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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래된 현대라는 옛 서화-<천재 화인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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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명 : 천재 화인열전 장 소 : 서울 포스코미술관 기 간 : 2012. 7.26 ~ 9.25


현대 한국미술의 뿌리를 거슬러 올라가면 거기에 한국 미술이 있다는 사실은 곧잘 잊고 지내는 일 중 하나다. 서울 포스코 빌딩 내에 있는 포스코 미술관이 그동안 국내외 현대미술 중심의 기획전에서 눈을 한국 미술로 돌렸다. 과거와 단절된 현대가 가능하겠는가 라는 물음인 것이다. 



정선(鄭敾) <백악부아암도(白岳負兒岩圖)  종이에 수묵 담채, 31.0x26.0cm 

하지만 근래 들어 국립박물관이나 유명 사립미술관이 아니고서는 한국 회화를 요령껏 설명하는 전시를 꾸미기가 힘든 것이 사실이다. 그래서 이 전시는 시중 개인소장가의 작품을 중심으로 조선시대 후기에 활동한 유명 작가의 작품에 포커스를 맞춰 꾸몄다.



김홍도(김홍도) <산사귀승도(山寺歸僧圖)> 종이에 수묵 담채, 27.5x32.2cm 

조선시대 후기의 그림은 크게 몇 가지 흐름으로 나눌 수 있다. 정선 화풍, 중국 화풍, 김홍도 화풍 그리고 추사가 지향했던 고도의 문인화풍이다. 이 전시에는 적은 작품수임에도 불구하고 볼거리로서 이런 갈래 중 겸재 정선이 창안한 금강산 그림의 유행과, 소위 그림으로 시를 썼다고 할 만한 김홍도 유행의 몇몇을 소개하고 있다.

 

  
최북(崔北) <헐성루망금강도(歇惺樓望金剛圖)> 비단에 수묵 담채, 31.5x61.2cm       


1935년에 찍은 혈성루 사진(임병목 엮음 『금강산』에서)

최북은 여행도 여러 번하고 또 구룡폭포에 뛰어들어 죽겠다는 일화도 남겼지만 정작 남겨진 금강산 그림은 그리 많지 않다. 정양사 앞 혈성루는 누대이기는 하지만 계단 몇 개 있는 정도의 높이이다. 하지만 여기에 오르면 금강산 마흔일곱개 봉우리가 다 보인다고 한다. 일제시대 때는 나무로 깍은 모형을 세워놓고 설명을 도왔다는 얘기도 있다. 백분을 칠한 흰 바위산과 먹을 많이 쓴 흙산의 구분은 정선 스타일이다. 

 

 
강세황(姜世晃) <금강산 비홍교도(金剛山 飛虹橋圖)> 종이에 수묵 담채, 25.5x47.0cm

18세기후반의 비평가 강세황을 보면 정선의 진한 먹 사용을 좋아하지 않은듯한 뉘앙스가 있다. 비홍교는 정선의 장안사 그림의 상징물인데 여기서는 다리를 중심으로 시점을 바꿨다. 산사는 그래서 나무숲에 파묻힌 것처럼 보일동 말동이다. 멀리 바위산에 백분을 칠하지 않고 푸른 색으로 처리한 것도 그가 주장했던 남종화식이라고 할 수 있다.   

 

정황(鄭榥) <금강산 보덕굴(金剛山 普德窟)> 종이에 수묵 담채, 37.0x27.0cm  

정선의 손자인 정황은 격세유전이란 말처럼 정선을 닮은 그림들을 많이 남겼다. 하지만 큰 나무 그늘에서 벗어나려는 노력도 간간히 보였는데 이 그림은 바로 그런 증거랄 수 있다. 흔히 보덕굴 그림은 열아홉 마디로 된 구리 기둥에 떠받치는 기이한 암자가 중심이 되는게 일반적이다. 그에 비하면 이 그림은 보덕굴을 한 쪽으로 밀어놓고 가을 단풍에 물든 바위 모습을 금강산 연봉을 배경으로 그리고 있다.  
     

 
정수영(鄭遂榮) <단발령도(斷髮嶺圖)> 종이에 수묵 담채, 31.0x37.0cm 

단발령은 철원쪽에서 내금강으로 들어갈 때 거치는 곳이다. 이곳 마루에 올라서서 금강산을 바라보면 누구나 머리를 깎고 산에 들어가고 싶은 마음이 든다고 해서 이름 지어졌다고 한다. 울창한 숲길을 지나 산마루에 오르면 운해를 건너 보이는 흰 바위산 연봉은 정선의 창안(創案)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드릴처럼 뾰족하게 꼬인 바위봉우리 표현은 정수영 바위의 한 특징이다.  


이명기(李命基) <산수인물도(山水人物圖)> 종이에 수묵 담채, 51.0x35.0cm  

이명기는 당시 대단했던 초상화가이다. 김홍도와 함께 서직수 초상을 그린 게 있는데 대화가 김홍도도 얼굴 그리기는 그에게 양보했을 정도이다. 초상 이외의 그림은 많지 않다. 전하는 그림을 보면 김홍도의 영향이 짙다. 이 그림 역시 그 흔적이 짙어 중국식의 의복선 처리와 인물 표정을 보면 영낙없는 김홍도이다.    
  


김석신(金碩臣) <고승한담도(高僧閑談圖)> 종이에 수묵 담채, 31.0x36.0cm

풍속화가 김득신의 동생인 김석신은 출계해 큰아버지 김응환의 양자로 들어갔다. 김응환은 김홍도보다 3살 연상으로 도화서에서 한솥밥을 먹었은 것은 물론 1788년에는 정조 명으로 나란히 금강산과 영동 일대를 돌아다니며 사생 여행을 하기도 했다. 그런 그의 양자였던 만큼 김홍도의 화풍이 전해진다고 해서 이상할 것은 없다. 바깥에서부터 짧게 치고 들어가는 나뭇가지 그리는 법이 단원을 닮았고 산의 흙 주름선에 덧대 농담이 다른 먹으로 입체감을 나타내는 것도 그렇다. 특히 뾰족하게 각진 스님의 뒤통수는 김홍도의 걸작 <염불서승(念佛西昇)>을 연상시킨다.(*)          

 

 

 

글/사진 SmartK
업데이트 2024.11.19 15: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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