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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명 : 《김구림, 잘 알지도 못하면서》
장 소 : 서울시립미술관
기 간 : 2013.7.16-2013.10.13

김구림의 회고전, 잘 알지도 못하면서가 지난 7월 16일부터 10월 13일까지 서울 시립미술관에서 열렸다. 김구림은 1960년대 포스트-앵포르멜 시대에 등장한 한국 실험미술의 선구자이다. 2011년 김달진 미술연구소의 설문조사를 따르면 김구림은 재조명이 필요한 한국 현대작가 중 두 번째 작가였다. 그러나 홍상수 감독의 영화제목에서 차용한 “잘 알지도 못하면서”라는 전시명은 여전히 소외되고 있는 김구림의 미술사적 의미에 대해서 재차 질문을 던지는 듯하다. 


김구림, 잘 알지도 못하면서, 서울시립미술관


관람자의 동선을 제약하는 별다른 장치 없이 다소 산만하게 펼쳐진 공간에는, 앵포르멜 시기와 1970년대의 회화와 드로잉, 네온 빛의 플라스틱 구조물과 개념적 설치물, 동영상, 아카이브 자료가 일정 간격으로 배치되어 있다. 혼잡하기도 하고 자유롭기도 한 이 전시는 관객들에게 전시 큐레이팅의 의도에 휘둘리지 않은 신선한 기분으로 이 “잘 알지도 못하는” 전위 미술가의 기행(奇行) 을 접할 기회를 제공하였다. 
이 전시회가 김구림의 1960~70년대 작품을 중심으로 기획되었지만, 그 중에서도 1960년대 후반기는 단연 전시의 핵심이다. 재 제작되어 처음 공개되는 일렉트로닉 작품 <공간구조>(1968), 실험영화 <1/24초의 의미>(1969), 메일아트 <메스미디어의 유물>(1969), 대지미술인 <현상에서 흔적으로>(1970)와 ‘제4집단’의 해프닝에 관한 아카이브 등, 한국 현대미술에서 최초라고 불리는 다채로운 실험들이 이 짧은 시기의 밀도를 높이고 있었다. 거대한 얼음 덩어리가 시간이 지나면서 녹아 무너져 내린 <현상에서 흔적으로>(1970)는 전시 홀의 중앙에 붉은 천만을 남기고 그 시간의 흔적을 증명하였는데, 이 흔적은 김구림의 작업이 제도권으로부터 거부되었던 1970년과 선구적 전위미술로서 환영받고 있는 현재와의 간격을 보여주는 장기 기획 퍼포먼스처럼 느껴졌다.
포스트 앵포르멜과 전(前) 단색화 시대 사이에 끼인 1960년대 후반의 실험적 경향은 이일이나 오광수와 같은 모더니즘 비평가들에 의해 침체기나 전환기의 시도로 평가되었고, 성완경과 같은 현실주의 비평가들을 따르면 사회적 의식의 부재로 실패할 수밖에 없었던 “공허한 몸짓”이었다. 1990년대 미술사학자 김미경의 연구와 2000년 국립현대미술관에서의 기획전을 통해서 1960년대 실험미술이 재조명되었으나 아직도 이 시기에 대한 미술사적 평가는 전환기에 머무르고 있다. 그래서 한국 현대미술사에서 김구림을 재조명해야 한다는 말은 1960년대 후반을 재해석해야 한다는 것과 다른 뜻이 아니다. 우선 해결되어 할 문제는 “매체와 형식의 확산”이라는 모더니즘 비평의 관점에서 누락되었던 김구림 미술의 사회적 함의이다.   

1960-70년대 뉴 웨이브, 청년문화
얼마 전 소설가 최인호의 부음에 문화계가 들썩였다. 한때 통속 소설가로 폄하되었던 최인호의 문학은 이견 없이 1970년대 도시적 모더니티와 인간 소외를 당대적 감수성으로 다룬 현실주의 문학으로 재평가되고 있었다. 1960년대 후반은 박정희 정부의 경제개발 성과가 가시화되던 때였다. 서울은 현대도시의 면모를 갖춰 나갔고 청년들의 청바지와 미니스커트는 기성세대에 시각적인 충격을 가했으며 포크, 록과 사이키델릭 사운드는 대중의 감각 망에 수신되었다. 아이러니하게도  1960년대 후반의 대중문화와 청년문화는 국가의 근대화 열매이자 동시에 일탈이었다. 


