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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펠리오와 최고의 자료 왕오천축국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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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제목: 실크로드와 둔황 - 혜초와 함께하는 서역기행 기간: 2010.12.18~2011.04.03 장소: 국립중앙박물관 특별관

  전시제목: 실크로드와 둔황
                 - 혜초와 함께하는 서역기행
  기간: 2010.12.18~2011.04.03
  장소: 국립중앙박물관 특별관

멀리 유럽 로마에서 중앙아시아를 거쳐 중국 서안에 이르고 다시 흘러서 일본의 나라(奈良)까지 연결된다는 실크로드. 실크로드라고 하지만 실크는 美稱이고 실제는 근대 이후 잊혀져버린 ‘고대 교역로’가 정확한 이름일 것이다. 장장 9천km가 넘는 그 길 위의 유물과 유적은 이제 과거의 것이 되어 버렸다.

과거의 마지막 문이 닫히고 막 새로운 시대가 열릴 어름에 극적이고 화려하게 고대의 빛을 찾아낸 주인공이 20세기초 프랑스의 동양학자 페리오였다. 또 그가 찾아낸 보물은 바로 신라승 혜초가 쓴 여행기『왕오천축국전』이다. 페리오와 『왕오천축국전』는 다른 말로 하면, 수천 킬로미터라는 엄청난 공간과 천수백년이란 역사가 잠들고 있는 실크로드 전체 시공간의 하이라이트라고 할 수 있다. 이들의 이야기는 그래서 실크로드 감상의 알파이자 오메가가 된다.

《경교(景敎) 석비》 13세기, 카슈가르 수집,
신장위구르자치박물관

아주 오래된 영화 중에 찰튼 헤스턴과 에바 가드너가 주인공으로 나오는 『북경의 55일』이란 영화가 있다. 1900년 6월 청나라의 은밀한 지원을 받은 의화단이 베이징의 열국대사관 공사관 구역을 포위 공격하자 8개국 대사관공사관의 수비대 400여명이 힘을 합쳐 지원군이 올 때까지 55일 동안 버텨낸다는 줄거리이다. 물론 그 속에서 잘 생긴 두 남녀 주인공의 비극적 사랑이 버무려져 있는 영화다.

영화와 달리 역사에서는 이 사건을 의화단 사건이라 부르고 이를 계기로 외국 열강에게 베이징 점령이란 굴욕을 당한 청나라는 그야말로 급전직하의 몰락의 길을 걷게 된다. 그런데 이 의화단 사건의 한복판에 훗날 「세계 최고(最高)의 동양학자」로 불릴 22살의 청년학자 폴 펠리오(1878~1945)가 있었다.

《코끼리 조련사와 짐승무늬 장식판》
1~4세기, 니야 유적, 호탄지구박물관

그는 이 사건을 그냥 조우(遭遇)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당시 베이징 출장 중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지원병이 되어 포위 속에 갇혀 있던 유럽인과 중국인 그리스도교도의 생명을 구하는데 영웅적 활동을 폈고 이 일로 인해 프랑스 최고훈장인 레종 드뇌르 훈장을 받았다. 그리고 이 훈장은 천재적 두뇌에 더해 매사에 정열적이고 또 육체적으로 더없이 강인했던 청년 연구자가 최고의 동양학자로 성큼 다가설 기회를 한층 앞당겨 주었다.

1905년 중앙아시아탐험국제위원회 프랑스지부는 스웨덴 탐험가 스벤 헤딘 이후 러시아, 영국, 독일 등이 속속 중앙아시아로 탐험대를 보내고 있는데 몹시 조바심을 보이고 있었다. '실크로드’의 명명자인 독일학자 리히트호펜의 제자였던 스벤 헤딘은 1890년부터 몇 차례에 걸쳐 투르크스탄을 거쳐 타클라마칸 사막을 건너고 ‘방황하는 호수’로 불리는 로프노르 호수까지 진출했다.

《보살상 염직물》1~4세기, 니야 유적, 신장위구르자치박물관

당시 유럽에는 인도유럽어의 비교언어학 연구가 막 전개되고 있었는데 그가 가져온 투르크스탄 출토문서는 대부분이 인도유럽어계통에 속해 있어 유럽인들의 중앙아시아에 대한 관심을 일거에 고조시켰다. 그래서 각국의 탐험대들이 중앙아시아를 향해 물 밀듯이 달려가던 때였다.

