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명:야나기 무네요시
기 간: 5. 25-7. 21
장 소: 덕수궁미술관 제1,2전시실
식민지 조선에서 희끗희끗하게 배를 드러낸 생선처럼 기사가 깎인 신문의 지면은 그리 낯설지 않다. 1920년 4월 15일자 『동아일보』 2면의 일부도 깎인 채 발간되었고, 이튿날 같은 면에는 ‘당국의 忌諱에 觸하야’라며 검열에 따른 게재금지로 기사의 일부를 삭제하느라 배달이 지연되었노라고 사과문이 실렸다.
삭제된 기사는 대개 확인할 길이 없지만, “역사를 가르치지 않으며, 외국어를 피하고, 주로 일본어로 일본의 도덕이나 그들과는 아무 관계도 없는 일본의 황실주의를 중심으로 그들의 사상마저 바꾸려는 것이었다. 새로운 교육에 전혀 친근감을 갖지 못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조선인은 자신들에게 약탈자로 보이는 자를 가장 존경하라는 말을 듣는다. 그들에게는 이것이 이해하기 어려운, 기이하고 모순에 찬 소리로 들릴 것이다.”라는 문장이었음을 알만한 이는 안다. 1919년 3.1만세운동 소식을 접한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悦, 1889-1961) 가 요미우리신문에 게재한 글을 염상섭이 번역하여 실은 것이기 때문이다.
식민지 조선에 대한 야나기 무네요시의 적극적인 관심 표명은 오늘날 연구자의 입장에서 보면 그가 가진 특유의 휴머니즘에 기반한 것이다. 하지만 일제에 의해 파괴될 광화문에 경의를 표하고 조선의 도자를 극찬하는 그의 글들과 성악가인 부인 가네코와 함께 보여준 조선의 문화진흥을 위해 애쓴 행동들은 조선인으로 하여금 그를 애모하게 하기에 충분하였다. 조선의 도자는 미와 추를 논하기 이전의 미로서 사람이 아닌 자연이 주는 미라고 표현하고 있으니 식민지 조선에서 그에 대한 고마운 마음이 절절함은 당연하다. 하지만 풍토결정론에 입각한 반도적 미에 대한 단상과 전쟁 후에 발표한 몇몇 글들은 제국주의 시대 근대 일본인으로서 넘지 못한 한계를 노정하고 있음 또한 지적되어 왔다. 이번 덕수궁미술관의 전시를 결정하고 진행하는 과정이 쉽지만은 않았을 것이고 전시를 바라보는 눈 또한 다양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동안의 몇몇 전시가 그의 사상과 행동 혹은 조선 민예관을 드러내 보여주는 데 집중하여 왔다면, 이번 전시는 야나기 무네요시라는 인물이 지니고 있는 물건을 통해 인물을 평가하게 만든다. 특정 인물이 소장한 여러 ‘물건’들을 나열함으로써 전시자의 판단적 시각을 지우고 관객으로 하여금 야나기 무네요시에 대한 연구자가 되어 그를 판단하게 함으로써, 전시의 주체는 대상 인물에 대한 판단을 유보한다. 민감한 사안을 다루는 현명함 혹은 영악함에 미소를 지으며 3개로 구분한 전시장을 돌며, 1전시장에서 3전시장으로, 다시 2전시장으로 영역을 오가야 파악할 수 있는 전통과 근대, 동양과 서양, 조선과 일본, 본토와 오키나와의 영역을 넘나든 야나기 무네요시를 만난다.
야나기 무네요시, 『공예』(창간호), 1931
윌리엄 블레이크에 대한 관심와 버나드 리치와의 교유에 집중한 <1부 유럽근대문화에 대한 관심과 연구>에서는 이성의 시대에 인정받지 못하였으나 세기말에 이르러 재조명된 블레이크의 영성에 관심을 기울인 야나기 무네요시를 만난다. 종교에의 열정만큼이나 순박한 그레고리안 성가의 악보, 동서양의 어느 지점에도 속하지 않지만 그 어디에서나 이해되는 버나드 리치의 도자기 등은 해박한 근대인 야나기 무네요시를 본다.
버나드 리치, 자화상, 1914년, 22x17cm, 에칭
전시의 중심은 단연 제2부라 할 수 있는데 ‘조선과의 만남’이 주제명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동양의 조형미에 대한 의식’으로 부언 설명함으로써 야나기 무네요시의 조선에 대한 관심이 조선민족미술관의 설립 등으로 이어졌을지라도, 학자로서 혹은 안목있는 예술가로서 조선에 대한 관심이었으며 이는 당시 시대의 반영임을 넌지시 드러낸다.
백자철사 운죽문 항아리, 17세기, 24.7×22.5cm
<조선민족미술전람회>를 위해 야나기 무네요시가 선정한 출품작 스케치, 1921년 5월
<제3부 주변에 대한 관심 그리고 민예>에서는 너무나도 소박한 우키요에와 반복적인 무늬가 놓인 서민들의 유카타에 이르기까지 지금 보아도 하급품이라고 할 수밖에 없는 ‘물건들’에서 미를 발견한 야나기 무네요시의 시각을 만난다. 그는 고급예술에 한정되어 향유되어온 공예에 ‘민중적 공예’를 삽입함으로써 생산주체를 드러내었다. 종교적이고 소박한 것에의 가치 부여는 윌리엄 모리스의 공예부흥운동과 닮아 있다.
붉은 색과 청화로 화초와 울타리를 그린 청화접시, 에도시대 이마리 도자기, 18세기, 높이 31x6.2cm
봉건에서 근대로 진입한 짧막한 변화의 시기를 겪은 다음 세대이자 지식인이었던 야나기 무네요시가 본 자신의 시대는 기억되어야 할 많은 과거의 수공이 사라져가는 시기였으며, 소비의 주체가 되지 못한 민중이 만든 생활용품은 산업화에 밀려 더욱 그러한 것으로 보였을 것이다. 결국 조선의 민예 또한 그러한 판단 아래 보존되고 가치를 규정한 것임을 전시장을 돌아 나오는 이들은 자연스레 알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