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박영택(미술평론가)
전시명: 한중옥展-시각과 인식 장소: 그림손갤러리 기간: 2013.5.22-5.2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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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중옥, 종이에 크레파스, 2013
한중옥은 제주도의 용암석을 그리고 있다. 그는 오로지 돌의 피부에 근접해서 그 표면을 애무하듯이 그린다. 화면을 가득채운 돌의 피부는 화면의 평면성을 강조하면서 선과 구멍과 갈라진 상처들을 촉각적으로 보여준다. 더구나 그 피부는 매우 추상적인 형상을 지니면서 보는 이의 눈에 온갖 상상력과 영감을 자극한다. 추상과 구상이 공존하는 그림이고 사진과 그림의 경계가 지워지는 한편 평면회화와 조각적, 부조적 효과가 착시적으로 반복되고 있는 것이다.
인간은 자연이 만든 아름다움을 재현한다. 구상화가 그렇고 부분적으로 추상 역시 그러하다. 그의 그림은 분명 구상화, 재현회화지만 동시에 추상화이기도 하다. 그는 구체적인 돌/자연의 피부에서 ‘추상’을 만나고 있다. 그것을 재현하는 방법론 또한 기존의 사실적인 재현술과는 거리가 멀다. 종이의 바탕을 몇 겹의 크레파스 색 층으로 덮은 후에 그 피부를 벗겨내면서 내부를 드러내는 그림이다. 그러는 순간 돌의 피부가 드러나고 질감이 연상된다. 다분히 조각적인 공정으로 이루어진 회화이다. 그것은 또한 수평의 화면을 수직으로 파고 들어가 이미지를 ‘발굴’해내는 일이기도 하다. 단면의 종이에 만든 얇은 깊이를 덜어내며 안으로 들어가는 일, 그러니까 잠겨있던, 망각된 돌의 얼굴을 다시 환생시키는 일이기도 하다.
화산 폭발의 용암이 식어 바위산을 이루고 몇 십억 년 동안 흙이 쌓여서 변성암이 되고 수 억 년의 세월 동안 바위가 물에 씻겨 수성암이 되어 돌이 탄생했다고 한다. 산이 쪼개져 태어난 존재인 돌은 지천에 깔려있다. 옛사람들은 돌 속에 생명과 역사의 의미를 투영해왔다. 아울러 돌은 동양사상의 근간을 이루는 핵심적 존재이기도 하다. 군자의 덕목을 보여주는 동시에 불멸과 불변, 침묵과 고요, 깊음과 차가운 성찰 또한 상징한다.
이처럼 돌은 물과 함께 동양인들의 사유와 삶의 핵심을 차지해왔다. 이처럼 돌은 자연을 함축해서 보여주는 결정적 얼굴이다. 아득한 시간, 세월이 최후로 남긴 얼굴이기도 하다. 부동과 정적 속에 단호한 물성으로 굳은 그 돌은 또한 영원성을 보여준다. 그 돌 안에 놓인 아득한 시간을 헤아리면서 저 돌의 얼굴을 본받아 자신의 최후의 상 하나를 간직하고자 했던 이들이 바로 옛선비들이다. 그들의 수석취미나 괴석도란 결국 그런 의지의 표상이다.
한중옥은 제주도의 돌을 그린다. 그는 제주도 서귀포 사람이고 제주도 자연에 익숙한 이며 그 돌들과 함께 살아온 이다. 그의 돌그림은 특정 돌의 묘사에 대한 관심이 아니라 돌이 짓고 있는 표면의 질감과 물성, 그리고 자연이 만든 신비스러운 아름다움과 불가사의한 이미지에 대한 경외감에 기인하는 것 같다. 돌을 하나 그린다는 것은 그 돌의 아득한 역사, 까마득한 시간, 형언하기 어려운 자연의 변화무쌍한 내력을 표상화 하는 일이기도 하다.
그가 그리고 있는 것은 결국 시간인 셈이다. 저 돌이야말로 그림을 그리는 작가들에게는 무한한 영감과 상상력을 자극하는 물질이기도 하다. 생각해보면 이처럼 모든 돌들은 사람들에게 환상을 심어주고 환영을 자극했으며 또 다른 존재를 그 돌 안에서 찾아내도록 권유해준 매개들이다. 이미지를 가능하게 해준 결정적 존재라는 얘기다. 비로소 돌을 통해 사람들은 상상하고 이미지를 연상하는 '사유하는 인간', '예술 하는 이'가 되었을 것이다. 아득한 옛날부터 돌들은 현실계에 존재하는 또 다른 존재의 이름을 부여받아 왔으며 저마다 신화와 전설, 이야기를 하나씩 간직하게 되었다. 돌로 인해 이미지행위와 상상력, 꿈과 환상을 보는 눈들이, 마음들이 가능해졌던 것이다. 한중옥 역시 저 돌의 피부를 통해 무한한 영감과 상상력에 마냥 빠져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