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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선왕조의 철저한 기록정신-<145년만의 귀환, 외규장각 의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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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명: 145년만의 귀환, 외규장각 의궤 기 간: 2011년 7월 19일~ 9월 18일 장 소: 국립중앙박물관 특별전시실

                                                 전시명: 145년만의 귀환, 외규장각 의궤

                                                 기   간: 2011년 7월 19일~ 9월 18일

                                                 장   소: 국립중앙박물관 특별전시실

 

몇 번의 터치만으로 트위터와 블로그에 순식간에 일상을 찍어 올리는 스마트한 세상에서 기록이란 너무도 쉽고 빠른 것이다. 그렇다면 몇 백 년의 시간을 거슬러 올라 조선시대의 기록문화는 어떠했을까. 145년만의 반가운 귀환, 지금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리고 있는 “외규장각 의궤” 전시에서 조선왕조의 철저한 기록정신을 살펴볼 수 있다.

의궤란 왕실과 국가에서 의식과 행사를 개최한 후 준비, 실행 및 마무리까지의 전 과정을 보고서 형식으로 기록한 것으로, 국왕의 열람을 위한 어람용(御覽用) 그리고 여러 곳에 나누어 보관하기 위한 분상용(分上用)으로 구분된다. 전시실 입구에 나란히 놓여 있는 어람용과 분상용 두 권의 <효장세자책례도감의궤(孝章世子冊禮都監儀軌)>는 동일한 내용의 반차도 장면이 펼쳐 놓아 두 의궤의 차이를 한 눈에 비교해볼 수 있다.

 

      <효장세자책례도감의궤>,어람용,                             <효장세자책례도감의궤>, 분상용
                    1725년(영조1)                                                       1725년(영조1)
어람용과 분상용 의궤는 필사, 재료, 장정 등에서 그 수준이 월등히 차이 난다. 내용은 같지만 분상용 의궤가 저주지(楮注紙) 위에 목판에 새긴 도장을 찍어 인물들을 배치하였다면 어람용은 고급 초주지(草注紙)를 사용하여 붉은 인찰선(印札線)을 긋고 당대 최고의 궁중 화가가 직접 붓으로 정교하게 그린 것이다. 두 권의 의궤는 동일한 보관 방법을 거쳐 지금에 이르렀지만 종이가 변질되고 안료가 빛바래 오랜 시간의 흔적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분상용 의궤와 달리 어제 막 만든 것 같은 어람용 의궤는 선명한 색감과 섬세한 필치 그리고 새 것 같은 종이 질을 자랑하고 있다. 글을 쓰고 기록하기 위한 종이 제작 기술이 이미 조선시대에 우수했다는 사실은 곧 지식을 귀중히 여겼던 우리 선조들의 열정을 말해주는 것이리라.

의궤 속에 그려진 그림들은 섬세한 필치와 단정한 형태, 서두르지 않고 채색한 흔적을 담고 있다. 그린 이의 정성이 그대로 묻어나는 의궤 속 그림들은 물론 국가의 거대한 의식과 행사를 그린 것이긴 하지만 조금 특별한 하루의 일상을 담은 것이기도 하다. 자고 나면 또 업그레이드되는 숨 가쁜 기술 변화의 시대를 살며 과거와 같은 수고로운 노력을 하지 않고도 고화질의 사진들로 매일의 삶을 저장해 나가는 우리의 기록들이 갑자기 가볍게 느껴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헌종경릉산릉도감의궤>, 어람용, 1849(철종 즉위)
헌종(憲宗, 1827~1849)이 승하한 후 6월부터 11월까지 경릉(景陵)의 조성 과정을 정리한 의궤 2책 중 상책으로 초록색 비단으로 표지를 싸고 놋쇠로 변철(邊鐵)을 대고 5개의 박을못으로 고정시키고, 박을못 밑에 둥근 국화무늬판(菊花瓣)을 대어 제본했다. 변철의 중앙에는 둥근 고리를 달았다.

<헌종경릉산릉도감의궤>, 분상용, 1849(철종 즉위)
표지에 “오대산사고상(五臺山史庫上)”이라 쓰여 있어 오대산 사고에서 보관했던 분상용 의궤임을 알 수 있다. 분상용 의궤는 홍포(紅布)로 표지를 싸고 변철과 박을못 및 원환(圓環)을 모두 시우쇠로 만들었으며, 박을못은3개이다.

