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명:위대한 유산
전시장소:성북구립미술관
전시일정:2013.10.3-2013.12.8
광복후 나라를 세우기 위한 사상적 노선들이 격렬히 부딪히는 공간에서 백범 김구(金九, 1876-1949)는 ‘문화론’을 주창했다. 그가 말하는 문화는 평화의 다른 이름임을 우리는 알며,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인 문화라는 것이 민족적 자긍심임을 또한 안다.
"나는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가 되기를 원한다. 가장 부강한 나라가 되기를 원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남의 침략에 가슴이 아팠으니 내 나라가 남을 침략하는 것을 원치 아니한다. 우리의 부력(富力)은 우리의 생활을 풍족히 할 만하고 우리의 강력(强力)은 남의 침략을 막을 만하면 족하다.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다. 문화의 힘은 우리 자신을 행복하게 하고 나아가서 남에게 행복을 주겠기 때문이다."
(단기 4280년 11월 15일 개천절 날, 서기 1947년 음력 10월 3일 / 김구)
개천절에 김구가 부르짖은 ‘문화’가 바로 성북구립미술관의 <위대한 유산>에 소개된 근현대 미술 애호가 및 수장가로 알려진 오세창(吳世昌, 1864-1953), 김용진(金容鎭, 1878-1968), 김찬영(金讚永, 1893-1960), 오봉빈(吳鳳彬, 1893-1945), 이병직(李秉直, 1896-1973), 이한복(李漢福, 1897-1940), 손재형(孫在馨, 1903-1981), 함석태(咸錫泰, 1889- ?), 박창훈(朴昌薰, 1897-1951), 박병래(朴秉來, 1903-1974), 김양선(金良善, 1908-1970), 전형필(全鎣弼, 1906-1962) 등 14인을 이해하는 코드이다. 식민사관에 맞서 한민족의 우수성을 증명할 수 있는 근거는 문화였으며, 문화의 모습은 시각적 매체인 미술이었고 유구한 역사를 증명하는 것은 고미술품이었던 때문이다.
감평(監評)과 애호(愛好)의 미술
여러 수장가의 사진과 인물 소개, 작품들과 서적이 뒤섞여 전시된 공간에서 유독 한 장의 사진이 마음을 끈다. 이상범, 박종화, 고희동, 안종원, 오세창, 박종목, 노수현, 이순황 등이 전형필의 보화각 상량식을 마치고 자개장이 번쩍이는 북단장 거실에서의 사진은 근대기 이들의 교유를 짐작할 수 있게 하는 자료로 널리 소개되었던 터라 귀중하지만 그리 새로울 일은 아니다.
김양선 교수를 비롯한 동호인들의 미술품 감상
헌데 다다미 방에 양복입은 남성들이 좌우로 도열하여 앉았고 그 중앙에 족자를 펴드는 모습은 발길을 멈추게 한다. 오동나무 상자로 보이는 곽에서 흰 종이에 싸여졌던 족자가 꺼내어져 위아래 맞잡은 채 들려져 있다. 전면에 앉아 환한 미소를 짓고 있는 중년의 신사는 목사이자 고고학자였던 김양선이다. 북한에서 방대한 유물을 수집하였던 그는 광복이 되고 3.8선이 굳어지자 남북을 오가며 유물을 날랐고 그 와중에 아내와 둘째딸이 피살되는 불행을 겪으면서도 유물을 지켰다. 오늘의 숭실대학교 기독교박물관은 바로 그의 소장품으로 이루어졌다.
흑백 사진에서는 상자에 고이 접어두었다가 알아볼 수 있는 이들을 만나면 기꺼이 광선 아래 작품을 드러내 그 아름다움을 함께 나누던 감평의 문화를 눈앞에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김홍도의 <그림감상>처럼 여러 사람이 펼쳐진 족자에 눈을 두고 기꺼워하는 모습은 시공을 초월한 미를 누리는 모습으로 비쳐진다. 근대기, 여전히 살아있던 작품을 아끼는 마음과 함께 나누는 마음이 공존하는 시대상을 보여주는 사진인 것이다.
