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8.14.-2013.9.15.
서울 인사동 공아트스페이스
지금은 그렇다고 하기 힘들지만 흔히 말하는 인사동은 한 때 한국미술의 메카였다. 국립의 중앙박물관이 있어도 사람들이 이곳에 모였다. 너나할 것 없이 시간을 만들어서 찾았고 할 일이 없어도 한 바퀴 둘러보는 곳이 한국 미술의 중심이었던 인사동이었다.
이경윤 <조옹도(釣翁圖)>(《산수인물화첩》 10폭화첩 중) 견본수묵 31.1x24.8cm 고려대 박물관
그런데 언젠가부터 그 주역들이 떠나고 구경꾼만 남게 됐다. 떡 장수, 옷 장수들이 골목골목을 차지하면서 한국문화는 개량 한복에 떡 문화인 것처럼 여겨지게 된 것이다. 호객 소리가 요란한 가운데 펼쳐놓은 모조미술품 노점상들도 국적불명 문화의 이미지에 한 몫을 더했다.
이경윤 <탄금관월도(彈琴觀月圖)>(《산수인물화첩》 10폭화첩 중) 견본수묵 31.1x24.8cm 고려대 박물관
그런 인사동에 모처럼 인사동다운 전시가 열린 것이 《한양유흔(漢陽遺痕)》이다. 한양을 소재로 옛 그림을 그린 작가, 작품을 중심으로 소개한다는 점에서 옛 인사동의 향수를 느낄 만한 내용이라 할 수 있다.
정선 《백납병풍》 168x294cm 고려대 박물관
그런데 이 전시는 단순히 인사동 컴백 이상이다. 그동안 한국의 전시 포맷에서는 볼 수 없었던 새로운 기획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인사동의 옛그림 전시는 화랑 기획의 개인 컬렉션 소개가 대부분이었다. 컬렉터 개인의 비장품을 보는 것 자체도 옛 그림을 사랑하는 일반 애호가에게는 감지덕지할 만한 안복이다. 그런데 장롱 깊숙이 든 것이 개인 컬렉터의 소장품 뿐만은 아니라는 발상을 전개해 보인 것이 이 전시의 기획이라고 할 수 있다.
정선 <경복궁> (백납병풍 중) 견본담채 18.4x16.8cm 고려대 박물관
시대의 키워드인 하이브리드를 미술 전시에 시도해본 것이다. 탁월한 서화 컬렉션으로 이름난 고려대학교 박물관 소장품을 가져와 개인 컬렉터의 작품과 만나게 했다. 더욱이 일반과 만나기 위해 상아탑을 걸어 나와 사설 스페이스로 들어가게 했다. 이는 이제까지 한국에서 한번도 일어나지 않았던 전무후무한 일이다.
김홍도 <송하선인취생도> 지본담채 109x55cm 고려대 박물관
가히 상아탑의 대변신이라 할 만한데 이 결합으로 일반 애호가는 대학 미술관의 명품 컬렉션을 문턱 높은 대학이 아니라 시내의 일반적인 장소에서 즐길 수 있게 됐다. 또 대학은 소장 유물을 일반에 널리 소개할 기회를 가지면서 대학의 진가를 더욱 드높일 기회를 얻었다고 볼 수 있다.
윈-윈처럼 여겨지는 이야기지만 상아탑의 자존심을 생각하면 쉽게 허락될 일은 아니다. 고려대는 이미 지난 96년 자체 컬렉션만으로 미국 6개 대학 박물관을 순회 전시한 적이 있다. 또 올 가을에는 유럽에 순회전이 기획되어 있다. 이같은 대외 활동의 폭이 열린 사고의 바탕이 됐을 것이다.
정약용 <매화도> 1813년 견본담채 44.9x18.5cm 고려대 박물관
그러나 이는 고려대학교 만의 일이다. 실제 전국에 96개나 되는 대학박물관의 운영이 유명무실한 것은 이미 잘 알려져 있다.(2012년 문화관광부 박물관운영실태조사 자료) 하루 평균 방문객이 10명에도 못 미치는 곳이 수두룩하다. 이들 대학박물관의 소장품은 80여 만 점에 이른다고 한다. 그러니 수많은 문화재, 미술품들이 상아탑 내에서 아직도 영문 모를 잠에 빠져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정선 <청하동(靑霞洞)> (장동팔경 중) 지본담채 58x37cm 개인
어쨌든 고려대학교 박물관의 결단으로 이 전시는 박물관 비장품을 한꺼번에 즐길 수 있는 기회를 주고 있다. 대표적인 명품을 거론해 보자. 조선 중기를 대표하는 화가 이경윤의 <산수인물화첩(山水人物畵帖)>, 그의 아들 이징이 그린 <방학도(放鶴圖)>, 겸재 정선의 만년 필치를 보여주는 <사직노송도(社稷老松圖)>, 단원 김홍도의 걸작 중 하나인 <송하선인취생도(松下仙人吹笙圖)> 그리고 다산 정약용이 부인 치마폭에 그린 <매화도> 등등 이루 열거할 수 없을 정도이다.
정선 <수성동(水聲洞)> (장동팔경 중) 지본담채 58x37cm 개인
하이라이트를 꼽으라면 겸재 정선의 그림 23점을 가지고 꾸민 8폭 병풍인 이른바 백납병이다. 여기에는 점 몇 개와 선 몇 가닥으로 남산을 비온 뒤의 남산을 그린 <목멱산>과 진경산수화인 <총석정> 그리고 도연명 시를 그림으로 그린 듯한 <심화춘감도(尋花春酣圖)> 등이 들어있다.
최북 <도담삼봉> 지본담채 24.5x70.5cm 개인
그리고 한양을 테마로 한 전시답게 그동안 단 한 폭만 사진으로 소개되어 왔던 개인소장의 <장동팔경(壯洞八景)> 전체 8폭이 함께 소개된 것도 빼놓을 수 없는 감상 대상이다. 그 외 조선후기의 서예가 이광사가 최북과 함께 도담 삼봉을 구경하고 그리게 한 <도담삼봉> 역시 그동안 흑백 사진만으로 알려져 온 그림이다.
송수면 <강촌추색도(江村秋色圖)> 지본담채 27.5x34.5m 개인
시작이 반이라고 이 전시를 계기로 깊은 창고 속에 있는 여타 대학박물관 유물들에게도 보다 편한 장소에서 일반과 격의 없이 만날 기회가 생겨나길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