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박영택(미술평론가)
전시명: 법관展 장소: 예술의 전당 기간: 2013.4.19-4.26 |
법관, 선-2013,캔버스에 석채혼합재료, 116.8x91, 2012 |
법관스님의 그림은 일종의 색 면 추상화를 연상시킨다. 납작한 캔버스의 표면을 평평하게 다듬어나가며 단일한 색상을 고르게 덮었다. 주어진 화면의 평면성을 두드러지게 강조하는 동시에 적색과 청색의 강렬한 대비를 통해 화면에 긴장과 균형을 조성하고 은연중 화면을 가로지르는, 분할하는 몇 개의 선들이 조용한 파격을 만들고 있다. 그 사이로 문득 구체적인 대상을 암시하는 형상이 간추려져 놓여있다. 화면 속에 또 다른 공간, 화면이 열리고 무한 속에 구체적인 세계의 편린들이 은거하는 형국이다. 색채를 머금은 면들이 서로 공존하고 조화를 이루며 평등해지는 순간이다. 화면은 이렇듯 상반되는 것들의 충돌과 길항으로 관계 짓고 있다.
아마도 스님은 화면 안에 여러 이질적이고 대비되는 것들의 조화로운 상태를 염두에 두면서 그 균형의 세계를 만들어 보여주려는 것 같다. 아니 어쩌면 그 자체를 존중하고 있는 그대로의 세계를 보려는 것도 같다. 자연은 모든 차별과 다름을 두루 껴안는 덕(인)의 경지를 보여준다. 인간만이 차별과 분리, 배제와 구분을 한다. 그러니 그의 그림은 결국 자연에서 파생한 그림인 셈이다. 모든 것을 단순화하고 절제시켜 이룬 극소의 세계상이고 본질이자 궁극의 존재상에 해당한다고 여긴 것의 이미지화다. 우리는 한 작가가 그린 그림을 통해 그만이 보고 깨닫고 느낀 세계의 시각상을 접한다. 그 시각상이란 결국 그렇게 보고 읽는 작가의 마음과 정신의 풍경이다. 언어들이다. 적색과 청색의 주조로 쓰이는 이 화면은 흡사 민화나 탱화의 영향일 수도 있겠지만 사실 사찰에서 생활하는 스님의 입장에서는 그 울긋불긋한 절의 색채들이 그저 자연스럽게 각인되어 있기에 가능하지 않나 생각해본다.
그는 8호 정도 되는 작은 붓으로 그 커다란 화면을 공들여 매워나가고 있다. 그 작은 붓으로 저 커다란 화면을 칠한다는 것도 무슨 의미가 있을 것이다. 그것은 의도적으로 몸을 혹사하고 고되게 하는 그리기이고 그렇게 수없이 반복해서 몇 번에 걸쳐 화면을 색으로 덮어나가는 일은 생각을 지우고 마음을 가라앉히고 모든 욕망을 소진시키고자 하는 의도적인 붓질수행일 것이다. 자신의 마음에 만족할 때까지 칠하고 칠하기를 반복하는 과정에서, 그 시간의 축적 속에서 화면의 상태는 곧 그림을 그린 이의 마음으로 둔갑한다. 그저 그림 그리는 이 시간을 극진히 보내고 그 시간에 최선을 다하는 일이다.
아크릴과 석채가 섞여 칠해진, 무수한 시간이 스며든 화면은 더없이 견고하고 깊이 있는 색감으로 충일하다. 이미 그렇게 칠해진 화면 자체가 그림이 되었다. 작가의 감각과 마음의 결빙이다. 화면 구석구석을 빠짐없이 정성껏 칠해나간 수행의 결과물이 화면이 되었다. 법관스님은 말하기를 맑고 밝고 따뜻하며 안정되고 차분한, 선적인 느낌을 그림에서 추구하고 싶다고 한다. 그렇다고 선화를 그리겠다는 것은 아니란다. 사실 선화란 것도 따로 있는 것도 아니고 특정 소재를 반복한다고 되는 것도 아닐 것이다. 모든 것을 그려도 선적인 느낌이 물씬 거리는 그림이 있다. 사실 한국 현대미술사를 채우던 대부분의 중요 작가들은 흥미롭게도 선적인 느낌을 야기하는 그림을 추구해왔다. 특정 종교를 떠나서 한국인들에게, 작가들에게 선 적인 분위기와 멋은 궁극적으로 우리 그림이 도달해야 할 하나의 경지로 여겨왔다는 것은 매우 재미있다. 전통과 현대의 충돌과 갈등 속에서 한국 현대미술은 자신의 정체성을 선적인 멋과 맛에서 길어 올렸다는 점에서 법관스님의 그림과 그가 추구하고자 하는 미술의 세계는 그렇게 서로 조우하고 있는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