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시 명 : 조선후기 산수화전 장 소 : 동산방 화랑 기 간 : 2011. 11. 29 ~ 12. 13
예전이라고 해도 그리 멀지 않은 때이지만 박물관 미술관이 예산이다 인원이다 해서 좀 옹색했을 적에 그 빈 칸을 메워준 곳이 화랑들이었다. 지금이야 ‘했으면 얼마나 했으려고’ 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당시 문턱이 낮았던 화랑들의 존재는 미술 애호가들에게 더없이 마음 편한 문화 시설이었다. 그런 과정에서 몇몇 화랑은 자연스럽게 실력과 안목을 인정받았는데 동산방 화랑이 딱 그런 화랑이라고 할 수 있다.
연강임술첩의 <우화등선(羽化登船)> 부분 1742년
말을 꺼냈으니 마무리를 짓자면 동산방 화랑이 사계에 실력을 인정받은 것은 조선시대 회화 가운데 낙관이 없는 그림들을 모아서 「무낙관 회화 특별전」을 연데 있다. 1881년과 1882년에 걸쳐 두 번 열었던 이 전시는 당시 대단한 화제를 불러 모았다. 그 무렵은 지금도 일부 그렇지만 낙관이 없거나 작자가 분명치 않으면 대개 거들떠 보려하지 않았다. 말하자면 통(通)이나 전문가들이나 오르는 무대라고 치부한 것이다. 그런데 이런 그림들을 잘 추리고 간수해 ‘무낙관 회화’라고 턱하니 이름을 붙여 별도의 무대에 만들었으니 허를 찌른 셈이고 실력을 발휘한 일이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연강임술첩의 <웅연계람(熊淵繫纜)>의 부분 1742년 연강임술첩의 정선이 쓴 발문 부분
그런 동산방 화랑이 열고 있는 전시가「조선후기 산수화전」이다. 지난봄에 이은 두 번째 전시로 지난 봄은 조선후기 회화의 다양한 면모를 보여주었다면 이번 전시는 산수화-약간의 인물도 곁들여-쪽에 초점을 맞춘 전시이다.
정선이 필운대에서 봄놀이하는 경치를 그린 <弼雲臺賞春> 27.5x33.5cm
화랑의 특성상 인정해야 하듯이 체계적인 전문성이나 연구를 전제로 한 전시가 아니다. 그보다는 오랫동안 이름이나 도판만 전할 뿐 실물은 좀처럼 보기 힘들었던 그림 아니면‘세상에 이런 것도’하는 미공개작이 초출(初出)하는데 이런 전시의 매력이 있다.
미공개작품 중 하나인 정선 산수화첩 속의 겨울 풍경. 25.9x39.4cm
하이라이트를 몇 열거를 해보자. 우선 첫 번째로 등장시켜야 할 것이 임진강의 옛 이름인 연강(漣江)에서 뱃놀이하는 모습을 그린 정선(1676~1759)의 <연강임술첩>이다. 이 그림은 당시 경기도 관찰사인 홍경보(洪景輔, 당시 51살)가 시를 잘 짓는 연천현감 신유한(申維翰, 당시 62살)과 그림을 잘 그렸던 당시 67살의 겸재 정선을 불러 임진강 중에서도 경치가 좋다는 우화정(羽化亭)에서 웅연(熊淵) 나루까지 40리(명지대 이태호교수는 답사후 15km 내외라고 했다)에 걸쳐 뱃놀이를 한 기록화라고 할 수 있다.
심사정이 원나라때 황공망의 필치를 본떠 그린 산수도.
<仿黃公望山水圖> 35.825.3cm
예전에 경치 좋은 절벽은, 적벽부를 지은 만고의 문인 소동파를 기려 흔히 ‘적벽(赤壁)’이라고 불렀는데 여기 임진 적벽도 그런 것이다. 홍경보 등의 뱃놀이가 동파의 문아한 활동을 기리는 것이었기에 애초에 임술년에 맞췄고(前적벽부는 임술년 7월16일에 쓰여졌다) 날짜는‘이 해 시월 보름에(是歲十月之望)’라고 시작하는 동파 後적벽부에 따라 음력 0월 보름으로 잡았다. 때는 1742년이었다.
