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명: 상상의 나라, 민화여행전
기 간: 2013.5.10 - 2013.9.14
장 소: 호림박물관 신사분관
정갈한 대리석 계단, 짙은 회색의 안정된 공간에서 '민화'들이 찬란한 자태를 드러내고 있다. 불과 이십여년 전만 해도 민화로 논문을 발표한다면 교수님의 비난과 동료들의 코웃음을 감내할 수 있을 만큼은 민화를 사랑했어야만 했다.
<책거리> 8폭병풍 중 19세기 후반, 종이에 채색, 각 86.0x31.5cm
민화를 주제로 한 학술대회가 성황인 지금, 저잣거리 지전에서부터 안방까지 화려함으로 눈길을 사로잡던 전성기를 지나 세속적 욕망과 장식이라는 저급한 미술로 치부되던 민화의 입장에서는 만감이 교차할 것 같다. 병풍이나 문배지라는 기능을 벗어나 그림에 집중한 전시방식은 궁중그림이나 최고의 명작들이나 누려온 미장센에 못지않은 것이어서 '민화에 대한 경의'라 해도 족하였다.
이번 전시는 공간 연출뿐만 아니라 민화를 해석하는 태도에 있어서도 여타 전시와는 차별된다. 3개 층의 전시장은 각층마다 '화폭에 자연이 들어오다' '화폭에 책과 문자를 놓다' '화폭에 옛 이야기를 담다'는 3개의 주제로 구성되었는데, '화폭'이라는 2차원의 평면을 제시함으로써 그림의 뜻을 새기던 기존의 접근방식과 달리 작품인 따블로로 민화를 위치 짓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민화는 과거의 유산에서 벗어나 현재의 작품으로서 감상적 대상이 되고 있다.
<어해도> 8폭병풍 중 20세기 전반, 종이에 채색, 각 105.4x30.3cm
떠돌이 화가나 지역의 민간 장인이 그렸다는 민화는 필세의 단조로움이나 준법의 무시 그리고 시점의 불일치 등 소박한 시선에서 불구하고 버드나무는 낭창하고, 매화는 흐드러진다. 새들은 화려한 깃털을 자랑하고 나비는 심지어 땡땡이 무늬인 것도 있다.
저물어가던 조선의 끝자락에서 그리고 일제강점기의 암울한 시절에 정신적, 물질적으로 어려웠을 민초들이 누렸을 그림이라고는 믿기지 않는다. 헌데 사람 사는 일이라는 게 입장 따라 다른 법, 신분제가 흔들려 사회가 세상이 어지러웠던 것은 지배충의 일. 돈만 벌면 양반보다 낫게 살 수 있고 관직에도 오를 수 있고 여럿이 힘을 합하면 관가도 뒤집어엎을 수 있는 것은 예전에는 꿈꿔보지 못했던 세상이다.
아니면 반대로 너무나 고달픈 현실세상에서 괴로움을 잊게 하는 꿈같은 신세계가 필요하였을 것이다. 상황이야 어찌되었든 그 혼란의 시대를 살던 민중들이 원하는 모든 것들이 민화에는 있다. 갖고 싶고 되고 싶고 하고 싶은 모든 것이 눈앞에 펼쳐져서 가질 수 있게 한 것, 그것이 바로 민화인 것이다.
<화접도> 8폭병풍 중 19세기 후반-20세기 전반, 종이에 채색, 각 49.0x30.6cm
마음을 다스리는 도가적 덕목과 유교적 정치이념이 투사된 화제들은 민화에 이르러서는 개인의 구복 차원으로 환치되고 있다. 꽃나무 아래 새들은 모두 쌍으로 날고 사슴, 거북뿐만 아니라 심지어 어해도의 물고기들도 쌍을 이룬다.
<화조도> 8폭병풍 중, 1904년, 종이에 채색, 각 132.4x48.3cm
사군자로서 도도하고도 은은한 자태를 드러내던 난초는 수많은 나비들을 희롱하는 요염한 자태를 뽐내고, 온갖 책이 화려하게 놓인 책가에 놓인 수박은 칼을 푹 꽂아두어 금방이라도 달콤한 즙이 줄줄 흘러내릴 것 같다.
심지어 선비의 서가를 떠올리게 하는 수선에도 한 쌍의 나비가 찾아드니, 둘러앉아 이야기꾼의 <삼국지연의> 전투장면에서 손에 땀을 쥐고 긴장하던 옛사람들의 소박하지만 간곡했던 세속에의 욕망이 기실 오늘과 다르지 않음도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