김구림, 문명, 여자, 돈, 1969, 8mm 필름


정치적 일사불란함을 강조하던 반공 국가에서 이러한 때 이른 ‘퇴폐적’ 현상은 60년대 초반 미국의 히피문화, 유럽의 68학생 혁명처럼 당국에게는 불안한 낌새로 여겨졌다. 개인의 감각을 일깨우고 전체에서 자율적 주체를 분리해내는 삶의 태도는, 권위적 체제에서 민주주의 사회를 이끌어내는 사회의 질적 전환이었기 때문이다. 문학에서, 음악에서 그렇듯이, 1960-70년대 청년문화는 정치가 아닌 문화로 기성의 권위에 대항했던 저항적 하위 문화운동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시각은 1960년대 실험미술에도 공통으로 적용되어야 하는 시대의 프레임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보자면 해프닝과 전위미술은 그 파격적 형식 자체만으로도 탈 국가주의라는 불온한 의제를 담고 있었다. 

도시화에 대한 불온한 상상력
이 전시에서 특히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작품은  <1/24초의 의미>이다. 김구림이 감독하고 정찬승과 정강자가 출연한 이 실험영화는 그간 포스터와 몇 개의 스틸이 소개되었고 현대인의 권태를 보여주는 작품이라는 주석이 있었으나, 그 내용의 전모를 알 수는 없었다. 당시 기술적인 문제로 작품은 축소 편집되어 <무제>라는 제목으로 상영되었기 때문이었다. 특히 이 영화는 스크린 대신에 흰 타이스를 입은 정강자와 김구림의 몸에 투사하였기 때문에 논자들은 편집된 이미지보다는 두 사람의 신체의 퍼포먼스에 주목하였다. 이 영상은 2000년 국립현대미술관 전시회를 기해서 디지털로 재생되었고, 이번 전시에서는 처음으로 원래의 필름 영사 방식으로 복원되었다. 김구림이 1969년 제작한 최초의 실험영화 <1/24초의 의미>는 이제야 해독 가능한 오픈 텍스트가 된 것이다. 


김구림, 1/24초의 의미 촬영장면


일정한 서사가 없이 이미지들만 몽타주 된 실험 영화이기는 하지만, 10분의 런닝 타임을 갖는 이 영화의 주인공은 단연 1969년의 서울이었다. 영상은 3·1 고가도로에서 출발하여 건설 중인 고층건물, 기하학적인 선으로 교차되는 교각, 고가도로를 달리는 속도감과 주인공의 일상이 콜라주되어 있다. 간간히 외진 골목과 대로를 걷는 사람들, 파편화된 도시의 일상의 장면도 끼어든다. 검은 양복을 깔끔하게 차려입은 도시인 정찬승의 시선으로 포착된 1969년 서울은, 1934년 박태원의 소설에서 주인공 구보가 현기증을 느꼈던 경성 모더니티의 현대판이었다. 김구림의 <1/24초의 의미>는 제목이 주는 암시처럼 영상 미디어의 본질을 다루고 있다기보다는, 1969년 당시 급박하게 변화하던 서울의 도시화에 논평이자 언젠가는 해체될 것에 대한 아카이브에 가까웠다. 
1969년 서울은 근대화를 체현하는 공간이었다. 삼일빌딩의 수직성과 청계고가도로의 유연한 곡선이 조합된 도시의 스펙터클은 발전의 아이콘으로 잡지, 신문, 영상에 자주 소개되었으며, 이 같은 미래 사회에 대해 증폭된 환상은 국민들을 근대화의 산업역군으로 호명하는 사회적 동력이었다. 그러나 탁. 탁. 탁. 탁. 1초 간격으로 소리를 내며 편집된 필름은 급변하는 도시의 비전에 대한 저자의 의구심을 투사하고 있었다. 김구림의 도시적 상상력은 건설 뒤의 폐허를 예견하는 불온한 것이었다.