신로는 이제까지 유복렬의 『한국회화대관』을 통해 단 한 점만 알려져 왔다.
풍속화풍의 작품의 미공개작. <추우오수(秋雨午睡)> 41x53.7cm
원래 명작에는 스캔들이 될 만한 스토리가 있는데 이 그림도 그렇다고 할 수 있다. 이 그림 뒤쪽에는 겸재 자신이 어떤 연유로 그림을 그리게 됐는지에 대해 쓴 짧은 글이 붙어 있다. 여기를 보면 관찰사가 현감에게 부(賦)를 짓게 하고 자신에게는 그림을 그리고 했다면서 3부를 그려 ‘각 집 한 부씩 가졌다(各藏一本于家)’라고 했다.
정수영(鄭遂榮)의 <하경 산수(夏景山水)> 24.5x16cm
말인즉 이 그림에는 동복형제 둘이 더 있는 셈이다. 세상에는 진작부터 그 하나가 그림+관찰사 글+현감 글+겸재 글이 다 갖추어진 형태로 알려져 왔다. 그러고선 이번에 바로 그 3점 중 다른 한 점이 나타난 것이다. 그림이 그려진 것가 1742년이므로 무려 270년이 흘렀음에도 여전히 세상에 나란히 전해지고 있다는데 가상한 생각이 들고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이인문(李寅文)의 미공개 화첩에 들어있는 봄꽃 감상그림 <賞花> 28x34.4cm
두 그림을 사진으로 비교해보면 필치하며 산세의 묘사 등에 있어 지극히 약간의 차이가 있다. 이 차이를 가지고 관찰사 것과 겸재가 가졌던 것을 구분하기도 한다.(간송미술관의 최완수 실장은 이번 공개된 것을 겸재 소장의 것이라고 했고 이태호 교수는 그 반대로 보고 있는 듯하다) 헌데 그와 같은 변별은 차치하고 67살의 나이에 2미터나 넘는 그림을 3점을 동시에 그리고 그것도 정교하면서도 웅장하게 그린 솜씨에 탄복하지 않을 수 없다.
이유신(李維新)이 중인들의 시모임을 그린 듯한 <포동춘지(浦洞春池)> 30x35.5cm
그림에는 저녁 무렵 우화정 어름에서 배에 오르는 데부터 임진 적벽을 주유하고 한밤중 횃불을 밝히고 웅연 정사로 가는 모습이 거친 데는 거칠게 부드러운 데는 부드럽게 그리고 섬세한 데는 극히 섬세하게 그려져 있다. 저녁에서 밤까지 행해진 일들이 마치 연결된 파노라마 사진이라도 보는 것처럼 이시동도법(異時同圖法)이 사용된 점도 볼거리이다.
이조묵(李祖默)의 푸른 산 아래에서 담소하는 그림. <翠山談笑> 17.5x22.4cm
‘산길에 비가 내지 않았는데 짙푸른 산이 옷을 적시네(山路元無雨 空翠濕人衣)’라는 왕유의 시귀가 씌여있다.
이외에도 하이라이트가 더 있는데 처음 소개되는 작품으로 거론하자면 겸재와 이인문의 의 춘하추동 화첩이 있고 18세기 전반에 활동한 것으로 여겨지는 문인화가 신로(申輅)의 채색화, 김복헌이 단원 김홍도에게 그려준 겸재 화법의 금강산도, 학산 김수철이 자연 속에서 유유자적하는 선비의 생활을 읊은 글을 그림으로 옮긴 연작 등등이 있다.
불현듯 ‘옛그림이 보고 싶다’고 해도 쉽게 갈 곳이 떠오르지 않는다. 서울이라 해도 국립중앙박물관, 리움 정도인데 이곳에서 한 번에 상설 전시중인 작품은 그저 30-40점 정도이다.(보존상의 이유가 있다. 그 외 몇몇 대학박물관이 있지만 찾아가기도 힘들 뿐더러 찾아가도 문을 열었는지 닫았는지 장담하기 힘들다)
전혀 알려지지 않은 미공개작을 포함해 오랜만에 흔치 않게 재소개된 작품까지 50여점이 소개되고 있다면 십분 양보해도 안복(眼福)을 즐길 수 있는 흔치 않는 기회라 할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