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명 : 성철스님 열반20주기기념 근원 김양동전
기 간 : 2013.8.30.-9.15
장 소 : 예술의전당 서예박물관
그림은 말보다 더 소리가 크다. 더 많은 말을 한다. 그야말로 말은 말 뿐이다. 하지만 그림이라는 언어는 미동도 하지 않는 마음의 움직임에서부터 전율을 느낀다든지 해머로 한데 얻어맞은 것과 같은 충격을 안겨준다. <지상의 옷 한 벌>이 그렇다.
지상(地上)의 옷 한 벌, 한지, 먹, 토채, 210x150
또 그림이라는 말은 한마디가 보는 사람에 따라 오만가지 뜻을 다 던져준다. <성철 큰스님 - 미당 서정주 추모시>는 빼딱하게 돌린 부처님 고개가 이리 말을 해도 저리 말을 해도 도무지 알아듣지 못하겠다는 투다. 영 세상 돌아가는 꼬라지가 맘에 들지 아니한 듯 “이기 뭐꼬!”하고 뛰쳐나올 판으로도 읽힌다. 염화시중의 미소는 고사하고 성철스님의 마음을 그림으로는 종잡을 수가 없다. 오히려 미당의 시가 싱겁다. 조형언어라는 것이 문자언어 말 언어 몸 언어 따위와 다른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성철 큰스님-미당 서정주 추모시, 조선고지, 먹, 토채, 42x61
결국 예술가로서 한 작가가 죽었는가 살았는가 하는 판단 기준은 작가 자신만의 조형언어의 존재 여부에 달렸다. 그래서 화가나 서가 모두 가는데 마다 자기조형! 자기조형! 하며 노래를 부르며 붓을 쥐자마자 금광채굴을 하듯 ‘자기조형’이랍시고 짜내고 있는지 모르겠다.
근원은 이런 관점에서 보면 참 특이한 존재다. 그의 그림언어에는 동서고금이 다 녹아있다. 칼과 붓이 하나로 만나고 먹과 색이 그림과 글자로 공존한다. 선사시대 암각그림 토기의 ‘빛살’무늬 한나라 화상석과 같은 무고(撫古)취미에서부터 현대미술의 미니멀 취향까지 압인(壓印)되어 혼재하고 있다. 뒤섞여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로 녹아나온다. 그야말로 조형언어의 용광로다.
달빛경전, 조선고지, 먹, 토채, 43x60
그런데 문제도 바로 여기에 있다. 작가 입장과는 다르게 보는 사람들마다 이게 서예인지 미술인지 도무지 분간을 하지 못하겠다는 것이다. 일단 ‘예술은 낯설게 하기’라는 잣대로 보면 성공한 근원만의 조형언어다. 하지만 관객도 문제인 것은 왜 ‘서(書)’ ‘화(畵)’라는 기존의 고정된 프레임으로만 보려고 하는가 하는 점이다.
물론 이럴 수밖에 없는 이유는 100년이라는 뿌리도 깊고 아주 체계적인 서구미술교육 덕분이다. 전통서화가 현대미술로 전이되는 과정은 서예의 낙오와 도태의 길이기도 했다. 그 결과 우리는 지금 ‘서예문맹’이라는 볼썽사나운 역설에 빠진 것이다. 서예라는 도그마에 빠진 서가들도 입장은 마찬가지다. 서화는 태생도 크기도 다 같았는데 유독 지금에 와서 남남이 된 것이다.
선(禪), 조선고지, 먹, 토채, 42x63
이 양극단을 움켜잡은 근원의 조형언어는 그래서 회색지대라 할 수 있다. 동양과 서구 태고와 현대가 하나 되는 그 지점은 담백하고도 맑지만 그 깊고도 넓은 맛을 음미하기가 어려운 것은 오히려 당연하다.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 얼마나 쉬운가. 하지만 또 얼마나 어려운가. 우선 삼 천배를 하지 않고는 그림과 말을 붙일 엄두도 내지 못할 일이다. 이제 관객들이 우리것에 대한 최소한의 준비를 해야 할 때다. 그림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알아듣고 못 알아듣고는 그 다음 문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