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명 : 사도세자 장 소 : 수원화성박물관 기 간 : 2012. 6. 1 - 7. 1
올해처럼 윤달이 들었던 그 해. 1762년 윤5월 13일, 양력으로 치면 8월 한 여름에 28세였던 사도세자는 뒤주 속에 갇혀 8일 만에 서거했다.
그로부터 250년이 지난 지금 수원화성박물관에서는 사도세자를 추모하는 전시가 진행중이다. 아들인 정조는 사도세자의 무덤을 수원으로 옮겨 현륭원을 조성하고 이 도시에 위치한 사찰인 용주사는 사도세자의 극락왕생을 기원하고 명복을 기리는 왕실 원찰로 창건되었으니 수원은 사도세자와 인연이 깊은 도시라고 할 수 있다.
<용주사 상량문>, 1790년,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3호, 용주사 효행박물관
정조의 명령에 의해 영의정 채제공이 직접 짓고 쓴 상량문으로 용주사의 창건냐ㅐ용과 국왕의 만수무강을 기원하는 내용이 담겨있다.
<청동향로>, 조선후기,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2호, 용주사효행박물관
용주사에 정조가 하사한 것이라 전해지는 행로로 목 부분 좁은면 중앙에 만세락(萬世樂)이라는 명문이 있다.
정조는 현륭원 참배 후 용주사에 행차할 정도로 관심을 쏟았으며, 왕실에서 제작한 용품을 하사하기도 하였기에 유물을 통해 그 시기의 우수한 문화를 살펴볼 수 있다.
<불설부모은중경 동판>, 1796년, 용주사 효행박물관
1796년 용주사에서 출간한 불설부모은중경의 동판본이다. 부모은중경에는 부모의 은혜가 무엇인지 10가지로 제시하고 은혜를 갚기위한 어려움을 8가지로 나누어 설명하였다.
<원행정리의궤도>, 1796년경, 국립중앙박물관
정조와 혜경궁홍씨가 수원화성으로 원행했을때의 장면을 그린 화첩으로 ,『일성록』에 의하면 정조가 김홍도로 하여금 화첩 제작을 상임케하여 이듬해 간행 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정조의 후원을 받았던 단원 김홍도 또한 용주사와 관련지어 언급되기도 하는데, <불설부모은중경 동판>의 변상도가 섬세한 인물묘사나 사실적인 원근법의 표현 등에서 김홍도의 작품으로 짐작되며 <용주사 대웅전 후불화>또한 김홍도가 참여했다고 보기도 한다.
<장조태봉도>, 1785년, 한국학중앙연구원장서각
사도세자의 태봉을 그린 어람용 태봉도
이번 전시는 사도세자의 생애와 활동을 재조명하는 최초의 전시인 만큼 사도세자와 관련한 유물을 한자리에서 볼 수 있다는 장점도 있지만 아버지인 영조와 아들인 정조와 관련한 자료를 함께 볼 수 있다는 점에서도 의미가 있다.
<집복헌유감시 현판>, 1735년, 국립고궁박물관
창경궁 집복헌에서 사도세자가 탄생한 기쁨을 영조가 시로 읊어 새긴 현판
영조는 1남인 효장세자를 잃고 42세의 늦은 나이에 사도세자를 얻었는데,『맹자』에서 이르기를 불효 셋 중에 후손을 두지 못하는 것이 가장 큰 죄라고 했다하니 후계자를 두지 못한 한 나라의 임금인 영조에게 사도세자는 큰 기쁨이자 희망이었을 것이다.
<책봉교명 상자>, 1736년, 국립고궁박물관
왕세자에 책봉하는 왕명 문서와 책봉 교명을 보관했던 상자
영조는 사도세자가 탄생했을 때 그 기쁨을 시로 읊어 현판에 새기기도 하였으며 2세 때 왕세자에 책봉되었을 때는 책봉 교명과 상자, 주객 등을 하사하기도 하였다.
<동궁보묵>, 1743년,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사도세자가 8세때 쓴 글씨를 모아 엮은 필첩
<어제자성편>, 1746년, 수원화성박물관
영조는 사도세자에게 교훈을 주기 위해 경전과 역대 사서에 기록된 성군들의 정치이념 가운데 모범이 될 만한 내용을 선별하여 수록하였다.
<어제정훈>, 1749년, 수원화성박물관
8세 때는 입학례를 올려 시강원에서 교육을 받았는데 부왕인 영조에게도 많은 가르침을 받았다. 영조는 사도세자에게 교훈을 주기위해 <어제자성편>을 편찬하기도 하였으며, 요순과 같은 성군이 될 것을 독려하기 위해 <어제훈서>를 짓기도 했다. 또한 사도세자가 대리청청을 시작하는 1749년에는 치도의 방편을 10조목으로 나누어 훈계한 <어제정훈>을 짓기도 했다.