김찬영이 소장했던 작품 중 하나인 현재 심사정의 <지두절노도해도(指頭折蘆渡海圖)>
전시장 3층의 입구에 펼쳐진 <한동아집(漢洞雅集)> 시회 도권은 조선후기 여항문인들의 시사를 방하여 가졌던 근대기 시회의 양상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서화가인 오세창, 김돈희, 이도영, 고희동과 시인 이기, 근대기 승려이자 한학자인 박한영 그리고 최남선이 각자의 집을 돌아가면서 시회를 가졌던 모임명이 ‘한동아회’이다.
이들은 모일 때마다 시회첩, 시회도권 등을 남겼다. 이번 전시에는 여러 사람이 차례로 함께 참여하여 지은 시가 길게 펼쳐져 시원스레 자태를 드러낸다. 만나서 시를 읊고 함께 그림을 그려 합작화를 만들고, 아끼는 그림이나 글씨를 꺼내어 방담하던 당대의 문화를 눈앞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오봉빈이 작성한 고인서화가(古人書畵家) 연령표 일부
하지만 1940년 일본의 황기를 기념하는 ‘기원2천6백년 봉축 명가비장 고서화전람회(紀元二千六百年 奉祝 名家秘藏 古書畵展覽會) 안내장’을 통해 전람회 문화가 일상화된 근대를 또한 만난다. 식민지 조선에서 전람회는 사적 교유의 장이었던 미술작품을 공공의 장소에서 교육의 대상으로 위치짓게 하였다. 감상하고 평가하는 대상에서부터 평가보다 감상이 더 활발할 수밖에 없는 문화는 미술의 대중화를 이루었지만 동시에 미술과 대중의 괴리를 분명히 경계지었다.
같은 해 5월에 수장가이자 화상이었던 오봉빈이 자신이 연 조선미술관 ‘개관 십주년기념 십대가 산수풍경화전’을 열었다. 이 전시의 참고품 전람회에는 전형필, 장택상, 김덕영(金悳永: 김찬영의 개명 후 이름), 함석태, 한상억, 이병직, 손재형, 김명학, 박상건(朴商健), 오봉빈의 수장품이 출품되었다. 수장가의 안목에 의거한 작품을 소개함으로써 수장가들 사이의 교유와 자신의 입지를 드러내는 일, 그리고 미술작품의 ‘선택’이라는 교육적인 목표를 모두 이룬 것이다.
박병래 컬렉션의 수장 내력을 소개한 『백자에의 향수』일부
작품을 창작하는 이들의 높은 안목이 또한 근대기 수장가의 반열에 이르게 하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민족사회의 구심점’이자 명필로 이름 높았던 오세창, 동경미술학교를 졸업한 양화가 김찬영, 서화가 이병직, 채색화에 뛰어난 이한복, 서예가로 이름이 높았을 뿐만 아니라 김정희의 세한도를 일본에서 들여오기 위하여 물심양면 희사하였던 손재형 등이 그들이다. 또한 수장가 전형필은 이번 전시에 옛 선비들이 즐겨했던 묵희와 비교해도 손색없을 도석인물을 보여준다. 안목이란 것이 결국 삶과 함께하는 것임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갖는 것이 아닌 지키는 것
2층 전시장 입구의 벽면 전체에는 ‘근대수장가 관련 신문기사’가 빼곡이 들어앉아 있다. 각종 전시와 수집가들을 소개함으로써 관람자의 이해를 돕는 텍스트들이다. 그러고 보면 오세창의 <근역서화징발간 안내서>, 「근역서화휘」와 「근묵 수록」의 목록이 기록된 책자 등 대다수가 텍스트로서 보여진다.
