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 9. 30.-12. 29.
원서동 고희동 가옥
창덕궁 담장을 끼고 들어가 원서동에서도 거의 끝자락에 위치한 붉은 벽돌담 집은 눈길이 절로 간다. 담 밖에서도 그 위용을 알 수 있는, 족히 백년은 되어 보이는 은행나무와 봄날이면 꽃잎 색만큼이나 짙은 향을 뿜어내는 자목련나무가 무성하기 때문이다. 개인집에 우뚝 선 나무 두 그루라니.
1958년 7월10일 녹음이 짙은 어느 날 『경향신문』에는 이런 글이 실렸다.
“가깝던 친구들은 이제 다 갔단 말야. 별루 없어. 70이 넘으니까 대개 가더군”
어느 날 고희동 씨를 원서동 막바지 궁궐 담 맞닿은 곳에 있는 댁으로 찾았을 적에 씨(氏)는 모시 고의적삼에 맨발로 널따란 방 한쪽에 앉아 힘없이 말했다. 사면 벽에는 근작인 듯 싶은 몇 점의 소품이 여기저기 걸려서 높다란 창으로 바람이 들어올 때마다 소리 없이 펄럭였다. 함께 어울릴 동배(同輩)들이 없는 요즘 씨의 생활은 집에 들어앉아 그림이나 그리며 그저 누웠다 앉았다 하는 것 뿐 정 심심하면 정종이나 한 병 사다놓고 조금씩 조금씩 혼자서 기울이며 먼 여름 하늘을 시력이 피로해지도록 내다보고.
“퍽 갑갑하시겠습니다.” 했더니
“뭐 집이 넓어서 갑갑할 거야 없어.”
구석구석 윤이 나도록 청소를 깨끗이 한 긴 마루가 이방 저방으로 훤히 트여 있는데 식구가 많지 않아 절간처럼 조용하다. 얼마 전까지 백합이 잘 폈었는데 이젠 거의 졌다고 서운한 듯이 하품을 깨물며 말했다.
“그럭저럭 한 세상이 갔어. 70이 넘으니까 이것저것 뜻대로 안되더군.”
발바닥을 손으로 쓸어 만지며 다시 먼 하늘을 내다보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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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서동 넓은 집에 기거중인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화가이자 서화협회의 주역이었던 고희동을 찾아가 나이듦과 세월에 대한 쓸쓸한 단상을 들었던 ‘애꾸눈’이라 자신을 밝힌 글쓴이는 기다란 복도가 인상적인 넓은 집에 대해 알려주고 있다. 내셔널트러스트가 복원하기 전 폐허에 가깝던 집은 당시로서는 드물게 반짝이는 마루가 잇대어진 유기적인 공간이었으며 높은 창이 있는 근사한 집이었음을 글로서나마 가늠할 수 있는 것이다.
종로구가 고희동가옥을 매입하여 내셔널트러스트에 운영을 맡긴 뒤, 이제 고희동 가옥은 북촌과 창덕궁을 잇는 원서동 일대를 문화의 길로 만드는 명소의 지표가 되었다. 2011년부터 시작된 ‘고희동과 친구들’ 전시는 첫 전시로 <춘곡 고희동의 집을 열다>, 두 번째 전시로 이들의 교유에 주목한 <고희동, 최남선, 오세창-세한삼우>로 이어졌다. 그리고 금번 세 번째 전시인 <서화협회>는 한 작가의 교유 폭을 최대한 넓혀봄 것과 동시에 그가 살았던 시대의 작품과 근대기 서화계를 가늠할 수 있을뿐만 아니라, ‘전설이 된’ 서화협회를 시각적으로 재구성하였다는 점에서 근래에 보기 드문 전시라 하겠다.
15회에 이르는 협회전을 하였으며 신인을 등용하고 공중을 대상으로 미술교육을 하였으며, 최초의 미술잡지를 간행하였던 우리나라 최초의 미술단체를 고희동 가옥에서 만나는 것은 매우 의미 깊다. 협회를 만들던 처음부터 해체하기까지 중심에서 일하였던 고희동의 집에서 그가 교유하였던 당대 화가들의 작품과 심혈을 기울였던 엄청난 규모로 이루어졌던 전시의 일면을 볼 수 있을 터이기 때문이다.
1918년 안중식과 조석진이 이끄는 서화미술회와 김규진이 이끄는 서화연구회가 모두 참여하여 조직한 미술인들의 모임에서 시작하였다. 그리고 사실 이들은 문인화가를 제외하고는 서울에서 미술가로 활동하는 인물 거의 모두이기도 했다. 서화협회의 구성원은 서화 제작․전람․교수․감식을 하는 정회원과 후원단으로 부총재, 고문, 명예회원, 특별회원이 있었는데 1923년 3월 이후 김윤식이나 이완용 등이 참여하는 후원인단 제도는 폐지되었다. 하지만 이들은 서예가 자격으로 협회전에 참여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따라서 ‘서화협회’를 전시 대상으로 한다는 것은 근대미술 전체를 전시주제로 설정하겠다는 것과 같은 것이다.