사도세자 묘지, 1762년, 국립중앙박물관
영조가 지은 사도세자의 묘지로 탄생부터 서거까지의 주요 일들을 연대기식으로 정리하였다.
그러한 아들을 뒤주에 가둬 죽게 한 이유로는 두 가지 견해가 있는데, 정신질환에 의해 왕세자로서의 자격을 상실했다는 의견과 사도세자가 소론 지향적이었기에 노론에 의해 제거되었다는 당쟁의 희생물로 보는 의견이 그것이다.
<홍봉한 초상>, 19세기, 경기도박물관 <사도세자 간찰첩>中 혜경궁 홍씨를 세자비로 맞이한 후
장인 장모에게 보낸 첫 편지
<왕세자 휘지>, 1749년, 국립중앙박물관
사도세자가 대리청정 당시 명령을 내릴때 사용했던 증표로 앞면에는 휘지, 뒷면에는 영조의 어압이 음각되어 있다.
<예제 시민당 초본>, 1749-1758, 한국학중앙연구원장서각
사도세자는 대리청정을 시작한 1749년 전후부터 약 10년 동안 지은 시문을 엮었는데 <예제 시민당 초본>과 <능허관만고>가 있다.
사도세자는 10세가 되던해 홍봉한의 딸이자 훗날 정조의 어머니인 혜경궁홍씨와 가례를 올렸고, 15세가 되던 해인 1749년 부터는 대리청정을 시작했는데,『영조실록』에는 이 무렵부터 사도세자에게 병이 생겼다고 기록되어 있다.
<경현당 어제어필 화재첩>, 1741년, 서울시유형문화재 제175호, 서울역사박물관
1741년 6월 22일 영조가 경희궁 경현당에서 사도세자를 시좌시킨 가운데 승정원과 홍문관의 관원들을 불러 경연을 시행한 사실을 기록한 것으로 중앙에 영조의 어좌를 표현하고 우측에 사도세자의 자리를 배치하였는데, 영조와 사도세자가 한 화폭에 등장하는 그림으로는 유일하다.
어떤 이유에서건 아들을 죽게한 아버지의 마음은 오죽했겠으며,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잃고 장례과정에 거의 참석할 수 없었던 정조의 충격 또한 이루어말하기 힘들 것이다. 게다가 왕실에서 일어난 일인지라 사료를 통해 현재까지 전하고 있으니 조선 왕조의 비극 중에 빼놓을 수 없는 사건이라고 할 수있다.
장조옥보, 1899년, 국립고궁박물관
고종황제가 '신문환무장헌광효((神文桓武莊獻廣孝)'라는 시호를 올리고 만든 사도세자의 옥보로
장조라는 시호는 "덕이 훌륭하고 예절이 공손하며 성스럽고 신성하여 아름답다"라는 의미를 지닌다.
사도세자의 죽음 이후 영조의 명에 따라 사도세자의 평가를 거론하는 것은 역모에 해당되었으며 정조가 즉위한 해에는 신원과 추숭에 대한 상소가 올라왔을 때 사형과 유배형에 처하기도 하는 등 고종대인 1899년 사도세자가 장조(莊祖)로 추숭될 때까지 조정에서는 사도세자에 대한 논의가 진행될 수 없었다고 한다.
장조 옥인, 1762년, 국립고궁박물관
영조가 사도라는 시호를 내리면서 제작한 옥인으로 인면의 내용은 사도세자지인(思悼世子之印) 이다.
<진하도>, 1783년, 국립중앙박물관
1783년 정조가 사도세자와 혜경궁 홍씨에게 존호를 올린 행사를 기념하고자 제작한 8폭병풍
이 사건에 대해 영조는 뒤늦게 후회하며 사도(思悼)라는 시호를 내렸고, 정조는 즉위하자마자 사도세자의 수은묘를 영우원으로 격상하여 봉원하고 수원화산으로 옮긴후 현릉원을 왕릉에 버금가게 조성하였다. 또한 총 4차례의 존호를 올렸는데, 1795년에는 국왕에게 올리는 8자 존호를 올려 국왕과 같은 대우를 받게 하는 등 정조의 효성이 지극했음을 알 수 있다.
아직도 사도세자의 삶과 죽음에 대해서는 여러 의견이 분분하고 비운의 세자로 기억되지만, 살았을때는 왕세자로, 죽어서는 황제위까지 추존되어 명예를 얻은 사도세자에 관해 여러가지를 생각해 보게끔한다는데 이 전시의 의의가 있다고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