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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명: 차와 향, 그리고 혼을 담다 _신안 용천청자 기 간: 2011.3.22~2011.6.19 장 소: 국립중앙박물관

전시명: 차와 향, 그리고 혼을 담다
        _신안 용천청자
기 간: 2011.3.22~2011.6.19
장 소: 국립중앙박물관

신안 해저유물에 대해서는 한 가지 오해랄까, 착각이랄까가 있다. 배에 고려청자가 가득했을 것이라는 오해다. 신안 앞바다 그리고 그물에 걸려온 고려청자 등에 빗어낸 착시현상인데 이 배는 정작 중국 닝푸어(寧波)를 떠나 규슈 하카다(博多)로 향하던 배였다. 그런데 어떤 연유인지 신안 앞바다 근처로 떠밀려와 좌초해버린 것이다.

신안선에 실려있던 화물의 꼬리표였던 목간(木簡).
교토의 절 도호쿠지(東福寺) 이름이 보인다.

당연히 실려 있던 물건은 중국 화물이었다. 10년도 넘게 걸린 수중발굴에서 조사팀은 다른 것은 제쳐두고 2만점 넘는 도자기를 건져 올렸다. 대부분은 남송말기와 원나라때 만들어진 것이었다. 또 전체 도자기의 70% 가까이가 용천요에서 구워진 청자였다. 물론 그 외에도 경덕진에서 구원진 청백자와 고려청자도 나왔다. 전문가들은 신안선의 고려청자에 대해 배의 상인들이 중국에 있는 것을 구입해 실었던 것들로 추정하고 있다.

청자모란문 대화병(靑磁牧丹文大花甁) 높이 45.2cm
유목 민족인 원나라에 들어 큰 형태의 용천 청자가 만들어졌다고 한다.

용천요 청자가 이렇게 많은 것은 인기 때문이었다. 용천 청자는 당시 세계적 히트 상품이었다. 그 인기는 비단 일본 뿐만 아니었다. 인도네시아 자바박물관, 터키 토프카프궁전 박물관, 이탈리아 피렌체의 메디치 컬렉션에도 모두 당시 전해진 용천청자 컬렉션이 들어있다. 유럽에서는 심지어 오페라 같은데 나오는 미남 배우를 가리켜 ‘셀라돈(celadon)'이라고 했다고도 한다.

청자호문 항아리(靑磁鎬文罐) 높이 24.2cm
관은 고체를 담던 항아리를 가리킨다.
한국 수종사 부도(水鍾寺 浮屠)에서도 이같은
사리 용기가 나왔다.

신안 난파선에서 나온 용천 청자는 1만4천여점이나 된다. 이 사실 하나만으로도 신안선은 세계적 ‘보물선’이 됐는데 최초의 용천청자가 인양된 70년대 후반, 세계미술시장에서 용천청자는 한점에 수만 달러에서 수십만 달러에 거래됐다.

청자오관병(靑磁五管甁) 높이 11.4cm
일본에서는 꽃병이나 장식품으로 썼다고 한다.
보물선 신안선의 가치를 잘 모르고 있는 것도 오해라면 오해다. 난파선이라고 하면 당연히 ‘보물’이 나오는 것으로 알고 있으나 사실은 전혀 다르다. 신안선처럼 용천 청자가 만점 단위로 발굴된 것은 세계적으로도 없다. 실제 다른 아시아 국가에서 발굴한 난파선에는 선원들이 쓰던 생활자기 몇 점이 고작이다.
청자 팔괘문염형 향로(靑磁八卦文奩形香爐) 높이 5.5cm
염자는 화장합을 가리키며 향로 몸체에 팔괴문이 새겨져 있다.

예를 들어, 산동성 봉래(蓬萊)수역에서 발견된 침몰선 4척, 80년초 나가사키 다카지마(鷹島)에서 일부 확인된 난파선 그리고 2007년 베트남 하노이 앞바다의 침몰선 등은 모두 송나라, 원나라시대의 군선들이다. 그외 복건성 천주에서 원나라 화물선 한척이 발견됐으나 화물은 대부분 향신료여서 오늘날까지 가치를 발휘하는 ‘보물’은 아니었다.

청자 삼족역형 향로(靑磁三足鬲形香爐)
역(鬲)은 솥을 가리키는 말로 청동기의 솥형태를 딴 향로이다.

