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명 : 정약용 탄생 250주년 전 장 소 : 예술의 전당 서예박물관 / 강진군 다산기념관 기 간 : 2012. 6. 16 ~ 7. 22 / 2012. 7. 28 ~ 8. 5
그를 가리켜 흔히 한국의 루소요, 동양의 몽테스키외라고 한다. 잘 알다시피 루소(1712-1778)는 인간은 태어날 때는 누구나 다 평등했다는 주장을 한 프랑스 계몽주의자이고 몽테스키외(1689-1755)는 전제 군주의 절대권을 부정하고 법에 의한 통치를 주장한 장본인이다.
여유당 전집 속의 <목민심서> 중 세법(稅法)을 논한 부분
다산 정약용(1762-1836)가 이들에 비견되는 이유는 당시로는 과격하기 이를 데 없는 주장을 한데서 비롯된다 할 수 있다. 즉 임금이 문제가 있으면 갈아 치울 수 있고 목민관도 시원치 않으면 바꿀 수 있다고 그는 주장했다. 이런 주장은 그의 불행한 귀양살이, 정치적 소외의 씨앗이 되었다. 말하자면 그의 천재는 시대를 너무 앞서간 데에서 비극을 잉태한 것이다.
이 전시는 조선시대 후기가 낳은 미완의 대천재의 탄생 250주년을 기리며 꾸며진 전시이다. 이 大사상가를 조명하는 방법은 실로 무궁할 것이다. 그러나 이곳의 특성상 그의 자필 원고, 필적 그리고 그림을 중심으로 그의 세계를 조명했다.
정약용(丁若鏞, 1762~1836), <매조도梅鳥圖>, 1813년, 44.7×.18.4cm, 고려대박물관 소장
자작시 다음에 그림을 그리게 된 유래를 적고 있다.
嘉慶十八年 癸酉 七月十四日 冽水翁書于茶山東庵
가경십팔년 계유 칠월십사일 열수옹서우다산동암
余謫居康津之越數年 洪夫人寄敝裙六幅 歲久 紅渝
여적거강진지월수년 홍부인기폐군육폭 세구 홍유
剪之爲四帖 以遺二子 用其餘 爲小障 以遺女兒
전지위사첩 이유이자 용기여 위소장 이유여아
가경 18년 계유년 7월14일에 열수옹이 다산 동암에서 쓰다.
내가 강진에 귀양살이 한지 여러 해가 지났을 때 부인 홍씨가 헌 치마 6폭을 보내왔는데
세월이 오래돼 붉은 빛이 바랬다.
잘라서 첩 4권을 만들어 두 아들에게 주고 그 나머지로 족자를 만들어 딸자식에서 남긴다.
에피소드이지만 그의 진필에 관해 잠깐 언급하면, 완벽을 요구하는 천재들의 습벽대로 다산 역시 끊임없이 원고를 고치고 수정했다고 한다. 이때 주변 제자들에게 정서(淨書)를 부탁했고 팔이 아프면 시키기도 했다. 그래서 미간행 필사본에는 그의 진필로 쓰여지지 않은 것도 더러 섞여 있다고 한다.
다산이 쓴 대자로 쓴 사언고시(四言古詩) 병풍중 한폭
내용은 구전지숙 만세장청(九轉之熟 萬歲長靑) 다산 병객(茶山病客)이다.
그의 글씨는 왼쪽에서 붓을 집어넣을 때 특히 힘을 준 특징이 있는데 전체로 보면 대학자답게 전반적으로 유려한 가운데 단정하게 끊어 쓴 맛이 있다. 작은 글자의 대표작은 부인의 치마폭 위에 그림과 사연을 써서 딸에게 준 <매조도(梅鳥圖)> 상의 글씨이다. 대자는 병풍에 시를 쓴 것으로 과연 여기에도 유려하면서도 짙은 개성이 느껴진다.
그림쪽은 <매조도>를 보면 솜씨가 보통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매화 핀 가지 위에 작은 새 두 마리의 새 모습은 사생에 기초한 것처럼 사실적이다. 당시 시대는 중국취미가 범람하던 시대로 인적 없는 강가에 나무 몇 그루 서 있는 쓸쓸하기 이를 데 없는 그림이 유행하던 때였다. 그는 그 많은 저작 속에서 그림에 대해 구체적인 언급은 일절 하지 않았다.
다만 세도집안인 남양홍씨 출신으로 정조의 사위였던 홍현주의 소장품으로 보이는 그림에 시를 부친 것이 몇몇 한다. 시의 내용은 단지 그림 속 풍경에 대해 읊고 있어 인사치레인 듯한 아쉬움이 있다.
정약용 제시화(題詩畵) <열상산수도(冽上山水圖)> 27.0x33.8cm 개인소장
疑有天風到此間 의유천풍도차간
草岸小亭誰作者 초안소정수작자
瀑泉聲出對頭山 폭천성출대두산
冽樵 열초
사각사각 구름 낀 숲에 높은 산 열리니
아마도 바람이 불어 이곳으로 이르게 했겠지
풀언덕 작은 정자 누가 지었나
폭포샘 소리가 두산에서 들려오네
(*서예박물관 도록 인용)
이 전시에는 다산이 초의 선사(1786-1866)의 초대를 받아 영암 월출산 아래 백운동 계곡에서 한때 야유(野遊)을 즐기며 지은 시와 그림이 들어있는 『백운동첩(白雲洞帖)』이 소개돼 눈길을 끈다. 두문불출의 비장품이라 영인본 소개인 점이 아쉬울 뿐이다.
초의 <다산초당도(茶山草堂圖)>, 1812년, 지본담채, 22.3x31cm, 개인 소장
첩속에는 초의 선사가 그린 희귀한 그림이 들어있다. 바로 다산이 11년간 유배생활을 보낸 초당을 그린 그림이다. 궁벽한 시골이지만 집 뒤로 산이 아담하게 감싸고 있고 앞으로는 연못도 있고 내가 흘러 자못 운치 있어 보인다. 사적으로 지정돼있는 강진의 다산초당 모습과는 크게 다르다.
요즘의 기와지붕은 말하자면 오늘날 취향을 고려한 서비스인 셈이다. 물론 다산을 보는 눈은 시대적이기 마련이다. 하지만 아무리 '과거'가 인기 없는 시대이기로서니 홍보도 그렇고 관람객도 그렇고 다산에게 이렇게 인색할 수 있을까 하는 마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