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김미정(미술평론가)
광주시립미술관 2012. 12. 6~2013. 2. 24 |
광주 시립미술관과 무각사 로터스 갤러리에서는 해방 이후 신사실파(新寫實派)의 일원으로 한국 현대미술의 산증인'이자 1977년 이후 유럽에서 활동하였던 백영수(1922~) 화백의 회고전을 개최하고 있다. 1977년에 프랑스로 건너간 백영수는 2011년 영구 귀국하여 현재는 경기도 의정부에 거주하고 있다. 90세를 넘긴 노화가의 70년 화업을 결산하는 자리에는 시대별 작품과 함께 그간 모은 1940~50년대 전시 리플렛, 방명록, 각종 도서도 함께 나와 있다. 해방공간과 1950년대 초창기 미술계의 일면을 보여주는 귀한 자료들이다.
신사실파의 증인, 백영수의 소박한 동심의 세계
백영수, <소년>, 1978, 41.1x31.1c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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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래 몇 년 사이 백영수는 유일하게 생존한 신사실파의 화가로서 당시를 증언하는 데 더 바빴다. 화가는 2007년 ‘유영국 미술사업회’에서 기획한 《신사실파전》에 작품과 자료를 출품했을 뿐 아니라 여러 강연과 토론에 참여하여 전후 시대에 대한 귀중한 증언을 해주었다. 신사실파 화가인 김환기, 유영국, 이규상, 장욱진, 이중섭, 한 사람 한 사람이 해방기의 혼란과 이념의 분탕질 속에서 오롯이 예술의 순수성을 버리지 않고 분명한 자기 세계를 확립한 한국 모더니즘의 대가들이다 보니, 이들과 젊은 시절을 부대끼며 미술의 이념을 함께 했던 동반자로서 백영수의 존재는 그 자체로 귀중했다.
《신사실파 60주년 기념전》 광경, 2007년 환기미술관
우측 하단은 전쟁기의 신사실파화가들, 유영국, 김환기, 장욱진, 이중섭, 백영수
사실 초기의 작품 뿐 아니라 백영수 화백이 프랑스에서 제작한 1970년 이후의 작품에서도 신사실파 화가들의 흔적은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예를 들어 화가가 즐겨 그린 가족과 소박한 <가족>에서는 장욱진의 욕심 없는 우화적인 세계와 겹쳐지고, 편안한 여백과 담박한 색조에서는 김환기의 멋이 묻어난다. 이중섭의 가족에 대한 애절한 사랑, 이규상의 엄격한 조형의지까지 백영수의 작품에서는 한국 모더니즘의 고갱이가 옹골지게 배어 있는 듯하다. 이와 같은 2000년대 후반 신사실파에 대한 미술사적인 재평가는 백영수가 2011년 영구 귀국을 결정하는데 어떤 계기가 되었을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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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영수 작품의 특징이라면 매우 단순한 도상으로 표현된 원초적 동심의 세계라고 할 수 있다. 소년은 고개를 기웃하며 몽상에 잠겨 있다. 그 모습은 유년기의 자족감과 향수의 감정을 동시에 불러일으킨다. 이에 시인 구상은 "백영수의 변함없는 드맑은 동심은 연탄 빛처럼 흐려진 우리의 마음을 씻어주는 청량제와 같다."고 하였다. 이 같은 모성적 공간은 지나간 시절에 대한 상실감을 진하게 확인시킨다. 나른한 소년의 몽상은 미증유를 재난을 통과한 이들의 트라우마에서 유출된 무의식이다. 그래서 많은 한국 미술가들에게는 상상력의 근원이기도 하다. 평온한 백영수의 화폭에서 격동과 혼란기의 난기류가 여전히 공명하고 있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라고 하겠다.
해방기 공적(公的) 미술활동과 목포, 광주화단에서의 역할
이 전시의 의미는 백영수와 신사실파와의 관계를 확인하는 것에서 끝나지 않는다. 경기도 수원 출신의 백영수는 오사카 미술학교에서 서양화를 전공하고 1944년 목포와 1946년 광주를 거쳐 1947년에는 서울에서 활동하였다. 초기 목포와 광주의 미술대학이 구성되는 시기에 간과할 수 없는 역할을 했을 뿐 아니라 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해방 공간에서의 중앙의 미술행정에 깊숙이 관여하였다. 파격적인 누드화로 목포화단을 발칵 뒤집어 놓았던 경험, 조선대학교 초창기의 교직 수행과 광주 의과대학에서의 전시회 기록은 현대 호남 서양화단의 중요한 사건들이었다.
