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미정(미술평론가)
<월인천지>, 2012 설치 부분, 실, 나무, 모형, 비디오. <타래>, 2011, 면실, 나무, 모형
국립현대미술관에서는 뉴욕에서 활동하는 작가 《임충섭의 회고전, 달 그리고 월인천지》전이 지난해 12월 12일 시작하여 2월 24일까지 열리고 있다. 충북 진천에서 태어난 임충섭(1941)은 1973년에 뉴욕으로 건너가 40여 년 넘게 외국의 미술 현장에서 창작에 전념해온 작가이다. 임충섭은 한국 화단에서는 다소 낯선 이름이지만, 설치작업을 바탕으로 특정한 양식이나 사조, 지역으로 규정하기 어려운 풍부한 예술세계를 쉬지 않고 펼쳐 온 중진이다. 이번 회고전은 1970년대 초기의 회화뿐 아니라 레디메이드 오브제, 키네틱, 영상과 사운드 등 다채로운 매체를 아우르며 진화해온 작가의 모든 것을 보여주고 있다.
전시의 하이라이트는 단연 <월인천지>이다. 특별히 마련된 순백의 중앙 전시장을 한쪽 끝에서 다른 쪽 끝까지 전 공간에 걸쳐 압도하듯이 펼쳐져 있다. 작가가 정성껏 만든 오브제와 신비한 달의 영상, 운치 있는 정자를 그대로 만들어 매달은 미니어처와 정교한 키네틱 작품으로 구성된 이 설치물은 현대미술의 오케스트라를 방불케 한다.
<월인천지>, 2012 설치 부분
“세상을 비추는 천 개의 달”은 그 자체로 더없이 아름다운 이미지이지만, 성리학적 논쟁을 담고 있는 철학적 시구이기도 하다. 지극히 한국적 모티브와 서정을 바탕으로 하고 있지만, 생명의 물레를 돌리고 천체의 운행에 순응하는 세계의 구현은 인류 보편의 신화를 구현하고 있기도 하다. 그래서인지 차고 기우는 두 개의 달 영상을 아름답게 투사하는 이 공간은 단색조의 우아함과 팽팽하게 조여진 거대한 운명의 실타래가 충돌하며 가쁜 긴장감을 뿜어내고 있다.
풍부한 상징과 은유, 음양의 긴장, 운명과 문명의 교합이 대위법을 이루며 정교하게 배치되어 있는 <월인천지>는 사실 다소 난해하게 느껴진다. 이 같은 작가의 감각은 증류수같이 무색, 무취하여 불교에서의 공(空)을 암시하는 것 같기도 하고, 모더니즘 화이트 큐브의 중립적인 냉정함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동과 서, 문명과 자연을 관통하는 이 같은 복합된 감수성은 1960년대 말 뉴욕으로 이주한 작가 임충섭의 생의 궤적에서 연유한다.
<월인천지>, 2012 설치 부분, 모형과 달 영상
미니멀리즘과 모노크롬에 대한 수용과 거부의 긴장은 처음부터 끝까지 이 전시를 관통하는 하나의 화두처럼 보인다. 우선 미니멀리즘의 끈질긴 조건은 화이트 큐브로 설정된 전시장의 벽에서부터 느껴진다. 그리고 그 기원은 1970년대 임충섭이 서울서 제작한 드로잉에서 단서를 찾을 수 있다. 당시 서울의 모더니스트들은 모노크롬의 평면 회화에 매달렸고, 임충섭의 출발도 바로 여기서부터 시작되었다. 한지에 그린 단순한 격자의 패턴이나 선묘의 드로잉은 영락없이 단색 모노크롬 회화이다.
<무제 드로잉>, 1979, 한지 목탄, 검은 잉크. <드로잉>, 1988, 목탄지에 숯
그러나 임충섭은 자신의 캔버스가 회화적 지지체로 축소되어 버리는 것이 마땅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미니멀한 캔바스의 표면에 풍성한 의미를 부여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태도는 여러 이야기를 담은 설치작업으로 이어졌다. 2000년에 제작한 <민들레>를 보자. 설치된 오브제들 하나하나는 민들레라는 꽃과 형태의 유사성을 거의 찾을 수 없도록 재구성되었지만, 그 안에는 이 작은 꽃이 가지고 있는 앙증맞고 다채로운 속성들이 옹알거리고 있다. 척박한 땅, 질긴 이파리, 노란 꽃잎과 미풍에 날아가는 씨앗. 이 모든 것들이 검을 돌과 철판, 실크와 나무의 오브제로 해체되고 대단히 조형적인 방식으로 공간에 배치된 것이다. 작품 앞에 서면 민들레를 둘러싼 온갖 이미지들이 시각과 청각, 그리고 촉각을 자극하는 공감각적인 언어로 다가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때로 임충섭은 부처와 같은 복잡한 종교적 도상을 하나의 간결한 타원의 오브제로 축약시켜버린다. 그 둥근 표면이 부처의 몸과 얼굴이기도 하고 중생의 탄식에 기울이는 부처의 귀이기도 하다. 2012년 제작된 흰색의 재단된 캔버스는 또 어떠한가. 이 이상한 오브제의 날렵하면서도 유연한 선들과 반투명한 표면은 신비하면서도 기품이 있다. 인공물 이면서도 자연의 느낌이 물씬 나는 이 우아한 오브제는 제목이 알려주듯이, 인두질로 잘 다려진 폭이 넓은 두루마기 자락이다.
<민들레>, 2000 철, 실크, 흑요석, 나무, U.V.L.S 젤, 환기미술관
<부처의 얼굴>, 2000, 채색모래, 합성 아크릴릭 <자락>, 2012, 변형된 캔버스에 아크릴릭
해체, 재구성, 함축, 은유와 환유 등, 모든 시(詩)적인 수사의 기술을 동원하는 임충섭의 작품은, 미국의 비평가 클레멘트 그린버그(Clement Greenberg)가 주장한 모더니즘 미학의 범주에서 보자면 대단히 문학적이며 연극적이다. 오염된 회화?로 지탄받아 마땅한 것들이다. 그러나 임충섭은 미니멀에서 맥시멀을 끌어내는 자기 해체를 통해 모더니즘의 감옥에서 탈출을 시도하고 있다. 작가의 미니멀리즘으로부터의 유쾌한 탈주는 흰 벽을 뚫고 나오는 자전거에서 위트의 절정을 이룬다. 이 자전거 레디메이드 오브제는 흰 물감을 뒤집어쓰고 모더니즘의 경계를 막 넘어가고 있다. (계속)
<단색자전거-변형>, 2007, 자전거에 채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