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명: 박연희 展 장소: 트렁크갤러리 기간: 2012.5.03~5.29
전통을 잇다: 현대 한국미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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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연희 <무념처(無念處)>, ARCHIVAL PIGMENT PRINT, 110X80CM, 2009
나는 사찰 가기를 즐겨한다. 지방으로 작가작업실을 자주 다니는 편인데 그럴 때마다 근처에 좋은 절이 있으면 반드시 가고자 했다. 그렇게 해서 꽤 많은 절을 다녔다. 불교신자도 아니면서 절을 순례하듯이 다니는 이유는 우선 그 절터가 좋아서이고 자연과 함께 한 소박한 사찰건축이 더없이 아름답기 때문일 것이다.이는 물론 옛 절에 해당한다. 사찰을 미술작품처럼 대하면서 완상하는 것도 직업병이 도저서이겠지만 실은 이런 산 속에 나를 처박고 싶다는 마음이 강해서 일 것이다. 번잡하고 소모적인 일에 휘둘려 정신없이 지내다가 문득 사찰에 오면 이 고요와 한가함에 죽고 싶을 때가 있다. 그러니 내게 사찰 가는 것은 버거운 일상에 숨구멍을 내는 일이자 모든 허망하고 요사스런 욕망에 브레이크를 거는 일이다.
<무념처(無念處)>, ARCHIVAL PIGMENT PRINT, 110X80CM, 2009
<무념처(無念處)>, ARCHIVAL PIGMENT PRINT, 110X80CM, 2009
더러 선방을 엿볼 때가 있다. 어쩌다 주지스님에게 차 대접 받는 일도 있는데 그럴 때면 그 스님의 방이 새삼스럽게 다가왔다. 사실 그런 방보다야 스님들이 공부하는 방, 이른바 선방 풍경이 압권이다. 텅 빈 방에 홀로 앉아 참선에 드는 모습이 그렇게 보기 좋을 수가 없다. 아니 그보다는 그 빈 풍경, 최소한의 것들조차 용납하지 않는 방 풍경이 더없이 서늘하고 매혹적이다.
<무념처(無念處)>, ARCHIVAL PIGMENT PRINT, 110X80CM, 2009
부끄럽지만 나는 너무 많은 물건들을 소유하면서 산다. 책과 문구류, 미술품과 함께 온갖 사물들이 연구실에 가득하다. 이 작고 남루한 몸 하나가 이토록 많은 물건을 탐닉하면서 산다는 게 죄악 같고 치욕스럽다. 그러면서도 소비자본주의에 깊숙이 중독된 나는 지금도 매일 무엇인가를 사들인다. 그러나 내가 죽으면 저 물건들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다. 엄청난 물건들로 가득 찬 내 연구실은 지칠 줄 모르는 소유욕과 경박한 탐미관, 유한한 물건들의 과시와 충족으로 만족을 삼는 가벼운 인간임을 드러내는 공간이다. 그래서인지 어느 날부터 나는 물건으로 가득 차 비좁은 연구실 공간이 나라는 인간의 본질을 드러내버리고 있다는 생각에 괴로웠다. 그러던 차에 스님들이 수행하시는 선방 사진을 보았다.
<무념처(無念處)>, ARCHIVAL PIGMENT PRINT, 110X80CM, 2009
선방이란 부처가 깨달은 자리를 순수하게 지키고 닦는 수선장 修禪場을 일컫는다. 공부하고 깨달음을 얻기 위해 용맹정진하는 방인데 그 방이 이토록 단촐하고 허정하다. 이 선방 사진을 보니 내 연구실 풍경이 너무 부끄럽다. 박연희는 그 선방을 흑백사진으로 담았고 무념처란 제목을 달았다. 작가는 말하기를 세속에서의 군더더기를 버리고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찾아가는 실천, 그 수행을 하는 수행자의 공간 처소를 담고 싶었다고 한다.콩기름을 먹인 장판, 창호문, 방석과 이부자리, 그리고는 겉옷 하나 걸린 이 적조한 방안의 풍경은 선기로 자욱하다.
<무념처(無念處)>, ARCHIVAL PIGMENT PRINT, 148X105CM, 2009
불가에서는 고요에 잠기는 공부나 경험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한다. 그래야만 본래의 자리로 돌아갈 수 있기에 그렇다. 따라서 최상의 실내장식은 오직 간결함, 무소유에 있다. 꾸밀수록 사람은 왜소해지고 허해지며 꾸밈없는 방이야말로 존재를 온전하게 하고 도드라지게 한다. 따라서 수행하는 이의 선방은 결국 그의 내면풍경이다.
수행하는 것은 궁극적으로 적멸락 寂滅樂, 그러니까 영원한 행복을 성취하기 위한 것이다. 그래서 스님들은 적조한 방에서 적게 먹고 공부하다 죽고자 했다. 수행자의 생명인 화두 하나를 들고 자신이 있는 그 자리, 그 시간에 몰입하며 정사찰 正思察에 빠져들고자 한 것이다. 나 역시 무서운 소유욕을 끊어내고 저런 방을 내 내면에 들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