    
김구림, 1/24초의 의미, 장면 스틸


김구림의 국가 시스템에 대한 저항적 태도는 제4집단의 활동에서 더 잘 드러났다. 정찬승, 방태수, 정강자와 같은 행동주의자들은 <콘돔과 카바마인>(1970년 5월 15일), <육교 위에서의 해프닝>(1970년 5월 16일)과 같은 상황주의적 해프닝을 통해 사회의 부조리를 드러냈다. 이러한 풍자의 미학을 “공허한 몸짓”이거나 “정치적 전위의식의 부재”라고 해석하는 것은 시대의 프레임을 놓친 오독에 가깝다. 제4집단 활동의 하이라이트는 6월 20일 을지로 소림다방에서 개최된 단체의 결성식, 그 자체였다. 김구림은 자신을 ‘통령’이라 자처하며 내각을 연상시키는 각종 위원회에 국민교육헌장을 패러디한 것이 분명한 선언문을 낭송하며, 무체(無體)사상이라는 아리송한 이념을 선포하였다. “법당에서 사이키와 고고춤”을 이라는 제목으로 주간지 『선데이 서울』지에 기사가 실린 전위 미술가들의 자못 심각한 결성식은, 유신시대를 준비하는 군사정부의 국가주의 기획에 대한 냉소적 리얼리즘에 가까웠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김구림의 불온한 냉소가 당시에는 정신 나간 미술가들의 가십 정도로만 치부되었던 것이 다행이었다.

가십에서 역사로
1960년대 후반 해프닝과 전위는 진지한 미술담론의 용어이기보다는 대중잡지의 엘로 페이퍼를 채우는 선정적인 가십거리였다. 그러나 미술이 아닌 가십으로 다루어진 김구림의 퍼포먼스는 권력에 한 방을 날리는 풍자와 냉소가 가득했다. 한때 현대화의 아이콘이던 삼일 고가도로의 육중한 콘크리트 구조물들은 해체되어 2005년 청계천 복원과 함께 역사 속에서 사라졌다. 그러나 문명은 덧없고 예술은 긴 것인지, 1960-70년대 산업화에 대한 유토피아의 환상은 무너졌지만 대중잡지의 가십난에 오르내리던 김구림의 전위미술은 2012년 테이트 미술관에서 열린 《A Bigger Splash》전에 초대됨으로써 컨템퍼러리 미술사의 한 장면으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20세기 이래 한국의 현대미술과 세계미술 사이에는 늘 시차가 존재했다. 21세기 컨템퍼러리 시점에서 돌아본 1960년대와 1970년대는 포스트 모더니즘과 모더니즘이 잠시 역전되었던 시기였다. 1970년대가 ‘지체된 모던(late modern)’ 이었다면 1960년대 후반은 탈 모더니즘의 지각변동이 시작되는 시점이었던 셈이다. 경상북도 상주 출신의 김구림은 정규 미술교육을 받지 않았고 섬유 공장에서 일하는 등 화단의 아카데미즘으로부터 멀찌감치 떨어져 있었다. 그러나 1960년대 후반 전후 현대화가들이 앵포르멜 퇴진 이후의 무력감에 빠져있을 때 김구림은 누구보다도 빨리 탈 모더니즘의 증후를 포착하였다.


김구림, 잘 알지도 못하면서, 서울시립미술관


이 전시에서는 아쉬웠던 부분은 김구림의 1950년대에 활동에 대한 설명의 부족이다. 김구림이 1960년대 이후 한국화단의 아카데미즘으로 벗어날 수 있었던 동기와 영감은 어디에서 온 것일까. 작가의 사유의 흔적과 참조에 대한 기록과 진술을 확보하는 것은 큐레이팅의 출발일 것이다. 


김미정(한국현대미술사, 미술사가)


* 이 글은 더아트로 영문사이트(http://eng.theartro.kr/)에 같은 내용이 실려 있음을 알립니다.
글 김미정(한국현대미술사) 관리자
업데이트 2024.11.13 1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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