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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OI WOOK KYUNG 개인전

글 김미정(미술평론가)


불꽃같은 외침으로 한국미술계에 강렬한 흔적을 남기고 떠난 최욱경(1940~1985). 갤러리 가나는 9월 25일까지 최욱경의 대규모 개인전을 열고 있다. 흑백텔레비전 화면 같던 모노톤 시대, 원색의 붓질에 생의 욕망과 환희를 담아 섬광같이 캔버스에 폭발시킨 최욱경의 회화는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더 특별하게 다가온다. 1985년 마흔다섯의 짧은 생을 마감한 지 30년을 목전에 둔 이 전시회는, 이전에는 쉽게 볼 수 없었던 초기의 드로잉과 미국 수학기의 콜라주, 흑백의 구상화 등 100여 점 미공개 작품을 선보이고 있다. 최욱경의 독백과 육성 그리고 거칠고도 섬세한 내면의 파장을 만날 수 있는 오랜만의 기회이다.
 


최욱경, 자화상, 1969, 종이에 콘테, 63.5x48.5


최욱경, 선글래스 너머, 1967, 카드보드에 아크릴, 55x39


첫 번째 방을 채우고 있는 드로잉과 자화상은 예민하고도 감수성 풍부한 작가의 자의식을 드러내는 전시의 도입부이다. 서울예고를 졸업하고 서울대에서 수학한 엘리트 화가였던 최욱경은 어려서는 박래현, 김기창에게 그림을 배우고, 학창시절 김흥수, 문학진, 정창섭, 김창열 등 화단 중진들의 수업을 직접 들었다. 선택받은 환경부터 많은 전후 세대 미술가들과 다른 출발점에 있었던 최욱경은 서울대학교 졸업 후 미국 유학을 택함으로써 프랑스, 일본, 유럽의 영향력이 컸던 한국 미술계와는 확연하게 다른 길을 걷게 되었다.


최욱경, 영광 Glory, 1960년대 추정, 아크릴, 잉크, 종이 콜라주, 46x61


1963년 미시간 크랜브룩 아카데미(Cranbrook Academy of Art)에서 배우고 1965년 뉴욕, 브루클린 미술학교(Brooklyn Museum School of Art)으로 옮긴 최욱경은 1960년대 당시 드문 미국 유학생이었다. 미국 유학시절인 1960년대 최욱경의 회화는 미국 추상표현주의의 영향이 분명하다. 아쉴 고르키(Arshile Gorky)의 유기체를 연상시키는 선, 여성 신체를 둘러싼 과감한 붓질은 드쿠닝(Willem De Kooning)의 요소가 그대로 드러난다. 대범한 색면과 서체성을 보여주는 로버트 마더웰(Robert Motherwell), 프란츠 클라인(Franz Kline) 등, 1950년대 미국 추상표현주의의 영향을 골고루 받았던 것을 알 수 있다. 절규하듯이 충돌하는 색채와 온몸에서 나오는 긴박한 속도감. 최욱경은 특별한 계획 없이 캔버스에 돌진하여 자연발생적으로 유발되는 형태들을 만들어나갔다. 최욱경은 자신의 20, 30대를 대형의 화폭 속에 자신을 불태워 뛰어들었던 시기로 회고하였다. 1960~70년대, 최욱경처럼 필력과 신체의 힘이 느껴지는 추상표현주의를 거침없이 구사한 한국현대작가를 찾기는 매우 어렵다. 에너지와 흥분이 느껴지는 캔버스. 내면의 경험을 순화하지 않은 채 그대로 시각적으로 표출한 화면으로 인해서 최욱경은 지나치게 미국적이라거나 남성적이라는 수식을 달아야 했다. 한국적 정체성과 민족의식을 갖추는 것이 예술가의 당연한 의무로 받아들여지던 시대에 이러한 비평가들의 꼬리표는 달가운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였을까. 1871년 귀국하여 몇 번의 전시회를 열었으나 보수적이고 가부장적인 한국사회에 적응하지 못하고 이방인처럼 겉돌던 최욱경은 1974년 캐나다에서의 전시를 이유로 다시 미국으로 돌아가게 된다. 그리고 애틀란타와 위스콘신 등에서 오년을 더 머물렀다. 
      


