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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박영택(미술평론가)

   전시명: 최병소展 

     장소: 대구시립미술관

     기간: 2012.12.21-2013.2.17

최병소, Untitled, 신문용지, 볼펜, 연필, 240x 110x 2cm, 2007-2008 

 

최병소는 신문지의 표면을 볼펜과 연필로 까맣게 물들인다. 덮어버린다. 그것은 그리기이자 지우기다. 그 깊은 검음이 아름다웠다. 종이의 표면을 지독하게 새까맣게 칠해버린 것인데 그 결과물이 광물이나 재, 혹은 나뭇결 같은 이상한 느낌을 전해주었다. 종이의 표면을 저렇게 깊고 단호한 어둠으로 만들었을 작가의 손놀림과 한없는 노동의 양과 시간을 헤아려보았다.
원래 회화란 것이 주어진 평면에 눈속임을 불러 일으키는 장치라면 그의 화면은 표현한 것도 아니고 환영을 주는 것도 아닌 그저 종이라는 물질을 이상한 존재로 만들어 던져 놓았다. 그는 연금술사처럼 종이에 화학적 변화를 일으켜 색다른 물질로 환생시켰다. 아무것도 그리지 않고 표현한 것도 아니고 그래서 작가의 조형의지나 의미란 것을 도저히 찾아볼 수 없는 그런 기이한 화면이었지만 오히려 그 침묵의 화면이 더 큰 울림을 동반하고 있었다. 형언하기 어려운 기이한 물질로 돌변한 종이, 신문지의 마른 살과 그 피부를 죄다 점유해버린 캄캄한 어둠 속으로 기어들어가고 싶다는 생각을 해봤다.
내 몸과 의식도 저런 어둠으로 사라지고 싶은 것이다. 나를 마냥 북북 지우고 싶은 것이다. 그렇게 모든 것을 다 지우고, 가능하다면 지금까지 살아왔던 치욕과 슬픔, 아픔과 한을 단호하게 지우고 다시 살고 싶은 것이다. 그냥 ‘콱’하고 죽고 싶은 것이다. 그러다가 다시 태어나고 싶은 것이다. 새로 살고 싶다는 것은 어쩌면 숙명 같은 것이다. 우리는 매일  같이 완전히 죽고 다음날 다시 살아난다. 기적을 되풀이 한다.
작가는 신문지 위에 선을 긋는다. 검정 색 모나미 153볼펜과 4B연필로 채운다. 그는 오랜 시간을 반복해서 긋고 칠하기를 거듭하면서 세월을 보냈다. 자신의 손, 몸이 볼펜과 연필을 통해 신문지의 표면을 집요하게 문지르는 소리를 들으며 늙어갔다. 그는 온몸으로 신문지 내부로 육박해 들어갔다. 신문지 피부와 자기 몸을 일체화시켰다. 온통 새까만 색으로 물들였다. 그리고는 기어이 신문지의 얇은 표면을 찢고, 뚫고 나갔다. 그가 신문지에 검정색 볼펜과 연필로 덮어나가기 시작한 것은 1970년대 중반 부터다.
작가는 어느 날 누워서 불경소리를 듣고 있었다. 75년도 어느 날이었다. 스님의 독경소리가 반복되고 주문이 도돌이표로 순환될 때 작가 옆에는 신문지와 볼펜이 놓여있었다. 그는 문득 신문지 위를 볼펜으로 무심하게 칠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신문을 읽을 수 없게 지워나가는 동시에 검은 색으로 칠하는 행위이고 결국은 불경소리 따라 반복해서 칠하고 지우는 일이고 긋는 행위로 주문을 외우는 일이기도 했다. 공즉시색, 색즉시공이다. 그렇게 영원 같은 주문을 외우는 것처럼 그어댔다. 그는 신문지를 반으로 접어 그 반절의 공간에 사선으로 선을 그어 분할했다. 바닥에는 약간이 쿠션을 필요로 해서 두툼하게 종이를 깔았다. 그리고는 하염없이 볼펜을 균질하게, 순차적으로 칠해나갔다. 덮어나갔다. 볼펜으로 칠한 후 다시 그 위에 연필로 칠하고 덮어나갔다. 그리고는 뒤집어서 볼펜으로 칠하고 다시 연필로 칠하고, 지우는 작업을 반복했다. 신문지의 얇은 단면 앞뒤로 공략을 했다. 통상 그림이 화면의 앞에서만 이루어진다면 그는 뒷면과 앞면을 동일하게 다룬다. 표리가 동일하다. 그렇게 해야 신문지란 종이가 다른 물질로 바뀌고 어둠도 더 단호할 것이다. 그러면 신문의 활자들이 지워진다. 점차 암흑이 된다. 순간 신문은 홀연 사라진다. 더러 검은 먹을 칠하기도 하고 다시 그 위에 연필을 칠했다. 마치 확인사살하듯이 더욱 검고 진하게 칠한다. 이중의 부정이 이루어진다. 검정에 검정을 더하고 볼펜 잉크에 흑연을 덧입힌다. 온통 검정뿐이다. 아울러 신문지의 용도를 의도적으로 폐기하고 이를 예술적 맥락에서 새롭게 탄생시켰다.   

글: 박영택 교수(경기대학교, 미술평론가)


편집 관리자
업데이트 2024.10.26 1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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