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미정(미술평론가)
처마, 틈과 사이의 공간 미의식
<처마>, 1993, 찰흙, 브론즈, 나무, 사운드 시스템
뉴욕에서 한국과 미국이라는 이질적 문화 접점에 놓이게 된 작가에게 고향 농촌풍경 속 일상은 그의 미술작업에 있어 뿌리 깊은 영감의 원천이었다. 특히, 내부와 외부, 안과 밖의 틈, 사이의 공간에 대한 독특한 미의식은 더욱 그렇다. 1993년 처음 제작된 작품 <처마>는 이번 과천 회고전에서도 전시의 시작을 알리는 매우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다. 화가의 어린 시절 기억과 경험, 특히 어머니의 죽음은 채워지지 않는 그리움과 갈망으로 작가의 예술에 상당한 영향을 주었다고 한다. 그런 점에서 전시장의 초입에 설치된 이 작품은 작가의 상실된 시간과 공간을 떠올리게 하는 촉매제이기도 했다.
작가는 옛집을 그대로 재현하지는 않았다. 대신 방에서 마당으로 이어지는 처마 밑을 진흙으로 캐스팅하였다. 안도 아니요 바깥도 아닌, 내부와 외부 그 사이의 텅 빈 공간이 육중한 무게의 물질로 구체화되었다. 그 주변에는 유년기의 기억을 환기시키는 사소한 물건들이 배치되었다. 마루에 놓아둔 푸성귀가 청동으로 주물 되어 있기도 하고, 마당에 놓인 농기구가 나무로 제작되어 있기도 하다. 바닥과 벽의 모서리에 깔고, 쌓아 놓은 자갈과 황토 탓에 미술관의 공간은 마당으로 들로 확장되었다. 일정한 간격으로 놓인 투박한 육면체들은 낮게 깔린 물소리와 함께 우리의 연상을 어느덧 어린 시절의 개울가 풍경으로 이끌어 간다. 마침내 고향집의 풍경은 눈이 아닌 관객의 머릿속에서 한 편의 드라마로 재조합된다.
한옥에서 처마는 지나가는 사람을 손쉽게 불러들이는 장소이다. 옛사람들은 처마 밑에 들어 잠시 쉬어가는 이를 쫓지 않았다. 세상의 소식이 그를 통해 타고 들어왔고, 타인을 맞는 따뜻한 마음이 전해졌던 공간이다. 그곳은 안과 밖으로 교차하는 틈새이며, 타자와 우리가 소통하는 통로이기도 했다. 뉴욕이라는 낯선 환경에 처한 작가에게 이쪽도 저쪽도 아닌 처마와 같은 중간지대가 꼭 필요했으리라.
시간과 문명을 품은 초현실적 오브제
<문명에서 자연으로>, 1995 혼합매체
한편 미니멀리즘과 모더니즘에 대한 전복의 전략은 1990년대 이후 임충섭 작품에서도 한결같이 나타나고 있는 것 같다. 또 다른 전략의 핵심은 시간의 도입이었다. 1995년 <문명에서 자연으로>나 2000년부터 제작하기 시작한 <화석>과 같은 작품이 이러한 유형에 속한다. 화가에 의해 발견된 오브제는, 문명이 사멸하여 자연으로 돌아간 이후에 수집된 표본처럼 제시되었다. 채집된 표본에는 나뭇잎이나 가지와 같은 유기체도 있고 유리, 플라스틱과 같은 무기물도 있다. 계통 없는 오브제들이 하나의 채집 상자에 모여 있는 셈인데, 모호하게 처리된 인덱스는 먼 미래 가상의 시간에 대한 부조리한 기록에 가깝다. 과학적 분류와 인류학적 범주를 넘어서는 채집물에서 관객은 미래에 대한 오싹한 공포감마저 느끼게 될지 모른다.
서로 어긋나고 부조리한 것들의 아상블라주와 은밀한 상자들의 배치는 마치 SF 영화의 미장센처럼 공상적이다. 무너진 문명의 잔해와 흔적들. 그것은 분명 엔트로피의 세계이며, 폐허의 미학이 지배하는 세계이다. 이처럼 물체에 소멸이라는 시간을 주입하자 발견된 오브제는 문명을 넘어선 고고학적인 유물이 되었다. 사실 시간의 개입은 1970년대 미니멀리즘이 모더니즘의 끝에서 과거와 작별하는 균열을 만들어 냈던 핵심 사항이었다. 모더니즘 비평가 마이클 프리드(Michael Fried)가 연극성이라며 극구 만류하였던 설치미술의 조건에, 임충섭은 존재론적인 시간뿐 아니라 폐허라는 문명의 시간을 도입해 버린 것이다. 발견된 조형물에서 채집된 화석으로의 이 드라마틱한 변화는 임충섭의 작품세계를 일순간에 모더니즘에서 초현실주의로 확장시켜 버렸다.
<딱정벌레 II>, 1999~2006, 나무, 사운드시스템
처마나 자락과 같은 지역성이 인류학적인 사멸의 보편 법칙에 이르면 임충섭의 미니멀리즘적인 경쾌함은 바로크적인 장중함으로 바뀌고 있음을 느끼게 된다. 이러한 틈과 너머로의 자유분방한 이주는 임충섭이 단색화와 민중미술이 갈등하는 한국의 현대미술에서뿐 아니라, 미니멀리즘 이후의 뉴욕에서도 기존의 주류 미술사에 안주하지 않고 제3의 행로를 택할 수 있는 강단이었다.
임충섭의 회고전 <달, 그리고 월인천지>는, 시적 서정과 위트, 소박함과 장중함이 맛깔스럽게 어우러진 성찬이다. 한국과 뉴욕, 동서의 두 세계를 넘나들지만, 퓨전의 느끼함은 여기에 끼어들지 않는다. 미니멀리즘과 포스트 미니멀리즘, 단색화와 단색화 이후의 영토를 대담하게 탐색하고 있는 임충섭은 지역성이나 시대적 사조, 국적에 쉽게 귀속되지 않는 마에스트로가 되어 돌아왔다. 즐겁고 놀라운 발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