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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선시대 화가는 출장중-<중국사행(使行)을 다녀온 화가들>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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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시 명 : 중국사행(使行)을 다녀온 화가들 장 소 : 국립중앙박물관 기 간 : 2011. 10. 27 ~ 2012. 1. 15


해외출장이 지금시대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조선 시대에도 외교적 임무를 수행하기 위한 해외출장이 있었으니 바로 사행(使行)이다. 일본에 출장을 간 사행원을 조선통신사라고 했으며 중국에 간 사행을 명나라 때는 조천, 청나라 때는 연행이라고 했다. 오늘날에는 조공관계를 생략한 객관적인 명칭인 연행이라 표현하는데 이는 조천까지 포함하는 뜻이다.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서는 중국사행을 다녀온 화가들의 작품을 전시하고 있는데 이를 통해 새로운 세상을 접한 화가들의 작품세계와 그 당시의 사행로를 살펴볼 수 있다. 

중국으로 간 사행단은 정사 부사 서장관, 역관, 의관, 화원을 포함하여 3백 명 내외에 이르렀는데 이 중 화원은 도화서에 소속된 화원화가와 정사나 부사의 직책으로 다녀왔던 문인화가들이었다. 화원은 사행의 여정을 그리거나 그림, 지도 등을 베껴그리는 일, 새로운 기법을 배워오는 역할을 이행했는데 사행단에 반드시 포함되는 것은 아니었다. 이들은 육로와 해로로 이동했는데, 사행시기에 그려진 그림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항해조천도(航海朝天圖)》<선사포>, 조선 18세기.
 선사포는 항해 여정의 첫 번째 장면이다.

항해조천도는 1624년 인조의 책봉 승인을 명 조정에 주청하기 위해 떠난 사행의 여정을 그린 작품으로 바닷길 사행의 과정이 담겨져있다. 이와 같은 그림의 제작목적은 힘든 임무를 완수하고 돌아온것을 기념하기 위한것이기도 하지만 후에 사행 가는 이들이 참고할 수 있도록 하려는 목적을 지니고 있는데, 이덕형은 이 작품의 발문에 "후에 봉사로 바다를 건너는 이들에게 참고토록 하고자 함이다"라고 기록하고있어 험난한 여정에 도움이 되고자 했음을 알 수 있다.


강세황, <고목죽석도>, 조선 1784년
강세황이 청에 사행 갔을때 의주에서 그린 그림

이처럼 사행로를 화폭에 담는 등 연행시기에 작품을 남긴 대표적인 문인화가로는 강세황을 들 수 있다. 강세황은 중국의 첨단 문물을 직접 접하기를 소망하다가 1784년 부사 자격으로 청나라에 다녀왔는데 당시 나이가 72세였다. 이 시기 강세황은 사행가는 길에 접한 아름다운 경치를 화폭에 담아《사로삼기첩》과《영대기관첩》을 제작했는데 이휘지, 이태영 시가 함께 있어 이국땅의 풍경과 감회를 살펴볼 수 있다.


강세황,《영대기관첩》<영대빙희>, 조선 1784년.


<영대빙희> 부분도

“12월 21일에는 황제가 영대에서 빙희를 구경하였습니다. ․ ․ ․ ․ ․화살을 잡고 얼음에 꿇어앉아서 홍심을 쏘게 하였는데, 우리나라에서 말 타고 달리면서 꼴로 만든 표적을 쏘는 것과 같았습니다”  -『정조실록』, 정조 9년 2월 14일

《영대기관첩》은 총 9폭으로 구성된 작품으로 강세황의 자(字)인 광지(光之) 인장이 있어 강세황의 작품임을 알 수 있다. 가장 먼저 볼 수 있는 그림은 영대에서의 빙희 장면이 그려진 그림인데 영대빙희는 조선 사신들이 동지사로 북경을 방물할 때 빼놓지 않는 구경거리 였다. 스케이트를 타면서 활을 쏘는 무예의 모습은 귀국 후인 1785년 2월 정조에게 보고한 기록에도 남겨져 있지만 그림으로도 남겨져 있어 그 장면을 확인 할 수 있다.


강세황,《사로삼기첩》<계문연수>, 조선 1784년.


강세황,《사로삼기첩》<서산>, 조선 1784년.


강세황,《사로삼기첩》<고죽성>, 조선 1784년.