백영수, <목포일우>, 1945, 33.4x24.2cm
백영수가 해방 이후 본격적으로 활동한 것은 1947년 서울에서부터였다. 그 해 화신백화점 화랑에서 개인전을 열었고, 유엔 한국위원단과의 친분을 바탕으로 약관의 나이에 《조선종합미술전》 심사위원과 대한미술협회의 상임위원을 역임하기도 하였다. 유엔한국위원단 공보관이었던 프랑스인 알벨 그랑(Albert Grand)의 든든한 후견이 젊은 화가의 때 이른 성공의 발판이 되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무엇보다 대상에서 형태를 추출하는 백영수의 남다른 현대적 감각과 시적 재능 때문에 이루어진 발탁이었다. 그의 회고를 듣자면 해방기와 1950년대 백영수는 상상 이상의 유명세를 누렸었다. 1948년 3월 일반인이 출입하기 어려운 덕수궁 석조전 회의실에서 개인전을 가졌으며 명동에서 시인, 소설가들과 교류하며 삽화를 그리기도 하였다. 그 시기의 흔적이 이번 전시회에 나온 유엔 한국위원단의 초상화 드로잉이다. 화가가 그렸던 수 십여 점 중에서 미처 본인에게 전하지 못하고 작가가 간직해온 귀한 것들이다.
백영수, UN 한국위원단 초상화, 1948, 각 20.3x26.8cm
백영수와 알벨 그랑
정제된 색채와 공간의 시적(詩的) 해석
백영수는 그림을 그릴 때 색은 무척 아끼고, 공간은 여유롭게 사용한다. 한쪽 모서리로 두 마리의 게가 재미나게 옆걸음질 하는 1953년 작품, <게>나, 수면 가득 작은 물고기들이 떼로 노니는 담백한 모노톤의 1969년 작품, <송사리>는 구상과 추상의 경계를 넘어서 자연의 무심한 아름다움이 저절로 느껴지는 그림이다. 반복적인 선묘의 활달함과 넓은 여백의 자연스러움은 언뜻 봐서는 1970년대 단색화와 크게 다르지 않다. 이러한 백영수의 여유로운 화면의 운용은 1960년대 한국화단이 격정적인 앵포르멜 시기였다는 점에서 더욱 의외이다. 물질감과 작가의 흔적이 캔버스에 과잉으로 분출되었던 시절, 1970년대 중반 이후에야 가능할 모노톤의 평면화를 백영수가 일찌감치 선취한 것에 새삼 놀라게 된다.
백영수, <게>, 1953년, 55x46cm, 국립현대미술관
백영수, <송사리>, 1969. 71.5x60cmcm
이 같은 여백의 넉넉한 감각은 검박한 것을 호사 취미 보다 높게 샀던 사대부 문인들의 정서와 맞닿아 있다. 그래서 백영수의 그림은 단연 한국적으로 다가온다. 그러나 한편으로 백영수의 문인화적인 정서는 유럽적 감각과 상통하기도 한다. <가을>이나 <호숫가>의 작품을 보고 있자면 미묘한 흰색을 매개로 풍부하게 사용된 초록과 노랑의 중간 색조는 더없이 조화롭고 세련되었다. 게다가 거칠지 않을 만큼의 경쾌한 붓의 움직임은 어쩐지 프랑스적인 위트를 느끼게 한다. 자연스럽게 백영수의 그림을 보자면 유트릴로나 라울 뒤피의 상쾌한 그림이 연상되는 것은 이 때문이다. 또 아틀리에의 소소한 물건들과 일상에서 흘러나오는 행복과 고독은 화가가 특히 좋아했던 에밀 보나르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백영수의 이번 회고전은 동양적 소박함과 유럽적인 에스프리, 두 세계가 화가의 화면에서 별다른 어려움 없이 융합하고 있음을 새삼 발견하게 되는 전시이다.
백영수, <가을>, 1961, 48.7x71.4cm | 백영수, <호숫가> 1961, 49x71.4cm |
그동안 신사실파나 해방기의 미술행정에 관여했던 사실에 백영수의 작품세계가 가려질 때가 많았다. 그러나 1960~70년대 화단에서 빗겨나 자신만의 세계를 심화시켜나갔던 화가의 저력을 재평가하지 않을 수 없다. 이는 화가가 서울을 떠나 유럽에서 20여 차례가 넘게 개인전을 열 수 있었던 원동력이었다. 이후 백영수의 화면이 더 함축되어 2000년대 들어서는 거의 추상에 도달하였다. 화면은 간결한 선묘나 색채만 남았고 공간은 평면으로 환원해 버렸다. 한 편의 시처럼 뉘앙스가 풍부한 구상적 추상은, 얇게 펴 바른 물감만큼이나 과장됨이 없다. 90을 넘긴 노화가 백영수가 평생을 가꾸어온 정감 어린 세계는 후기 자본주의 시대의 스펙타클한 자극에 익숙한 관객이라 할지라도 잠시나마 우리를 어린아이의 소박한 심성으로 귀환시킨다. “적을수록 좋은(less is more)” 모더니즘의 정수가 한국적 서정으로 되살아나는 장면이다.
백영수, <공간의 문>, 2012, 130x195c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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