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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레이존 서화가에 대한 재조명-<윤용구 특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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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명 : 윤용구 특별전 장 소 : 김종영 미술관 기 간 : 2011년12월15일~2012년3월18일


오랜 평화에 익숙해 급격하고 전면적인 사회적 패닉이란 것을 상상하기 힘들어지게 됐다. 천재지변 같은 것이 없지는 않지만 언제나 인재라고 우기고 있으니 논외이다. 어쨌든 전쟁도 그랬겠지만 100년전 한일 합방은 엄청난 충격이었을 것이다. 오백년이나 지속되던 사회 제도나 시스템이 하루아침에 붕괴졌을 것이다. 또 속의 문제로 당시 사회를 내면에서 떠받들고 있었던 효제충신(孝悌忠信)의 4각 기둥 중 일부도 무너져 내렸다고 봐야한다.
추측하건대, 대한제국이 망해 넘어가는 것을 번연히 지켜보면서 많은 사람들이 정수리 한가운데를 ‘꽝’하고 쇠망치로 세게 얻어맞은 듯이 오래도록 멍한 상태를 경험했을 것이다.


<임문형산필의 산수(臨文衡山筆意 山水)> 31.5x27cm 종이 개인소장

지위가 높든 낮든 조선 왕조에 관리로 출사했던 경력자들은 이후 심한 트라우마를 겪었다고 봐야한다. 능력 있는 조정 관료는 물론이요 견실한 유교 학자였을수록 시대와의 부정합(不整合)은 더 컸을 것이다. 그래서 이들의 이후 삶은 혼란에 혼돈의 연속이었던 것 같다. 미래는 의리상 발을 들여놓을 수 없고 그렇다고 과거는 이미 안식처가 아니게 된, 그래서 이도저도 아닌 그레이존에 머물러야만 사람들. 그 시대에 존재했던 상당수의 서화가들 역시 딛고 서있던 자리가 바로 이 그레이존이었다.

 
<방심석전필의 산수(仿沈石田筆意 山水)>(화첩) 16.5x2.45cm 국민대박물관 소장

정대유, 지운영, 김응원, 윤용구, 박기양, 김돈희, 박영효, 강필주, 황철, 김규진, 이도영 등. 이들은 대부분 침묵으로 세월을 보냈다. 가능한 것은 서화로서의 자오(自娛)뿐. 밖에서 볼 때는 은퇴거사였다. 흑이냐 백이냐를 다그치기 좋아하는 이 땅의 성격상 그레이존의 사람들은 성에 차지 않고 싱거울 뿐이었다.


<목송귀홍(目送歸鴻)>(화첩) 17.5x19.5cm 국민대박물관 소장

미술사에서 한 시절이 뭉텅 잘려나간 이유도 이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이즈음에 석촌 윤용구(1853~1939)에 대한 조명은 그런 점에서 상투적이고 중민(衆民)적인 시각에 대한 반성이라 할 수 있다. 자세한 행장을 전제로 작품을 소개하고 있는 점에는 적이 고개가 끄떡여진다.


<노룡금 묵죽(老龍唫 墨竹)> 37.5x65cm 개인 소장

단, 이 전시는 특별전이라 했지만 단독으로 열린 전시는 아니다, 조각가 김종영 가문의 내력을 소개하는 ‘창원 생가전’의 한 특별이벤트로 마련됐다. 그가 이 전시에 합석하게 된 이유는 은퇴거사로 장위동에 물러나 살고 있을 때 과거 조정에서 나란히 고종을 모셨던 김영규(조각가 김종영의 증조부)의 초대로 창원에 내려와 별채에 사미루(四美樓)라는 현판을 써준 인연 때문이다.


<사미루(四美樓)> 현판
정섭(鄭燮)은 변하지 않는 4가지 난, 죽, 바위, 사람을 아름답다고 했다.
 

해평윤씨 명문에서 태어난 윤용구는, 순조의 넷째딸인 덕온옹주를 맞이해 남녕위(南寧尉)가 된 작은 아버지 윤의선에 양자로 들어가 국척이 된 문신이다. 스스로는 과거에 합격해 이조, 호조판서까지 올랐다. 이후에도 지근 거리에서 고종황제를 보필하였으며 1907년 고종의 퇴위와 함께 선산이 있는 장위동에 은거하며 은둔 생활을 보냈다. 비록 삼일독립선언문 발기인에는 참가하지 않았지만 일제가 제시한 일체의 회유-작위, 은사금 등-를 거부했다. 그리고 거문고와 바둑을 두는 이외에 글씨를 쓰고 그림을 그리는 과거의 문인 생활에 몰두했다. 그림의 소재는 대부분 사군자였다. 


<초벽석난도(峭壁石蘭)>(화첩) 18.5x25.7cm 개인 소장

난초를 치는 여러 기법 가운데 도수난과 노근난이 있다. 도수난(倒垂蘭)은 거꾸로 드리워진 난이고 노근난(露根蘭)은 뿌리를 드러낸 난이다. 몽골 지배하의 원나라 시대, 난을 치던 중국 사대부가 오랑캐의 땅에 발을 대기 싫다고 해서 그린 게 노근난이라고 한다. 그의 마음이 의탁된 심화(心畵)의 일부라고 보아야 할 대목인 듯하다.

 
(<운당 산수(雲塘山水)> 21x26cm 개인 소장

또 개중에는 물을 바른 위에 먹이 번지는 효과를 노린, 이른바 발묵 기법에 강한 선으로 섞어 한적한 동리 모습을 그린 수채화 같은 느낌의 그림도 있다. 새로운 시대를 예감케 하는 참신함이 담겨있는데 지금까지 단 한 점만 알려진 점이 아쉽다. 그는 서화을 칠 때에는 청대 양주팔괴의 한 사람으로 근대로 통하는 감각적인 세계를 열어보인 정섭(鄭燮)을 따르려 애썼다고 하는데 그 맥락인 듯하기도 하다.


<매조도(梅鳥圖)> 25.5x27.5cm 개인 소장

그의 자는 주빈(周賓)이며 호는 석촌(石村, 石邨), 해관(海觀), 수간(睡幹), 장위산위(獐位山人) 등을 썼다. 

글/사진 스마트K
업데이트 2024.10.31 10: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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