《사로삼기첩》은 배로타고 가는 길에 만난 세 가지 기이한 경치를 담은 작품으로 계주(薊州)의 계문연수(薊門煙樹)와 북경 이화원이 포함된 서산(西山), 산해관에서 계주를 가는 도중의 경치인 고죽성(孤竹城)순으로 그려져 있다. 이 작품에는 도장이 찍혀있지 않아 화가를 알 수 없지만《영대기관첩》과 비교했을 때 화풍이나 화첩의 사이즈가 같아 강세황이 그린작품으로 여겨진다.


주학년, 김정희에게 보내는 편지, 청 1831년경.

한편 조선의 지식인들은 청나라 지식인들의 문화와 생활방식에도 관심이 높았기때문에 사행을 통해 지식과 정보가 공유되었는데, 조청 교류의 중심에는 경화세족과 역관이 존재했다. 이를 주도한 인물로는 김정희를 들 수 있는데, 어린 시절부터 중국 학계와 예술에 대한 정보를 접했으며 24세 때의 연행에서 옹방강을 비롯한 청나라의 명사들을 만나 교유했다.


<소동파입극도>, 조선 19세기.

김정희가 주도한 청나라와의 교류를 통해 서화가 교류되기도 했는데, 동파(東坡), 소식(蘇軾)상을 조선에 유입시키기도 했으며 조선에서 새로운 매화그림이 탄생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기도 했다.


조희룡, <매감도>, 조선 19세기.

매화를 사랑한 오숭량은 장심에게 매화그림을 그리게도 했는데 현재 전하고 있지는 않지만 장심은 김정희에게 매화그림을 그려 보냈다. 김정희의 제자인 조희룡의 매화그림에는 장심의 매화그림에 대해 언급이 있어 이 작품을 바탕으로 새로운 <매감도>를 제작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장목, 세한도 발문 및 제첨, 청 1845년.

김정희와 연경의 문인들의 교류는 사행이후에도 지속되었는데,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세한도>의 제발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제자 이상적은 연행에 김정희가 그려준<세한도> 를 지참해 가 중국 문인들에게 제발을 부탁했는데, 김정희의 서화를 수장하거나 김정희의 명성을 들은 이들의 제발도 함께 전하고 있다.


《용만승유첩》<압록강범주도>, 조선 1723년.
 1723년 원접사가 된 조태억의 중국과 조선의 국경에 위치한 의주지역 유람을 기념하여 제작된 화첩.


《천고최성첩》<도원도>, 조선후기.

한편 조선에서 연행사가 파견된 것처럼 중국에서도 사신을 파견했는데, 중국사신을 맞이하는 일을 맡은 관원들은 이를 기념하기 위해 그림으로 남기기도 했으며 사신에 의해 회화가 전래되기도 했다. 대표적으로 1606년에 사신으로 온 주지번은 중국화가의 그림과 중국문사의 글로 구성된《천고최성첩》을 전했는데 조선화가에 의해 모사된 작품이 전하고 있다.


<태평성시도> 부분, 조선후기.

"한 호인이 큰 호랑이 하나를 길러서 쇠줄로 목을 매어 함 속에다 넣어 가지고 와서․ ․ ․ ․팔뚝을 그 입에 넣어도 호랑이는 핥는다" -『국역 연행록선집』, 무술년(1778) 1월 7일

이들 작품 외에 조선시대 회화에서 전례를 찾아볼 수 없는 <태평성시도>에서는 중국의 풍습이 그려져 있는데, 중국 사행을 기록한 연행록의 내용과 부합하는 장면들을 찾아볼 수 있어 흥미롭다.


<태평성시도> 부분, 조선후기.

스케이트를 타며 활을 쏘는 장면이나 조선에서는 이색적인 동물인 코끼리나 낙타를 봤을때 그들은 어떤생각을 했을까?... 지금시대에도 해외여행 중에 새로운 문물을 접할 때 받는 신선한 충격은 여행 중에만 느낄 수 있는 그 무언가의 매력에 빠져들게 한다. 물론 공적인 일로 간 청나라였지만 그들의 문물을 호기심가득한 눈으로 보고 화폭에 담았을 조선시대 화가의 손을 통해 그 시대의 현장을 간접 경험해 볼 수 있다는 점이 이 작은 전시의 크나큰 매력이다.

*전시정보
관람료 : 무료
최근 연이어 개최된 관람객 많은 대규모의 전시에 지친분들께 추천하는 전시 

글/사진 스마트K
업데이트 2024.11.13 2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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