프랑스 지부가 탐험대장으로 뽑은 사람이 바로 페리오였다. 의화단 사건에 보여준 용감성과 강인함 그리고 베트남의 하노이 극동학원에 재직하면서 보여준 탁월한 자료수집 능력이 선발 이유가 됐다. 덧붙이면 의화단 사건이 일어나던 그해 1월, 페리오는 하노이 극동학원의 연구원으로 부임해 2월에 곧장 베이징으로 가서 자료 수집을 하고 있었다. 페리오는 탐험에 앞서 사진기사 누에트와 측량 등의 기술이 있는 군의(軍醫)바이양 등 마음 맞는 동창생을 탐험대원을 뽑고 1년에 걸쳐 충분한 준비를 마쳤다.

《수하미인》8세기, 90x74.5cm

《미인도》8세기, 67x71cm 신장위구르자치박물관

1906년 6월, 28살이 막 지난(생일 5월28일) 페리오는 일행과 함께 파리를 떠났다. 탐험 준비는 공식적으로 1년 정도였으나 그는 이미 파리 정치학교를 졸업하던 21살 때부터 ‘우연의 기적’을 바랄만한 준비를 하고 있었다. 파리 정치학교에 재학하면서 그는 3년 과정의 중국어 코스를 2년 만에 마스터했다. 그리고 졸업과 동시에 베트남에 있던 인도차이나 고고학조사단의 장학연구원으로 발탁된 것이다. 여기서 베트남어 전적을 조사하면서 의화단 사건의 해와 그 다음해에 베이징에 파견돼 시장에 쏟아져 나온 중국 역대 문물을 정력적으로 사들였다. 자료를 보는 그의 눈은 이때부터 길러졌다고 할 수 있다.

소그드 문자의 마니교 편지》9세기경, 베제클리크 출토, 투르판박물관

약관의 나이에 예리한 안목을 갖게 된 데는 탁월한 두 스승의 덕이 크다고 할 수 있다. 한 사람은 실방 레비(Sylvain Levi)이며 다른 한사람은 에두아르 사반느(Edouard Chavannes)였다. 레비는 산스크리트어에 통달한 인도학자였고 사반느는 사마천의 『사기』를 불어로 번역한 대중국학자였다. 레비는 31살에 콜레주 드 프랑스의 인도학 교수가 됐는데 그는 불교 연구에 인도사 해명의 열쇠가 있다고 여기며 중앙아시아 사본에 대한 연구를 강조했다. 이 두 사람을 통해 페리오는 인도 불교와 중국 불교를 상화 보완적 연구, 그리고 중앙아시아 연구의 중요성을 깨닫게 됐다.

페리오는 모스크바를 거쳐 타슈켄트, 페르가나에 이른 뒤 러시아 코사크 기병대의 호위를 받으며 파미르 고원을 넘어 소륵국(疎勒國)이라 불리는 카슈가르에 이르렀다. 그리고 여기까지 오는 1년여 동안 그는 러시아어와 터키어 방언 등을 마스터했다. 중국어는 샤반느의 강의를 들을 때 이미 마스터하고 있었다.

《보살 두상》6~7세기, H 9cm
신장위구르자치박물관

《보살 두상》7~10세기, H 17cm
중국국가박물관

페리오 탐험대는 구차에서 투르판을 거쳐 우루무치로 갔는데 거기서 의화단 사건에 연좌돼 유배온 청나라 대신들과 만나 친교를 나누며 중요한 정보를 입수했다. 둔황에 수수께끼의 문서가 꽉 들어찬 수장고가 발견됐다는 소문이, 소문만이 아니라 진짜라는 정보였다. 그는 투루판으로 다시 나와 곧장 둔황으로 향했다. 둔황 막고굴에 도착한 것은 1908년2월이었다.

16호굴 내부와 둔황문서(도록 사진)

막고굴의 제16굴에는 옆으로 작은 굴(흔히 17굴 또는 장경동이라 한다)이 뚫려 있는데 이 굴은 천수백년 동안 벽이 발라진 위에 벽화가 그려져 있어 아무도 그 존재를 알아채지 못했다. 그러던 것이 1900년에 도사 왕원록(王圓籙)이 우연히 벽 뒤편에서 석굴이 있고 그 속에 산더미 같이 문서들이 쌓여 있는 것을 찾아내게 됐다. 왕도사는 이를 상사에게 보고했지만 말기의 청나라는 아무런 대책이 없이 그대로 두라고만 했다고 한다.

그리고 1907년 3월 영국의 스타인 탐험대가 이곳에 도착해 약간의 대가로 ‘자신이 원하는 만큼’ 문서와 그림들을 가져갔다. 그러나 스타인에게는 한문이나 터키어 실력이 없었으며 또 마니교, 경교, 위글 문자, 티벳 문자에 대한 소양이 전혀 없었다.