박창훈 소장인이 찍혀 있는 전 겸재 정선 <누각산수도>
『조선고적도보』까지 전시한 것은 좀 지나친 감은 있으나 당대 미감을 파악하기 위한 자료로 선택한 모양이려니 하고 지나도 좋을 것이다. 여러 책자들 속에서 『고서적목록』에서는 「제왕운기」 위에 만년필로 “110,000” 등 거래된 액수가 적혀있기도 하고, 서로 작품을 바꾸거나 거래했을법한 「고미술품 취미교환회 목록」 그리고 여러 경매도록 등 당대 수장가들과 유통과정, 작품의 거래가 등을 알 수 있는 귀한 자료들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도자기 수장가로 알려진 박병래의 『도자여적(陶瓷餘滴)』(중앙일보사, 1974) 등 애호가의 수필집이면서 동시에 내용에서는 전문적인 서적과 책에 사진이 실린 청화백자를 나란히 전시하여 흥미를 돋운다. 오봉빈은 ‘조선고서화가들의 연령’을 어떻게 기재하였나 살표보니 가장 어린 이도영은 55세, 김정희는 153세 등으로 적혀 있다. 그리하여 이징은 521세의 화가로 존재한다. 오래된 그림은 낡은 것이 아니라 나이가 많은 것임을 일깨워주는 듯하여 언뜻 비치는 미소가 겸연쩍게 한다.
오세창 선생이 심사정 가계를 고증한 메모
거개가 19세기말에 태어나 20세기 중반을 살다가 수장가들은 1940년과 1941년에 경매회사를 통해 그동안 수집한 고미술품을 일괄 처리하여 이익을 남긴 의사 박창훈을 제외하고는 한결같이 애장한 특징이 있다.
치과의사였던 함석태는 일제에 의한 소개령이 내리자 1944년 고향인 평북 영변으로 갔다가 광복 이후 내려오지 못한 것으로 파악되고, 평양 갑부의 자제 김찬영이나 오세창, 장택상, 손재형의 소장품들은 실기하여 흩어지고 말았다. 전재산을 들여 유출되는 문화재급 유물을 사모아 절대로 다시 되팔지 않은 전형필의 안목은 오늘날 일년에 두 번, 성북동의 간송미술관 앞에서 줄을 서게 하는 이유이다. 그리고 평생 도자기를 사랑하였던 의사 박병래는 1929년부터 모았던 도자기 일체를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하였다.
“도자기 수집에 취미를 붙이고 나니 처음에는 차디차고 표정이 없는 사기그릇에서 차츰 체온을 느끼게 되었고, 나중에는 다정하고 친근한 마음으로 대하게 되었다. 또 고요한 정신으로 도자기를 한참 쳐다보면 그릇에 대해 존경하는 마음까지 생기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엄청난 부(富)를 일굴 수 있었음에도 소박한 삶을 산 박병래의 도자기에 대한 존경은 곧 옛사람에 대한 존경으로 읽혀진다. 그토록 애장하는 도자기를 아무 조건 없이 박물관에 기증하여 공공의 것이 되게 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청렴한 그가 자신을 닮은 존재를 지극히 사랑하였고 그것을 기증의 방식으로 모두에게 분배한 과정은 이른바 오늘날의 콜렉터가 돌아보고 또 돌아보아도 부족함이 없는 한 인간의 수집 일생을 보여준다고 할 것이다.
전형필 선생이 그린 포대화상
미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미를 통해 인생을 성찰한다. 근대기 수장가, 그들에게 미술품은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인 문화의 모습이었다. 그들에게 환금성은 애초에 염주에 두지 않았던 민족의 한 모습이었기에 고미술품은 숭고하고 아름다우며 영원히 지켜내야 할 대상이었을 것이다.
“아하! 물건의 이루어지고 무너짐이 때가 있으며 모이고 흩어짐이 운수가 있으니 대저 오늘의 이룸이 다시 내일의 무너짐이 되고, 그 모음과 흩어짐이 또한 어쩔 수 없게 될는지 어찌 알랴.”
조선시대 수장가 안평대군의 일갈은 미적 탐닉을 넘어서 자본의 발톱으로 움켜 쥔 오늘날의 미술품들 앞에 유효할 것이다. 가진 모든 것을 주어 얻은 뒤 그 어떤 것을 주어도 바꾸지 않는 대상에 대한 한결같음을 유지한 이들의 마음, 우리는 그것을 사랑이라 부른다.(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