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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하정웅 기증전-순종황제의 서북 순행과 영친왕‧왕비의 일생>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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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시 명 : 하정웅 기증전 - 순종황제의 서북 순행과 영친왕‧왕비의 일생 장 소 : 국립고궁박물관 기 간 : 2011. 11. 22 ~ 2012. 01. 31


황실문화는 TV에서나 볼 수 있는 것이기에 관심을 끌기 마련이다. 여기에 ‘마지막’ 이라는 말이 덧붙여진다면 그 관심은 배가 될 수밖에 없는데, 현재 국립고궁박물관에서는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태자인 영친왕과 왕비에 관한 전시가 진행중이라 눈길을 끈다. 

  

영친왕비와 친분을 유지했던 재일교포 하정웅선생이 기증한 유물을 선보이는 이번전시에서는「순종황제의 서북순행」사진첩과 영친왕 휴대용 수첩, 영친왕비 일기 등이 처음으로 공개되었다. 전시가 끝나기 전에 절판되어버린 도록은 이번 전시에 대한 대중들의 관심을 대변해 준다.


1907년 영친왕 (11세)

 
1911년 덕수궁 함녕전에서 고종과 영친왕

영친왕은 고종의 9남 4녀 중 일곱째 아들로 황태자에 책봉되자마자 11세의 어린 나이에 일본 유학길에 올랐다. 명분은 교육이었지만 실질적으로는 고종을 압박하기 위함이었으며, 일본은 이에 그치지 않고 1910년 한일강제병합 이후 왕세자로 격하시킨 후 일본의 황족 마사코의 결혼을 추진했다.


1920년 영친왕 부부의 결혼사진

일본은 아이를 낳기 어려운 체질을 가진 마사코를 영친왕과 결혼시켜 조선 왕실의 대를 끊어놓으려 했지만 마사코는 결혼 후 ‘이방자’라는 한국식 이름으로 개명하고 첫째 아들 진(晉)과 둘째아들 구(玖)를 얻었다.


1916년 8월 3일자「매일신보」의 약혼기사

영친왕의 약혼기사는 「매일신보」1면에 보도되기도 하였는데, 10년 전 약혼하였으나 일제에 의해 파혼이 결정된 사건으로 백성들은 분노하였으며,「독립신문」에는 영친왕이 원수의 여자와 결혼했으니 존칭을 폐하고 죄를 묻겠다는 내용이 실리기도 했다. 또, 일본은 영친왕을 중일전쟁에도 파견토록 했는데, 이 일은 일본여성과의 결혼과 더불어 영친왕이 친일세력이라 여기는 시선에 일조했다.  


1900년대 자동차를 타고있는 영친왕과 다케히토 왕, 이토히로부미

황족임에도 어린나이에 일본으로 가 귀국하지 못하고 늘 일본인의 감시를 받으며 지내야 했던 영친왕의 마음은 오죽했을까..영친왕이 다케히토 왕, 이토히로부미와 자동차에서 찍은 사진은 보는이의 마음을 서늘하게 한다. 영친왕의 첫째 아들 진(晉)의 사망에 일본이 왕가의 대를 끊기위해 저질렀다는 독살설 까지 제기되기도 하니 그저 '설' 이라고는 하나 당시 상황이 떠올라 안타까울 따름이다.


평양에 설치된 황제의 임시처소 전경


평양 만수대 정상에서 기념촬영 중인 순종 황제와 신료들


개성 만월대를 관람하고 내려오고 있는 순종 황제와 신료들


남대문(현 서울역)에서 순종황제와 순행단을 기다리는 환영 인파


순행을 마치고 창덕궁 인정전에서 기념촬영 중인 순종황제와 신료들

사진에 담긴 모든 모습이 눈길을 사로잡지만 이번 전시에서 또 하나 주목되는 사진은「 서북순행 사진첩」이 아닌지 싶다. 순종황제는 1909년 1월 27일부터 2월 3일까지 서북 지역을 순행하였는데, 고종황제의 퇴위와 군대해산으로 인해 전국적으로 반일 의병 항쟁이 격화되자 반일감정을 잠재시키고 일본 통감정치의 정당성을 보여주려는 의도하여 이토 히로부미와 일본 정부에 의해 치밀하게 계획, 추진된 것이었다. 그러나 도리어 애국심을 고취시키는 계기가 되었는데, 가는 곳곳 일장기 게양 거부 및 훼손이 일어났다. 평양, 의주, 신의주, 평양, 개성을 거쳐 돌아온 이 일정을 담은 총 62장의 사진은 이번에 처음으로 공개되었다.


1911년 덕수궁 석조전 2층 복도 난간에서 영친왕 일행


1911년 창덕궁 옥류천에서 영친왕 일행


20세기 초 창경궁 박물관 앞에서 영친왕 일행

영친왕은 1926년 순종이 붕어한 이후에는 이왕의 지위를 계승하였으나 1945년 일본의 패망 후에는 왕족의 지위가 박탈되고 한국과 일본 양국에서 국적을 인정하지 않아 무국적 생활을 하게 되었다.


1961년 2월 1일 영친왕 환국 촉구 알린문 및 서명문

1960년 4.19로 정권이 교체된 후 정부에서는 그의 환국을 촉구하였고 1963년 영친왕비와 함께 환국하게 되었다. 그러나 귀국할 때 이미 영친왕은 혼수상태였으며 끝내 회복하지 못한 채 1970년 서거하였고 영친왕비는 창덕궁 낙선재에 머물며 사회봉사 활동 등에 힘썼다.

영친왕비가 창덕궁 낙선재에서 사용했던 물품과 자수작품은 왕비의 정갈한 생활상을 보여주며, 고종이 승하한 후 비탄에 잠긴 심경과 나라를 잃고 인질과 같은 처지가 된 영친왕에 대한 안타까움이 묻어나는 왕비의 일기는 일본에 의해 성사된 영친왕의 결혼이 비운만은 아니었음을 짐작케 한다.


덕혜옹주가 영친왕에게 보낸 신년인사 엽서

이밖에 영친왕의 휴대용 수첩과 지인들과 주고받은 서신을 볼 수 있는데, 일제에 의해 강제결혼 등 삶이 순탄치 않았던 영친왕의 이복동생 덕혜옹주의 신년 엽서가 눈에 띈다. 덕혜옹주 또한 마지막 황녀였으나 고국으로 다시 돌아오는 것마저도 순탄하지 않았던 비운의 옹주였다. 다행히도 몇 년전 출간된 베스트셀러 소설로 인해 옹주의 삶이 좀 더 널리 알려지고 재조명 되어 많은 사람들이 덕혜옹주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인식할 수 있게 되었다.


1922년 순종 근현례식 기념사진 (덕혜옹주, 영친왕비, 윤황후, 순종, 영친왕, 이진)

이번 전시는 황실의 마지막 역사 기록이라는 점에서도 의미가 있지만 영친왕과 영친왕비가 겪었던 격동의 세월을 살펴볼 수 있어 역사를 되돌아보는 시간이 되었다고도 할 수 있다. 황실이라 하면 화려하고 귀족적인 느낌이 물씬 풍기지만 대한제국기의 마지막 황실은 아픔으로 얼룩져있다. 그러나 그저 아픔과 분노에서 끝내는 것이 아니라 이 또한 똑똑히 기억해야 할 우리의 역사이기에 이 전시에 관심가져야 하는 것은 강요할 수 없는 우리의 의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글/사진 스마트K
업데이트 2024.10.31 08: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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