‘의식의 모범이 되는 책’이란 뜻의 의궤는 모범적인 선례를 만들어 후대 사람들이 법도에 맞게 의례를 치를 수 있도록 하는 한편, 자세한 기록을 통해 이후 시행착오 없이 원활하게 행사를 치를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의궤는 철저한 기록정신의 산물이자 예(禮)를 숭상하는 유교문화의 핵심 요소가 담겨 있을 뿐만 아니라 조선시대 국가의 통치 철학과 운영체계를 알 수 있는 자료이기도 하다.

 

                                       <종묘수리도감의궤(宗廟修理都監儀軌)>, 1637(인조 15)
1637년, 병자호란으로 훼손된 종묘를 보수하고 종묘의 신주(神主)를 수리하거나 새로 만든 사실을 기록한 의궤이다. 1636년(인조 14) 12월 병자호란이 일어나 종묘와 사직의 신주를 강화도로 옮겨 묻었다가 훼손된 경위부터 1637년 7월 6일 종묘의 수리와 신주의 개조(改造)를 마치기까지의 관련된 문서를 날짜순으로 수록하였다.

 

                     <현종명성왕후가례도감의궤(현종명성왕후가례도감의궤)>, 1651년(효종 2)
1651년 12월, 현종이 왕세자 시 세자빈(명성왕후, 1642~1683)을 맞이한 혼례식 과정을 기록한 의궤이다.

의궤는 왕실의 혼인이나 책봉(冊封), 존호(尊號), 각종 진연(進宴), 진찬(進饌) 등의 큰 경사를 기록하기도 하였지만 왕실 의례 중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 것은 죽음과 관련된 의식이었다. 특히 왕과 왕비의 장례는 국장(國葬)으로서, 왕이 사망하면 장례 절차를 담당할 임시 관서인 국장도감(國葬都監), 빈전도감(殯殿都監), 산릉도감(山陵都監), 등 삼도감(三都監)이 설치되었다.

 

                                    <장렬왕후국장도감의궤(장렬왕후국장도감의궤)>, 1688(숙종 14)
1688년 인조의 계비이자 숙종의 증조할머니인 장렬왕후(1624~1688)의 국장에 관한 기록이다.

외규장각 의궤 도서들의 귀환은 반가움과 함께 우리에게 피탈의 아픈 역사를 되새기게 한다. 천주교 탄압사건을 구실로 조선에 침략하여 병인양요(丙寅洋擾, 1866)를 일으킨 프랑스는 조선국의 저항에 부딪혀 퇴각하면서 대량의 은괴와 외규장각에 보관되어 있던 의궤를 비롯한 189종 340여 책, 기타 자료 등을 약탈했다. 이후 프랑스국립도서관으로 이관된 외규장각 도서는 중국도서로 분류되었고, 1975년 프랑스국립도서관에서 일하던 재불학자 박병선 박사에 의해 세상에 공개됐다.

이후 외규장각 의궤 반환 요청이 추진되었고 그 과정에서 협상이 연기되거나 반환 방식에 대한 견해가 차이를 보이는 등 별다른 진전을 찾기 힘들었지만 의궤 반환운동은 더욱 확산되었다. 2010년 3월 협상이 재개된 후 11월 12일 서울에서의 ‘G20 정상회의’를 통해 양국 대통령 간의 합의가 이루어졌으며 2011년 4월 14일부터 5월 27일까지 총 4회에 걸쳐 외규장각 의궤 296책은 국내에 들어왔다. 1993년에 미테랑 대통령으로부터 전달받은 『수빈휘경원원소도감의궤(綏嬪徽慶園園所都監儀軌)』(상) 1권을 포함하여 외규장각 의궤 297책이 모두 돌아온 것이다.

앞으로 우리가 할 일은 가슴 아팠던 피탈의 역사를 계속해서 되새김질하기보다는 여전히 해외에 유출되어있을 우리의 문화재들에 관심을 갖고 초주지가 보여주듯 우리 문화유산에 자부심을 갖고 그 놀라운 기술력을 연구하고 발전시켜나가는 일이 아닐까 생각한다.

 

 

 

글/사진 스마트K
업데이트 2024.11.17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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