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제목: 옛 그림의 향수 - 조선후기회화전 기간: 2011.3.15-2011.3.28 장소: 동산방 화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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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에 옛 그림을 보기란 쉽지 않다. 여기 저기에 미술관, 박물관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아무 때고 찾아가 한국미술의 ‘품격 놓은’ 서화(書畵)를 감상할 수 있는 곳은 불과 얼마 되지 않는다. 서울에는 그저 용산의 국립중앙박물관과 이태원의 리움 미술관이 있을 정도이다. 그래서 근사한 옛 그림을 보게 되는 일을 가리켜, 예전엔 안복(眼福)을 타고난 사람만 누리는 행복이라고 했는지 모른다. 실제 요 몇 년 사이 봄 가을로 성북동 간송미술관에 수많은 사람들이 몰리는 것은 이런 안복을 누릴 기회를 찾아 나선 때문일 것이다. 「옛 그림의 향수」전 역시 흔치 않은 안복의 향연이 베풀어지는 자리다. 이 전시는 어느 한 테마나 또는 체계를 갖춘 전시는 아니다. 오래동안 한국미술의 서화쪽을 다뤄온 화랑이 이런 저런 인연을 맺게 된 희귀한 옛그림과 글씨를 소개하는 전시다. 테마가 없기는 하지만 이 전시의 뿌리는 깊다. 「조선시대 후기회화전」이란 이름은 지난 1983년에 열려 지금까지 그 이름이 전문가와 애호가들 사이에 회자되는 유명 전시이다. 이번 전시는 그 이름을 계승해 무려 28년만에 재현된 전시이다. 따라서 그 당시 한번 소개된 채 쭉 금고 속에 들어 있던 작품도 소개된다. 코리안 타임에서 좀처럼 있을 수 없는 28년이란 세월을 담고 있으므로 당연히 천천히 느릿느릿 봐야할 전시이다. 원래 한국미술의 옛 그림은 ‘후딱 후딱’ 볼만한 그림들도 아니다. 소개 작품은 보물로 지정된 황기로(黃耆老)의 문자 조형에 가까운 초서를 비롯해 추사와 다산 등의 글씨와 이정, 윤두서, 겸재 정선, 현재 심사정, 표암 강세황, 우봉 조희룡, 석파 이하응 그림 등 유명 작품이 40여건에 이른다. 이 중에는 정충엽, 한용간, 김영면 등 미술사에 이름만 전하는 작가의 작품도 소개중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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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수염에 부리부리한 눈의 자화상으로 유명한 화가가 윤두서(1668~1715)다. 그와 말과의 관계에 대해서는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그림 중에는 말 그림도 꽤 여럿이다. 이 그림은 당나라때 시 한 구절을 빌어, 술 취한 채 말을 몰고 가는 장부를 그린 그림이다. 약간 제쳐진 상체와 손의 채찍에서 음주기마의 분위기를 냈다. 구불구불한 나무와 방사선 솔잎 그리고 각지게 걲인 옷 주름에서 약간 중국 영향을 엿볼 수 있다. (시귀절 화제는 주감백일모 주마입홍진(酒酣白日暮 走馬入紅塵)으로 ‘술이 거나한데 해는 저물어 말을 몰로 도성으로 돌아오네’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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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께서 ‘흘러가는 것이 저 물과 같다’고 한 이래 물을 바라보는 일은 군자의 자기수양과 연관시켰다. 또 전당강 조수의 역류는 옛부터 항저우의 볼거리라고 해서 그림의 대상이 됐다. 벼랑앞 높은 바위끝에 한 인물이 멀리까지 가득한 물을 보고 있는데 무엇에 초점을 맞춰 그렸는지 알 수 없다. 다만 오른쪽 아래에 대나무 숲과 버드나무 사이 길로 동자 하나가 거문고를 들고 올라가고 있어 보는 사람은 짐작만 할 뿐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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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기에 활동한 정충엽은 남아있는 작품이 드물다. 더욱 이 그림은 지난 1983년 「조선후기 회화전」이후 28년만에 다시 일반에 공개되는 귀한 그림이다. 복사꽃인 듯한 연분홍 꽃이 마을 하나 가득한 가운데 방금 비가 물러간 듯이 산도 나무도 짙다. 붓을 뉘워 찍은 검은 먹흔이 이채를 띠는데 이것은 화원이 아니라 궁궐의 침 전문의사였다는 이력에서 기인한 듯하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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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원 김홍도와 같은 시대에 활동한 화원으로 풍속화도 곧잘 그렸다. 제목의 엽(饁)자는 들밥이란 뜻이고 엽피남무는 『시경』의 「빈풍 칠월」에 나오는 한 구절로 한여름에 농사일을 하면 처자가 들밥을 이고 온다는 내용이다. 제목 그대로 방죽길을 따라 밥을 한광주리 인 아낙네가 지팡이로 조심스레 길을 가고 옆에는 술동이를 가슴에 안은 아들이 강아지와 함께 따라가고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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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룡강은 와룡선생, 즉 제갈량이 살던 곳(언덕)이란 뜻으로 선비가 꿈꾸는 이상적인 생활을 그린 듯하다. 그림 한가운데 집안을 보면 벽에 그림이 걸려 있고 책상에 책이 잔뜩 쌓여 있다. 집 주변에는 구멍이 숭숭한 괴석과 파초가 심어져 있으며 마당에는 차를 끓이는 동자 그리고 학 두 마리가 놀고 있다. 괴석과 파초, 학 기르기, 음차는 18세기 후반 사대부들의 고급 취미였다. 한용간은 양반집안 자제로 과거에 급제해 사간원 정언까지 올랐던 이른바 사대부 화가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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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원군 이하응(1820~1898)은 난초를 잘 쳐 여러 부탁을 받아 그리기도 했다. 이 그림에는 자신이 의리와 옛 인연의 정 때문에 그림을 그린다는 뜻을 밝혀 놓았다. 오른쪽 폭에 오작란오십년(吾 作蘭五十年)이란 구절이 보인다. ‘내가 난을 친 50년 동안에 의리를 저버리고 권세에 붙은 자를 위해 그린 적이 없었다. 이 사람은 청아하여 천리 먼 길, 큰 고개를 넘어와서 나의 늙은 솜씨를 구하니 어찌 사양할 수 있겠는가? 소년시절 남쪽 고을의 옛집에 의탁했는데 이제 석난 10폭을 그려 나의 속마음을 표시하니, 난처럼 향기롭고 돌처럼 정절을 지켜 서로 저버리지 마세나. 석파 칠십노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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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사의 만년에 속하는 글씨로 시의 제목은 따로 없다. 두 번의 귀양을 다녀온 이후에 쓴 듯 벼슬길에 대한 부질없음과 학문의 중요하다는 말이 언급돼 있다. 평생 마음을 지키는 힘이 (*글속의 일부 한문풀이는 「옛 그림에의 향수」전 도록에서 인용한 것임을 밝혀둔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