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명 : 한국목판특별전 장 소 : 예술의 전당 서예박물관 기 간 : 2012. 6. 27 ~ 7. 22
한국 고문화는 나무의 문화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일상생활 용기에서 고도의 철학이나 학문을 집약, 전달하는 임무도 대개 나무에게 맡겨졌다. 일상용기는 목가구요, 목조 생활용기라면 뒤쪽은 서적 출판에 쓰인 목판이다.
<퇴계선생문집 목판(退溪先生文集 木版)> 1600년 54.2x21.0cm
목판이 문화 중에서도 고등 문화에 속하는 것임을 소개한 전시가 바로 이 기획이다. 한국의 목판 문화는 뿌리가 깊은데 올라가면 세계 최고의 인쇄물인 <무구정광대다라니경>까지 갈 수 있다.
<선조어필 선자(宣祖御筆 善字> 77.0x123.0cm
옛 고택에 걸려있던 현판 역시 나무에 새긴다는 점에서 목판의 한 계열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현판은 출판용 목판과는 또 다른 심도와 영역을 지닌 고전 문화의 보고랄 수 있다. 개인이 살던 집은 크건 작건 매일같이 드나들게 마련이다. 따라서 현판은 주인의 마음이자 정신이다.
<가무보물 보물유청백(五家無寶物 寶物惟淸白)> 43.0x46.0cm
연산군때의 청백리 조선초기 김계행(金係行, 1431-1531)이 만년에 안동 길안의 집에 걸어두었던 현판이다. <가무보물 보물유청백(五家無寶物 寶物惟淸白)>이란 ‘ 우리 집에는 보물이라곤 없다. 있다면 그것은 오직 청백의 정신 뿐이다’라는 뜻이다. 새로 떠서 요즘 TV에 나오는 정치가 집에 보내주고 싶은 글귀가 아닐 수 없다.
<백세청풍(百世淸風)>
듬직하게 큰 이 현판은 원래 중국에 있던 것이다. 정탁이란 분이 명나라에 사신으로 갔을 때 백이숙제 사당에 걸려있는 것을 탁본해온 것을 아들 청풍자라는 호를 쓴 정윤목(鄭允穆, 1571-1629)이 새겨 걸었다.
<몽선각(夢仙閣)> 121.0x61.0cm 의성김씨 월탄 종택
18세기 초의 문인 월탄 김창석(金昌錫, 1652-1720)이 꿈속에 소동파를 만났는데 그것을 인연으로 정자에 붙인 현판이다. 휘갈겨 쓴 초서는 본인의 글씨인데 그는 초서의 대가 장욱(張旭)의 글씨를 잘 썼다고 한다.
<도산서당(陶山書堂)> <농운정사(隴雲精舍)> 26.2x58.0cm 31.0x60.2cm 도산서원 운영위원회
퇴계 이황(李滉, 1501-1570) 선생이 61살 때 도산 서당을 창건하면서 직접 쓴 글이다. 순임금과 도연명의 인품을 흠모해 지은 이름이라고 하는데 산자는 상형문자로 구성한 것이 이채롭다. 도산 서당의 유생들이 기숙하던 곳의 편액이 농운정사이다. 뜻은 흰 구름이 머무는 언덕으로 역시 도연명의 글귀에서 따온 글이다.
<백운정> 1568년 146.0x71.0cm 의성김씨 운천종택
조선중기 전서의 대가 미수 허목(許穆, 1595-1682)의 글씨로 퇴계 문인 김수일(金守一, 1528-1583)이 건립한 정자의 편액이다. ‘높은 산에 올라가 흰구름 바라보니 그아래 부모님 계시네’라는 시에서처럼 백운의 다른 뜻에는 부모님이 있다. 이 정자 마루에 오르면 동네가 보이고 서쪽으로 선영이 보인다고 한다.
<담락재(湛樂齋)> 97.0x41.0cm 예안이씨 체화정 주손가
안동 풍산에 있는 체화정(棣華亭)의 서재 편액인데 대화가 김홍도가 쓴 글씨이다. 담락(湛樂)이란 말은 형제간에 우애로 인한 즐거움을 가리키는 말이다. 김홍도는 1786년 안기 찰방을 마치고 한양으로 가단 중에 이 글을 썼다고 한다.
<오헌(吾軒)> 131.0x56.5cm 반남박씨 오헌고택
영주에 있는 반남 박씨 오헌 박제연(朴齊淵, 1807-1890) 고택의 당호이다. 오헌이란 바로 우리 집이란 뜻. 내 집에 내가 산다는 간결명료한 의미인데 원래는 도연명이 ‘새들도 깃들 곳을 기뻐하듯 나 또한 내 집을 사랑하노라’에서 나온 것이라고 한다. 글씨는 구한말 개방파 관료학자인 박규수가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