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표암(豹菴)과 남종화파전(南宗畵派展)
기간: 2013.5.12-2013.5.26
장소: 간송미술관
이번 전시는 진경산수화, 풍속화와 더불어 조선 후기 화단에서 중요한 회화 경향이었던 남종문인화 중심으로 꾸며졌다. 남종문인화는 화가의 마음을 시각적 이미지로 나타낸 것으로 외형적 표현보다는 내면의 정서나 기운을 전달하는 것이 중요한 관건으로 문사철(文史哲)을 겸비한 문인(文人)들만의 전유물이었다.
이인상, <풍림정거도楓林停車圖>, 종이에 담채, 40.5×30.5cm, 간송미술관
이인상은 자신만의 개성적 문인화법을 구사하였기에 한국적 문인화의 전형을 완성한 문인화가였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서화수요층의 확대로 명대(明代) 후반부터 문인화가들의 작품을 모아 목판화로 인쇄된 『고씨화보(顧氏畵譜)』, 『당시화보(唐詩畵譜)』, 『십죽재화보(十竹齋畵譜)』, 『개자원화전(芥子園畵傳)』 등이 출판되어 중국과 조선에 유포되면서 새로운 현상이 대두하였다.
누구나 원말사대가(元末四大家)를 비롯한 중요한 문인화가들의 작품을 임모하면서 그들의 화풍이 일종의 표현양식으로 고착화되었고, 이로 인해 남종화법으로 문인화가와 직업화가를 더 이상 구분할 수 없게 된 것이다.
강세황, <심산강설도深山降雪圖>,《豹玄兩先生聯畵帖》중에서, 1761년, 종이에 수묵, 38.4×27.4cm, 간송미술관
조선 후기의 화단에서도 이러한 양상은 마찬가지였고, 윤두서(尹斗緖 1668-1715), 조영석(趙榮祏 1686-1761), 심사정(沈師正 1707-1769), 이인상(李麟祥 1710-1760), 강세황(姜世晃 1713-1791) 등의 문인화가들이 남종화의 수용과 정착에 있어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특히 강세황은 남종화가 문인화가는 물론 화원화가, 여항문인화가로 확산되어 한국적인 화풍으로 자리매김하는데 중추적 역할을 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강세황, <괴석감국도 怪石甘菊圖>, 《豹玄兩先生聯畵帖》 중에서, 1761년, 종이에 수묵, 38.4×27.4cm, 간송미술관
그런데 올해가 마침 강세황이 태어난 지 300년이 되는 의미 있는 해인지라 그를 통해 영정조 연간의 화단에서 성행한 남종화를 조명하는 전시가 기획된 것이다. 그는 원래 안산에 은거하며 시서화로 자오한 비주류 문인화가였으나, 1773년 61세때 영조의 배려로 관직에 오른 이후 해박한 지식과 높은 감식안에 의거한 서화 평으로 노년기에 예원(藝苑)의 총수로 우뚝 선 독보적인 인물이다.
심사정, <장림설산도 長林雪山圖>, 《豹玄兩先生聯畵帖》 중에서, 1761년, 종이에 수묵, 38.4×27.4cm, 간송미술관
강세황은 노론과의 정쟁에서 밀린 소북(小北)으로 경제적 어려움 때문에 1744년 겨울 안산(安山)으로 가족과 함께 이사하였고, 1773년 영릉참봉(英陵參奉)이 되어 상경할 때까지 약 30년 동안 이곳에서 학문과 서화에 전념하였다. 안산시절 그는 장서가인 처남 유경종(柳慶種 1714-1784)을 비롯해 안산에 은거한 이익(李瀷 1681-1763)과 그의 학풍을 이은 남인 계열 문인들과 교유하였다.
심사정, <관산춘일도 關山春日圖>,《豹玄兩先生聯畵帖》 중에서, 1761년, 종이에 수묵, 38.4×27.4cm, 간송미술관
화면에 ‘지두백묘법(指頭白描法)’이라고 적어 지두화법으로 그렸음을 밝히고 있다.
이때 접한 중국의 다양한 서적과 새로운 서화들은 노년기에 그가 높은 감식안을 지닌 서화비평가로 자리매김할 수 있는 중요한 자양분이 되었다. 동시에 그는 자신처럼 정권에서 소외된 비주류 문인화가인 허필(許佖 1709-1761), 심사정 등과 중국에서 유입된 여러 화보들의 임모를 통해 남종문인화풍의 수용과 정착에 있어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최북, <석림표옥도 石林茆屋圖>, 1758년, 종이에 담채, 119×79cm, 간송미술관
화면의 제시는 강세황이 지은 산향재(山響齋)이며, 강세황의 호이며 동시에 안산 서재의 이름이기도 하다.
또한 심사정과 함께 중국의 문인화가 고기패(高其佩)의 작품을 감상하며 손가락이나 손톱으로 그림을 그리는 지두화법(指頭畵法)을 소개하기도 하였다. 이번에 전시된 《豹玄兩先生聯畵帖》은 강세황과 심사정의 작품을 모아 1761년 꾸민 것으로 두 문인화가가 공감했던 남종문인화의 세계를 잘 보여준다.
김홍도, <기려원유도 騎驢遠遊圖>, 1790년, 종이에 담채, 28×78cm, 간송미술관
화면 오른쪽의 강세황의 기문(記文)은 김홍도가 중병에서 나은 뒤에 그린 것임을 알려준다.
또한 안산에서 성호 이익의 화풍을 이은 여주(驪州) 이씨 문인들의 후원을 받은 여항문인화가 최북(崔北 1712-1786)과도 여러 차례 만남을 가졌고, 그의 중년기 산수화에서 자연 경물을 간략하게 처리하고 몰골선염식(沒骨渲染式)으로 채색을 약간 더하는 강세황의 독특한 표현기법을 접할 수 있다.
이인문, <산촌설제도 山村雪霽圖>, 종이에 담채, 31×41.2cm, 간송미술관
이인문은 김홍도와 동갑내기 화원화가로 단순한 기법으로 남종화법을 수용하였기에 정형화된 인상을 준다.
1773년 강세황은 61세의 나이에 관직생활을 처음 시작하면서 한양으로 활동무대를 옮기게 되었고, 이후 정조의 총애를 입은 김홍도(金弘道 1745-1806 무렵)를 비롯한 여러 화원화가들의 창작활동을 감독하였을 뿐만 아니라 다수의 서화감평을 통해 예술계의 지표나 방향을 제시하며 한국적 남종화풍의 발전과 확산에 기여하였다. 그리고 마지막 제자인 신위(申緯 1769-1845)에게 죽석(竹石)을 가르쳐 19세기 화단에서 묵죽화가 성행할 수 있는 초석을 마련하기도 하였다.
임희지, <묵란도 墨蘭圖>, 종이에 수묵, 28.2×39cm, 간송미술관
강세황의 묵란도 전통이 여항문인화가로 이어지기도 하였다.
따라서 이번 간송미술관 봄 전시회는 문인화가 강세황을 기점으로 조선 후기의 남종화를 새롭게 조명할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다. 특히 이러한 남종화는 보는 이가 작품을 감상하는 동안 시공을 초월해 그린 사람과 정신적 또는 예술적 교감을 나누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신위, <청죽도 晴竹圖>, 종이에 수묵, 118×72cm, 간송미술관
그렇기에 이번 전시를 찾는 현대인들은 어느 때보다 조선 후기에 그려진 남종화를 감상하며 시공을 초월한 마음의 편안과 여유를 찾고자 하지만, 현실적 여건은 그러한 낭만을 허락하지 않는 아쉬움이 진한 여운으로 뇌리를 스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