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유리원판에 비친 한국의 문화 유산 기간: 2012.9.24~12.24 장소: 서울 성균관대학교 박물관
카메라 앞에서 ‘치즈’하고 표정 관리를 하는 것은 사실 카메라 초창기의 구습이랄 수 있다. 유리판에 감광제를 발라 사용했던 불편했던 시절, 셔터 한 번 누르는 순간이 ‘전부’였다. 그래서 이 불편한 시대의 기억, 기록은 더욱 소중하게 다가오고 있다.
석비 앞에서 포즈를 취한 후지타 료사쿠
일제 때 고고학자 후지타 료사쿠(藤田亮策, 키워드 참조)는 남이지만 소중한 기록과 기억을 많이 남겼다. 그는 조선고적조사위원회의 위원을 하면서 그리고 경성제국대학의 교수로 있으면서 당시 조선의 여기저기에 카메라를 들이댔다. 그중에는 당시 이미 고적 취급을 받은 것도 있었고 그 당시의 현대로 있었다. 해방이 되고 1,800여점 되는 유리원판을 일본으로 가져가려 했으나 여의치 않았다.
1939년 9월에 찍은 평안북도 연변 철옹성의 철옹관의 모습. 왼편은 원판필름을 디지털로 복원한 것이고 오른쪽은 손상 부분을 포토샵으로 보정한 것이다.
이 유리건판을 소장하게 된 성균관 대학교는 그동안 유리건판 복원 사업을 벌여왔다. 2005년에 시작된 이 사업은 최근 한국이 자랑하는 디지털 기술과 접목되면서 상당수 그가 당시에 보고 찍었던 광경, 모습을 재현하게 됐다. 그래서 우리는 그 사진을 보면서 타임여행이 가능하게 된 것이다.
1926년 조선총독부가 완공되면서 광화문은 경복궁 동쪽 담장으로 옮겨 놓았다.
말이 없는 건물이나 탑 사이로 간간히 1920년대, 1930년대를 살았던 조선 사람들의 얼굴이 보여 애틋하면서도 정겨운 느낌이다. 또 사진은 남았지만 실물은 재가 돼버린 것도 있어 세월에는 사람 뿐아니라 유물도 기억만으로 남게 한다는 사실도 느끼게 한다.
경복궁 북쪽 신무문의 옛모습과 오늘날의 모습
오늘날 신무문 입구쪽은 일본과 중국의 관광객들이 청와대를 지켜보는 자리가 되고 있다.
유리원판의 디지털복원 사업의 결과는 지난 2006년과 2007년에 ‘집안의 고구려 유적의 어제와 오늘’ 그리고 ‘경주 신라 유적의 어제와 오늘’이란 전시를 통해 그 일부가 소개된 적이 있다.(*)
동십자각 아래의 개천
삼청동에서 경복궁 동쪽을 따라 흐르는 삼청동천(중학천)에는 60년대까지만 해도 빨래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전남 곡성에 있었던 관음사의 원통전(圓通殿)
관음사는 백제의 분서왕(汾西王, 재위 298~304)때 창건되었다고 해 해방후 국보 273호로 지정되었다. 그러나 아쉽게도 한국전쟁 중에 소실돼 버렸다.
최근 수리에 들어간 경주 불국사 석가탑(釋迦塔)의 신구 모습
후지타가 이 사진을 찍을 무렵에 이미 상륜부의 상당 부분이 없어져 있었다. 오른쪽 사진의 상륜부는 1973년 실상사 삼층석탑을 본떠 복원한 것이다.
장흥 보림사의 철조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
대적광전에 모셔진 비로자나불의 후불 탱화는 일제때의 것은 사라지고 언젠가 지금의 것으로 바뀐 것을 알 수 있다. 한국전쟁 때 이 절의 많은 전각들이 불탔다고 하는데 당시의 피해인지도 모르겠다.
평안북도 강계의 인풍루(仁風樓) 모습
강계 읍성의 부속 건물로 군사를 훈련하고 사열하던 곳이다. 조선시대 중기의 화가 한시각(韓時覺)이 그린 <북새선은도(北塞宣恩圖)>에 보이는 무과를 치르던 광장이 아마도 이랬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 누각에는 인풍루 현판 양쪽에 진변루(鎭邊樓)라는 현판이 하나씩 더 걸려 있는 점도 특이하다.
평양 대성동의 대성산성에 있는 광법사(廣法寺)의 대웅전 앞 8각5층 석탑
고구려때 창건된 절로 1727년 중건되었으나 한국전쟁 때 대부분 파괴됐다고 한다. 현재의 것은 1991년 복원되었다고 하는데 대웅전의 현판에 ‘동국명사(東國名寺)’라고 써있는 점이 이채롭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