예를 들어 첫 협회전에서는 회원들의 작품뿐만 아니라 고서화를 합쳐서 글씨 70여 점, 그림 30여 점의 총 100점 정도가 전시되었다. 안평대군이나 겸재 정선의 그림 등 전통적인 그림에서부터 정회원의 작품들이 출품되었는데, 고희동과 나혜석의 작품뿐만 아니라 와다 에이사쿠(和田英作)의 작품 8, 9점 등 서양화도 전시되었다. 정말 몇 안 되는 양화가까지 아울러 ‘당대의 평면 미술’을 모두 담은 것이었다. 이러한 양상은 마지막 전시인 15회까지도 지속되었다.
정회원에 대한 자격이 엄격함에도 한창 때는 60명이 넘는 회원이 소속했던 서화협회를 보여준다는 것은 매우 방대한 전시와 연구를 필요로 한다. 뿐만 아니라, 휘문고등학교 강당 등에서 이루어졌을 정도로 대규모였던 전시를 재현하는 것은 공간이라는 걸림돌을 맞는다. 따라서 이 전시는 과거 협회전의 재구성이 아니라, 서화협회의 면모를 파악하는 최초의 전시라는 점에서 의의를 찾을 수 있다.
그동안 가옥의 일부만을 전시장으로 사용하였던 것과 달리 가옥 전체를 전시장으로 구성하여 곳곳에서 서화협회원의 작품을 만날 수 있다. 첫 전시실에서는 서화협회의 구성과 고희동에 대한 이해를 목적으로 하는 자료를 만날 수 있다. 두 번째 큰 방에서 우리나라 최초의 미술잡지인 <서화협회보>를 실견할 수 있으며, 오세창, 김돈희를 비롯한 서예가들의 작품을 통해 당대 최고의 명필들을 만날 수 있다. 처음 소개되는 외손녀에게 그려준 모란을 비롯한 작은 그림 두 점은 친족에 대한 고희동의 자애로움을 엿보게 한다. 안채는 이번 전시를 기회로 처음으로 전시장의 역할을 하고 있다. 찬방은 휴게 혹은 아카이브 공간으로 비워져서 더 많은 구상이 가능한 열린 공간임을 알려주는 듯하다.
춘곡 고희동 <옥녀봉도> 종이에 담채 23.8x33.2cm 개인
춘곡 고희동 <모란도> 종이에 담채 23.5x26.5cm 개인
외손녀 최일옥이 창덕여고에 입학한 기념으로 그려준 그림
서화협회의 전시에서는 처음에 글씨를 출품한 작가들이 많다가 차츰 그림이나 양화가 증가하는 경향을 볼 수 있다. 하지만 이번 전시에서 양화를 발견할 수 없다. 일단 나헤석, 이종우, 정현웅, 이승만, 김종태, 이제창 등 협회전에 참여하였던 양화가의 작품이 현재 양에서 매우 귀하기 때문이다. 서화협회 전반을 파악하기 어렵다는 아쉬움에도 불구하고, 전시는 1920년대 근대인들의 세계를 눈앞에 옮겨다 놓아 주고 있다.
전문화사의 농염한 색채를 희롱하는 경지를 보여주는 안중식과 조석진의 화조와 먹을 들어 농담을 다르게 하여 멀고 가까움, 흔들리고 고정된 세계를 표현해낸 지창한, 사군자에서도 호쾌함을 부리는 김규진, 전통의 산수와 근대의 수채를 결합한 듯 자유로운 안종원의 산수 등은 전통과 새로움이 공존하는 근대의 다양한 기량이 무엇인가를 보여준다. 심인섭의 명랑한 화조나 김용진의 화사한 모란, 변관식의 자유로우며 거친 필치뿐만 아니라 사군자와 화조와 실지 정원의 풍경을 함께 묘사한 최우석의 화면에서 시간의 교차와 소재의 근대적 병용을 확인하게 된다. 자주 접하지 못하는 김권수, 홍순인, 김유탁, 유진찬, 나수연의 작품을 한군데서 볼 수 있는 것도 즐겁다.
백송 지창한 <갈대와 밤게> 종이에 수묵 39.5x67cm AMI
소림 조석진 <매조도> 비단에 담채 39.1x139cm 학고재
심전 안중식 <화조도> 비단에 담채 31.8x108.3cm 고려대학교 박물관
석정 안종원 <관폭도> 종이에 담채 68.6x44.7cm AMI
석계 김권수 <산수도> 종이에 담채 31.5x111.5cm AMI
모두를 담지 못하였기에 전부를 보여주지는 못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럼에도 근대서화의 세계를 서화협회의 이름으로 펼치는 이 전시는, 문인화가와 전문화가가 동시대 화단을 구성하였고 전통고 새로움이 함께 숭상되었고, 변화하는 정세와 사회 속에서 개인의 감성에 침착하게 되는 근대의 특성을 유감없이 보여준다. 사적인 작품들이 모여 하나의 전시를 이룸을 노골적으로 드러냄으로써, 서화협회가 하나의 이념적 결집체라기보다는 동시대 함께하는 미술인들의 우호성을 중시한 단체임을 노정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