장경동에서 문서를 분류하는 펠리오(도록 사진)

그보다 11개월 늦게 막고굴에 도착한 페리오는 유창한 중국어로 왕도사와 교섭에 약간의 대가 대신 ‘필요한 만큼’ 가져가라는 허락을 받았다. 영웅과 천재는 위기나 기회때 존재를 드러내는 법. 페리오는 그 말과 함께 굴 속에 들어가 꼬박 3주간을 보내면서 희미한 촛불 한 자루에 의지해 3미터 높이로 쌓인 채 수백 년 동안 어느 누구 한번 펼쳐보지 않은 문서들을 하나도 빼놓지 않고 조사하면서 ‘필요한 것’ 7,000여점을 추려냈다. 보통이라면 반년은 족히 걸렸을 일을 그는 3주 만에 해치운 것이다. 이를 가리켜 일본의 어느 학자는 '동양학자로서의 全인생이 응축된 3주간’이라고 평했다.

왕오천축국전이 발견된 17호굴 입구(도록 사진)

정리를 마친 그는 3월26일 프랑스지부에 편지를 보내 1차 자신의 발견성과를 보고했다. 1909년 10월, 3년4개월 만에 파리에 돌아왔을 때 그는 이미 무명의 학자에서 일약 세계적인 유명인사가 돼있었다.

최고의 학자 페리오가 둔황에서 발견한 최고의 보물이 바로 신라승려 혜초(慧超:704∼787)가 쓴『왕오천축국전(往五天竺國傳)』이다. 신라승 혜초는 광저우에서 남인도 출신의 승려 금강지에게 가르침을 받다가 그의 권유로 불법을 구하기 위해 인도로 떠났다. 그는 갈 때는 바닷길을 이용하고 올 때는 육로로 간다라를 거쳐 파미르 고원을 넘었는데『왕오천축국전』은 바로 그 육로 여행에 대한 기록이다. 이 여행기는 세계4대 여행기로 손꼽히며 그중에서도 가장 일찍 쓰여진 것이다.

『왕오천축국전』의 첫부분
페리오가 발견한 긴 두루마리는 앞뒤가 크게 훼손돼 누가 쓴 무슨 기록인지 알 수 없었다. 다만 뒷부분에 조금 못 미친 곳에 ‘개원15년(727) 11월 상순 안서에 도착하다(開元十五年十一月上旬 至安西)’고 적혀 있어 연대 추정은 가능케 했다. 페리오는 이를 펼쳐본 순간 ‘각멸(閣蔑)’이란 단어가 눈에 들어 왔다고 했다. 이 어려운 단어는 크메르를 가리키는 한자어로 중국 승려가 책을 쓰면서 『왕오천축국전』에 나오는 말이라고 했던 그 단어였다. 놀라운 기억력과 비상한 관찰력에 힘입어 그는 자신의 손에 들고 있는 것이 바로 천하의 학자들이 찾고 있던 바로 그 『왕오천축국전』이란 것을 단번에 알아차린 것이다.
『왕오천축국전』의 마지막 부분, 뒤에서 11행째에 ‘개원(開元)’이 보인다.

『왕오천축국전』은 발견된 실크로드의 여러 유적 중에서 가장 뛰어난 필사 유물이자 가장 귀중한 유물이다. 『왕오천축국전』발견 하나만으로 당연히 페리오는 세계적 동양학자가 될 자격이 있었다. 페리오의 발굴 논문이 공개된 뒤 1915년 일본의 불교학자이자 인도학자인 다카쿠즈 준지로(高楠順次郞)는 이 글의 저자가 신라승 혜초라는 것을 밝혀냈다. 비로소 '왕오천축국전=혜초' 공식이 완성된 것이다.

덧붙이자면 다카쿠즈는 한국에도 많이 쓰이는 『대정신수대장경(大正新脩大藏經)』의 기획 간행을 주도한 학자이다. 또 1926년 실방 레비가 일본에 왔을 때 그와 함께 프랑스어로 된 불교사전 『법보의림(法寶義林)』을 함께 창간하기도 했다.

실크로드 최고의 유물인 『왕오천축국전』은 이렇게 해서 페리오에 의해 발견되었고 한국에는 처음 그 모습을 보이는 것이 이 전시회다. 실크로드의 처음과 끝을 단 한 사람과 단 한 가지 유물로 말해보라면 당연히 펠리오와 『왕오천축국전』를 꼽아야 한다.

참고로 작년 2월 한 중국인 승려학자가 한국의 한 학회에서 스타인이 가져간 둔황 문서, 대영박물관 소장품 주에 신라시대 원효가 지은 『대승기신론소』의 사본 15행이 들어 있는 것을 확인됐다고 발표한 적이 있다. 이번에 한국에 온 『왕오천축국전』은 현재 파리 국립도서관에 소장돼 있으며 전체 227행에 2,893자가 씌여 있다.

글/사진 스마트K
업데이트 2024.10.30 02: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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