이번 국박의 전시는 신안 유물선에서 발굴된 ‘보물’ 가운데 중국 청자기술의 최고수준을 보여주는 용천청자 200점 이상을 한 자리에 보여주는 전시다. 용천요 청자가 우리에게 흥미로운 점은 ‘당시의 히트상품’이란 점 외에 계보를 따라 올라가다 보면 전성기의 고려청자와 6촌 정도쯤의 관계가 된다는 사실에 있다.

 
청자첩화철반매화문반(靑磁貼花鐵斑梅花文盤, 사진 좌)
청자노태첩화국화형반(靑磁露胎貼花菊花形盤)

중국에서 청자는 한나라 때 처음 만들어졌다. 하지만 오늘날과 같은 청자색으로 발전을 보게 된 것은 당나라 말기와 오대(五代)에 전성기를 누린 월주요(越州窯) 청자이다. 이 월주가마 도공들은 신라말에 장보고의 초청을 받아 한반도로 건너와 청자 기술을 가르쳤다. 그리고 그들에게 기술을 배운 당시 국내 도공들이 전라도일대, 충청도, 경기도에 흩어져 초기 청자를 만들었다. 이후 청자기술은 고려왕실에 의해 통합 관리되면서 12세기 이후부터 부안과 강진에서 수준 높은 순청자와 상감청자를 만들게 된 것이다.

청자철반문이(靑磁鐵斑文匜) 높이5.4cm
이(匜)는 주전자를 가리키는 말. 몸체 옆으로 물구멍이 있는 것을 가리키며 예전에 종교적 행사 전에 손을 씻는 그릇으로 썼다고 한다.

중국을 보면, 송나라 들어 월주요 기술이 송나라 관요인 여요(汝窯)로 계승되며 ‘맑고 푸른 하늘빛’같은 천청색(天靑色) 청자가 만들어졌다. 그리고 남송시대가 되면서 이 기술이 용천요로 바톤터치된 것이다. 월주요에서 한 다리를 건너 기술을 전수받았다는 점에서 용천청자와 고려청자의 유사성을 찾아볼 수 있다.

청자어룡식화병(靑磁魚龍飾花甁) 높이 15.8cm
이와 꼭같은 손잡이를 가진 화병이 세카도(靜嘉堂)문고 미술관에 소장돼 있다.

그런 용천요 청자와 고려청자의 결정적인 차이는 유약색, 즉 청자색에 있다. 고려청자는 중국사람이 비색(翡色)이라고 했을 만큼, 그린과 블루 사이의 투명하고 밝은 청색이 특징이다. 반면 용천요 청자는 역사가 긴 만큼 한 가지 색이 아니다. 초기에는 여요 청자에 가까운 하늘색을 보이지만 남송시대에는 유약을 여러 번 분장하듯 발라, 분청색(粉靑, 분청사기의 분청과 이름이 비슷하지만 중국에서 이런 말을 쓴다)이 된다. 이는 달리 벽녹색(碧綠色)이라고도 한다. 그리고 원나라 때가 되면 수출용 대량생산에 맞추기 위해 여러 번 바르기보다 처음부터 유약을 두껍게 발라 구원 짙은 녹청색으로 바뀐다.

용천요의 수출용 도자기중 상형(象形)청자
약간의 전문성이 있는 일본 애호가들은 이 둘이 구별해서 부른다. 앞의 것은 기누타(砧)청자, 뒤의 것은 덴류지(天龍寺) 청자라고 한다. 둘 다 특정한 한 점의 청자에서 유래된 이름인데 침(砧)이란 다듬이돌이란 뜻이다. 분청색 용천청자 중 어룡같은 손잡이가 달린 화병이 있는데 그 형태가 마치 다듬이돌같다고 해서 붙인 이름이다. 덴류지라는 것 역시 그런 색깔의 향로가 교토의 덴류지 절에 있어서 대표적으로 붙인 것이다.
청자 화문정형 향로(靑磁花文鼎形香爐) 높이 9.0cm
이런 용천청자를 1만점 이상 컬렉션하고 있는 박물관은 중국 본토는 물론 전세계 어디에도 찾아볼 수 없다. 소박하게 차려진 특별전이긴 하지만 보기에 따라서는 ‘세계적인 기분’에 젖어 감상할 수 있는 전시라 할 수 있다.
글/사진 스마트K
업데이트 2024.11.21 14: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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