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명: 천하제일 비색청자展 장소: 국립중앙박물관 기간: 2012.10.16-12.16
전통을 잇다: 현대 한국미술 |
매화대나무버들물새무늬 표주박모양 주자, 고려 12-13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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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인들은 차와 술을 중요한 음식으로 인식하였고 이를 즐겨 마셨다. 차 문화의 확산에 따라 청자로 만들어진 다도구가 발달되었고 주기 역시 요구되어 주자가 발달했다. 차란 선종의 유행에 따라 참선에 접어들거나 명상에 잠기기위해서도 요긴한 수단이었으니 당연히 다기의 표면에는 선계의 모습이 어른거려야 했을 것이다. 그러니 학과 구름이 자욱한 풍경이 삽입되었으리라.
술을 담는 술병(주자) 역시 술에 취해 표표히 세상을 떠돌고 싶다는 마음을 투영하기에 바람에 흔들리는 버드나무와 수면 위를 떠다니는 오리의 모습이 호출되었을 것 같다. 전하기를 고려 시대에는 연못을 만들어 버드나무, 갈대를 심고 오리 등을 키우며 이를 감상하는 취미가 널리 유행했다고 한다. 특히 문인들은 호젓한 정자에 친한 친구를 초대하여 술과 차를 곁들여 거문고를 타고 바둑 두기와 시 짓기로 여가를 즐겼다고 한다.
그릇의 표면에 그려진 그 풍경은 고려 시대 사람들이 꿈꿨던 이상향에 다름 아니다. 청자의 색채 역시 유토피아. 피안을 보여주는 색이다. 모든 시대의 미술에는 당대인들이 꿈꾸는 이상적인 삶과 행복의 도상들이 투사되기 마련이다.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리는 특별전시인 <천하제일 비색청자>전에서 만난 이 술병 앞에서 나는 오래 머물렀다. 그릇의 표면에는 물가 풍경이 소박하게 그려져 있다. 당시 고려인들은 물가 풍경을 앞에 두고 술을 마시며 한가롭게 소일하는 것이 큰 행복이었던 것 같다. 바람에 흔들리는 버드나무 이파리와 우아한 몸놀림으로 물살을 가르는 오리의 몸에서 더없는 아름다움과 지극한 평화로움을 보던 눈이고 마음이다. 여유롭고 운치 있는 인생관이 감촉된다. 당시 문사인 이규보는 “여름에 손님과 함께 동산에 자리를 깔고 누워서 자기도 하고 앉아서 술을 마시기도 하며, 바둑도 두고 거문고도 타고 마음 내키는 대로 하다가 날이 저물면 끝낸다. 이것이 한가한 자의 즐거움이다.”라고 노래했다. 물가 풍경과 비색이 어우러진 주자의 표면은 고려인들이 꿈꾸었던 유토피아를 환각처럼 안겨주고 있다. 청자에 그려진 물가풍경이야말로 한국인들이 염원하는 유토피아, 참된 삶의 원형을 안겨준다. 이 청자에 그려진 그림을 보다가 이강소의 오리그림이 떠올랐다. 블루톤으로 가득한 단색조의 화면에 격렬한 붓질이 몇 번 흔들리고 하단에는 오리 한 마리가 물에 떠있는 듯한 장면이다. 그러나 오리를 재현한 것은 아니고 다만 몇 번의 붓질이 지나간 자취가 오리처럼 보일 뿐이다. 그러니까 오리를 그린 것이라기보다는 오리를 연상시키는 그런 필촉, 붓질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작업 과정 자체를 가시화시킨 그의 회화는 캔버스라는 평면 위에 페인트가 칠해진 사물, 즉 타블로(회화)라는 사실을 명백히 입증시키고 있다. 이런 결과는 회화의 자율성과 순수성, 평면성을 주장하는 모더니즘 회화의 논리에 충실한 것이리라. 여기서 오리는 기호이고 구실에 지나지 않음을 우리는 알 수 있다. 그가 생각하는 회화성의 세계를 매개해 주는 관념적 계기로서의 오리인 셈이다. 오리를 통해 자신의 입장, 회화관을 결정지은 것이다. 또한 획과 선을 생각해 보기 위한 구실로서의 그림이자 유동적이고 생명감 있는 것을 통한 환기이기도 하다. 동시에 거기에는 신비롭고 명상적인 자연의 이미지가 자욱하다. 그를 통해 역사적 근거가 희박한 우리 식의 모더니즘 회화를 구출해내고 있다는 생각도 든다. 문인화의 정신세계와 표현주의 예술세계의 유사성에 주목하는 그는 동양화가 갖고 있는 정신세계가 문인화에 내재해있으며 이 문인화가 표현주의 예술과 일치하는 점에 연결되어있다는 생각이다. 그런데 결과적으로 이강소의 오리그림은 고려청자의 표면과 너무도 유사하다. 나로서는 이점이 무척 흥미롭다. 그러니 한국현대미술은 이처럼 우리 전통으로부터 골수를 뽑아 만들어내고 있는 것이다.
글: 박영택 교수(경기대학교, 미술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