 정형성을 유지한 채 중첩된다. 산이고 물은 물일뿐인, 자연의 속성과 사물의 원리에 대한 작가의 성찰을 드러내는 것이다.

화면에 가까이 다가가면 이미지들은 사라진다. 튀어나와 보이던 중첩된 잎들은 블랙홀처럼 빠져드는 공간을 형성하며 가까이 다가갈수록 불명료함의 세계임을 인식할 뿐이다. 초록, 갈색 등으로 빛나는 화면은 형상의 근접을 허락지 않는다. 그곳에는 표면의 붓질만이 넘실댄다. 게다가 표면에는 미세한 수많은 방울들이 흩어져 있다. 다분히 고의적인 스프레이작업의 흔적은 붓질과 함께 화면을 질료화 한다. 그리하여 화면은 말한다. ‘이것은 그림이다.’ 화면에 파이프를 그려놓고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라고 써놓았던 르네 마그리트처럼 그의 화면은 허허로운 작가의 심상을 반영하는 듯 심리적이다.(*)

글/사진 관리자
업데이트 2024.11.26 0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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