최욱경,  1960년대 추정, 아크릴, 잉크, 종이 콜라주, 44.5x61cm


한편 이번 전시에는 유학시절의 드로잉, 콜라주, 흑백 구성화도 다수 나왔다. 검은색과 흰색의 종이의 콜라주 구성과 스트라이프, 먹의 농담과 형태들을 연결하는 속도감 있는 터치는 액션 페인팅 이전에 모더니스트적인 균형감을 보여주고 있다. 화면을 밀도 있게 채우는 최욱경의 추상회화가 미국 유학시절의 이와 같은 수많은 흑백 드로잉과 구성, 탄탄한 인체 습작을 통해 축적된 기량이었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주는 작품들이다. 최욱경의 회화에서는 추상표현주의의 영향이 두드러지지만 신문이나 잡지를 콜라주하고 인체와 문자를 사용하는 작품에서는 1960년대 라우젠버그(Robert Rauschenberg)의 콤바인 페인팅이나 팝 아트와 같은 당대 미국 미술에 대한 관심도 드러나 있다. 최욱경은 때로 구상화를 통해 정치적이거나 비판적인 메시지를 과감하게 드러내기도 했다. <누가 피비린내 나는 전쟁의 승자인가? Who is the Winner in This Bloody Battle>(1968)과 <인종차별을 멈춰라. Stop Segregation>(1968) 같은 작품은 최욱경이 1960년대 말 미국의 학생운동과 반전 분위기에 심정적으로 동참했음을 보여주는 작품들이다. 거리의 그라피티나 프로파간다 포스터처럼 대담한 흑백의 대조로 그려진 구상화들은 평화, 사랑의 메시지를 강렬하게 담고 있었다. 내면의 고독을 넘어 사회와 정치에 눈을 돌렸던 새로운 최욱경의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최욱경, In Peace, 1968, 종이에 잉크, 81x135.5cm

      

무제, 1977, 캔버스에 아크릴, 198 x 230 cm

      

무제, 1985, 캔버스에 아크릴, 72.2 x 60.5 cm


마지막 전시장은 넘실대는 색채의 향연으로 공간을 꽉 채우고 있다. 단연 전시의 압권이다. 이 공간에는 1977년 뉴멕시코에서의 작품을 포함하여 1978년 귀국한 뒤 1985년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날 때까지의 작품들이 모아져 있다. 이 시기는 미국적 색채가 짙던 추상 표현주의가 점차 투명한 시정의 세계로 변모하는 전환기였다. 1960년대 최욱경의 추상화는 화면과 대결하려는 화가의 패기가 과장되어 때로는 신경질적으로 느껴지기도 했다. 그러나 1979년 영남대에 재직하던 시절 이후의 작품은 투명하고 서정적인 것이 다수이다. 이러한 최욱경 회화의 변화에 조지아 오키프(Georgia O’keefe, 1887~1986)의 영향이 언급되곤 한다. 최욱경은 1977년 로스웰 미술관(Laswell Museum)의 전격적인 지원을 받아 뉴멕시코에서 작업에 몰두할 수 있었다. 화가는 의식적으로 조지아 오키프의 흔적을 따라 산타페를 순례하였고, 그 결과는 1979년 신세계에서 열린 개인전으로 나타났다. 확실히 이 시기의 작품은 1960년대의 짙은 농도의 추상화와 달리 공간은 풀어지고 선과 붓질도 유연해졌다. 꽃과 식물의 형상을 연상시키는 부드러운 형태들이 화면에 들어오고 색채도 크림색과 핑크 등 파스텔 색조로 한결 부드럽다. 자신의 여성성에 대한 새로운 인식, 눈뜸이 가져온 결과였다. 

최욱경의 그림은 영남대학교에 재직시절, 경남 산천과 거제도 학동 앞바다의 풍경에 감흥 하면서 더욱 서정적으로 변화했다. 멀어지는 다도해의 능선은 리듬을 타는 선으로, 넘실대는 파도는 파상의 붓질로 화면에 등장한다. 선명한 하늘색 사이의 거침없는 빨강, 순한 파스텔 색조에 순도 높은 보라와 오렌지색의 만남이 생기발랄하다. 내면의 충돌에서 벗어난 자연과의 조화. 아득한 대기와 빛이 느껴지는 추상적 풍경화들이다. 그녀의 1980년대 작품에서는 자연을 관조하는 한결 여유로운 화가를 만나게 된다. 
 


최욱경, 1980년대 추정, 캔버스에 아크릴, 128 x 128 cm 


화가는 채 무르익기도 전에 세상을 떠났다. 1940년생인 최욱경은 1931년 태어난 박서보와 1932년생 정상화와 같은 대표적인 단색화 화가들보다 십 년 정도 아래 세대의 미술가이다. 그러나 예술적 단절은 그 물리적 수보다 훨씬 깊고 넓다. 모노크롬 추상이 대세였던 시대, 식민지 후유증으로 색채는 터부시 되었고 정서적인 금욕주의가 팽배했다. 강한 민족주의 이념이 한 시대의 미학에 선명한 나이테를 두르던 시절이었다. 돌연 나타난 최욱경의 추상화는 점잖지 못하게 튀었고 술과 담배를 즐기는 여성화가의 고독이란 건전사회를 해치는 응석으로 치부되었을지 모른다. 최욱경은 국가주의의 집단 강박에서 벗어나길 원했고, 그 갈망은 최욱경 회화를 분출시킨 고독의 원천이 되었다. 감각의 억압을 뚫고 나오는 대담한 색채의 환희와 영광. 최욱경은 갔지만, 그녀의 작품이 독보적으로 느껴지는 이유이다. 그 절규와 순수의 시대는 짧았기 때문에 더 강렬한 여운으로 남는 것일까? 





글/ 김미정(미술평론가) 관리자
업데이트 2024.10.23 14: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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