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명: 백동열展 장소: 노암갤러리 기간: 2012.11.14-11.20
전통을 잇다: 현대 한국미술
백동열, 4개의 쪽지, 116.2x80x4pcs, 장지에 혼합재료, 2012
한국미술에 담긴 다양한 미적 가치와 사상, 기법, 표현방식 등을 전제로 새로운 작업을 시도하는 현대미술의 현장을 소개하는 코너입니다.
백동열은 어린 시절 부모님이 자신에게 전해주던 쪽지에 대한 추억으로부터 그림의 단서를 잡았다. 맞벌이하시는 부모님으로 인해 홀로 보내는 시간이 많았으며 부재한 부모님의 육성과 체온을 대신해 그 작은 종이쪽지가 그와 부모 사이를 매개시켜주었다. 그것은 일종의 유년시절과 부모님의 사랑과 고독했던 당시의 시간 등을 복합적으로 상징하는 기호가 되었고 그 형태 자체는 일종의 트라우마처럼 각인되어 남아있다.
책상위에 놓였던, 간단한 문구가 적힌 지난날의 쪽지는 추억과 향수, 그리움 등을 동반하는 심리적인 매개물이자 지난 시절을 떠올려주는 감상적인 존재가 되었다. 작가는 그 쪽지를 단순하게 형상화하고 이를 무수히 반복해 화면에 올려놓았다. 화면은 표백되지 않은 한지를 사용해 종이 자체의 부드러운 색채와 질감을 살려냈고 다양한 기법으로 색채와 질감효과를 올려놓았다. 장지에 전통적인 채색물감이 흠뻑 스며들었다. 백동열의 작업은 실상 무엇인가를 그리거나 표현했다기보다는 재료의 물성과 기법의 극대화를 고려하는 상당히 형식적이고 기술적인 문제에 방점이 놓인 작업이란 생각이다.
알다시피 그림이란 구체적인 형상이나 이미지 이전에 물질이다. 그림을 이루는 존재론적 조건들이 그려진 이미지에 앞선다는 생각이 모더니즘이기도 하다. 알다시피 한국의 현대 동양화 역시 그런 모더니즘의 영향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이응로의 한지콜라주작업이나 권영우, 황창배 등의 재료실험이나 매체의 강조는 선구적인 제스처들이다. 반면 백동열은 지극히 개인적인 서사, 정서의 세계를 차분히 깔아놓은 상태에서 기법을 실험한다. 그 기법은 동양화 장르자체를 전복하는 차원이 아니라 깊이 있는 화면과 전통적 재료체험과는 다른 효과를 극대화하는 쪽에서 풀려난다.
동양화작업에서 흔히 접하는 모필의 맛이나 관습적인 소재들을 지우고 대신 정교하고 치밀한 실험처럼 여러 재료들을 동원해 최적의 화면 상태를 만들어 보이는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붓에서 벗어난 그는 훨씬 자유로운 창작기술을 실험하고 그 데이터를 저장해서 작품 안에 용해한다.
반복적으로 연결된 화면(16:9나 4:3의 비율로 이루어진, 그래서 마치 시네마스코프 비율을 선사하기도 한다)은 복수화 되어 개체성, 단일성, 사각형의 한 화면이란 틀을 깬다. 그것은 결코 하나의 화면 안에 가둘 수 없고 다른 것과 연루되어서 퍼져나간다. 추억은 하나의 인상이 아니라 매순간순간에 따른 여러 이야기와 감정을 동반한다. 그것은 저마다 다른 순간이 모여 이룬 집합적인 성격을 지닌다. 작가는 염색한 한지 위에 아교반수를 수차례 해서 두텁게 안료를 올리기도 하고 한지에 혼합재료를 섞어서 혹은 드라이 피그먼트와 린시드 오일, 색연필과 오일파스텔 등으로 칠해 완성한다.
그런가하면 장지 기법을 한 한지위에 들기름을 먹인 화선지를 잘라 붙여서 쪽지를 만들기도 하고 색을 입힌 한지를 콜라주하거나 율피로 염색한 한지를 구겨진 상태로 화판에 붙인 후 붓으로 쪽지 형태를 그리는가 하면 두툼하게 바른 석고 피터 위에 칼로 형태를 파내기도 하는 등 실로 다채로운 방법들을 고안해 바탕 처리에 신경을 쓴다. 화면에 직접 그려지는 방법과 저부조로 돌올하게 올라오는 입체적 맛, 촉각적인 표면효과를 극대화하기도 한다. 전통적인 동양화재료와 함께 구사되는 이 다양한 기법과 컴퓨터의 활용 등이 동시대 젊은 작가들의 동양화/회화작업이다.
글: 박영택 교수(경기대학교, 미술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