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제목: 겨울 그리고 봄 기 간: 2010.12.7~2011.3.31 장 소: 호림아트센터 제3전시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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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는 참 친절한 세상이다. 그리고 그 친절은 날로 더 정교하게 진화 중이다. 어디를 가든, 어디를 둘러보아도 실수하거나 당황하지 않도록 자세하고 친절한 간판과 안내문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다. 이 정도의 친절이 분수에 넘치는 친절인지 과잉 친절인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친절 부재가 쉽게 상상되지 않을 뿐이다. 만약 예상치 못한 친절 부재, 친절 공백(空白)에 맞닥뜨린다면 어떻게 될까. 멋모르고 앉으려는 의자를 누군가가 뒤로 빼내버려 바닥에 엉덩방아를 찧게 되는 그런, 계면쩍고 멋쩍으며 한편 황당하기도 하고 화가 나는 그런 느낌이 아닐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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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중 몇몇 작품을 생각나는 대로 소개해보자. 겸재 정선이 44살 때 그린 사계산수첩 가운데 두 점, 겨울과 봄 풍경이 우선 소개돼있다. 겨울쪽은 설경인데 나트막한 산자락에서 이어지는 강가에 빈 누각이 보이며 성긴 가지의 나무 몇 그루가 그려진 그림이다. 하늘 부분에 먹으로 살짝 바림을 해 대지가 하얗게 눈에 덮인 모습을 그려냈다. 이 첩의 발문을 쓴 이하곤(1677~1724)에 따르면 황공망 畵法을 썼다고 하는데 아마도 오른쪽 산에 보이는 피마준을 보고 그런 지적을 한 듯하다. 진경 산수만으로 유명한 겸재였지만 더러는 이처럼 시적 운치가 짙은 남종화를 그리기도 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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四季산수도에 겨울 풍경은 당연한 것이지만 조용히 눈 덮인 겨울 자연은 사람의 마음을 차분하게 하며 천지의 대순환이란 이치를 다시금 생각게 한다. 그래서 문인 취향에 어울리는 소재가 된 것인지도 모르겠다. 동양에서 설경하면 대표적인 것이 소상팔경도 중《강천모설도(江天暮雪圖)》이다. 소상팔경은 중국 호남성을 가로 지르는 소강과 상강이 동정호로 흘러 들면서 변화무쌍하게 연출하는 장대한 자연 풍경을 가리키는 말이다. 송나라 시대부터 정형화되면서 그림의 소재가 됐다. 그 중 겨울철 풍경이 어둑한 겨울 강가에 눈이 내리는 모습이 강천모설이다. 또 이에 짝하는 그림이 평사낙안(平沙落雁), 즉 흰 모래톱에 내려 앉는 기러기를 그린 것이다. 기러기는 보통 겨울이 되면 이곳에 날아와 지내다 봄이 되면 북쪽으로 올라간다고 한다. 그래서 겨울 풍경으로 종종 그려지곤 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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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 자세히 보자면 《강천모설도》는 왼쪽 산위에 수직의 짧은 먹 선을 그어 산위 나무를 표현하고 있다. 그리고 앞쪽 큰 바위 뒤로 보이는 게발 같은 가지를 늘어트리고 있는 겨울나무는 조선 초기의 그림에 많이 보이는 형식으로 이 역시 그 흐름을 계승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평사낙안도》를 보면 밋밋할 정도로 산과 강가의 물결만이 간결하게 표현돼 있는데 이 역시 약간 복잡한 구성을 보이는 초기 형식에서 중기로 나아가는 과정에 있음을 보여준다. 겨울하면 우선 떠오르는 나무로 매화를 손꼽을 수 있다. 실은 중국과 달리 조선의 매화는 겨울보다는 봄에 꽃을 피우는 종류가 많다. 헌데 옛 그림에는 대개 한 겨울에 피는 매화를 그린 게 많다. 겸재 정선보다 10살 정도 적은 조영석에게 매화를 감상하는 선비를 그린 그림이 있다. 일견 너무 졸박한 나머지 기교가 미달인 것처럼도 보이는 그림이다. 그림속의 선비는 한 손을 땅에 짚은 채 건너편 언덕의 큰 등걸에서 뻗어나온 가지의 붉은 매화꽃을 감상하고 있다.
당나라 때 시인으로 벼슬은 크게 하지 못했지만 겨울이 되면 나귀를 타고 낙양밖 파교라는 곳까지 나가 매화꽃이 핀 것을 감상했다는 맹호연의 고사가 있은 이래로 운치 있는 선비라면 의례 한 겨울에 추위쯤 아랑곳하지 않고 매화를 감상할 정도의 멋은 있어야 했다. 이런 매화 그림은 원나라 때 왕면이란 화가겸 시인이 나와서 분위기 일신을 하는데 그는 화면 가득 꽃과 가지를 그려넣은 화려하고 현란한 매화를 그렸다. 조희룡의 그린 《석매(石梅)》에는 약간 그런 맛이 난다. 우봉 조희룡은 평생 매화를 좋아하고 또 그리면서 살았는데 이런 글도 남겼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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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매화에 벽(癖)이 있다. 스스로 매화를 그린 큰 병풍을 눕는 곳에다 둘렀다. 벼루는 ‘매화시경연’을 사용하고 먹은 ‘매화서옥장연’을 쓴다. 매화시 백 수를 읊어 시가 이루어지면, 내 거처하는 곳에 ‘매화백영루’라고 편액하여 내가 매화를 좋아하는 뜻을 즐겁게 이루려고 하지만 잠깐 사이에 이를 수는 없다. 읊조리다 목마르면 ‘매화편다’차를 마셔서 목을 적신다」(『석우망년록』, 이성혜의 『조선의 화가 조희룡』에서 인용)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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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자기에도 매화 문양이 많이 쓰였다. 그 중에서도 백자가 청자보다 압도적으로 많다. 참고로 청자에는 국화문양이 더 많다. 국보 222호인 《청화백자 매죽문 항아리》는 구불 구불한 등걸에 매화 꽃망울이 송송 달려 있는 그림이 그려져 있다. 뒷면에는 댓잎 가지가 서넛 보인다. 이 도자기는 조선초 수입 안료였던 청화를 사용한 점도 그렇지만 좋은 태토를 사용해 몸통의 흰 발색이 아주 뛰어나며 기형도 단정한 위에 그림 솜씨도 일품이어서 국보로서 조금도 손색이 없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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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원 백자의 뽀얀 살색이 그대로 한겨울 눈밭이 된 도자기도 있다.《백자양각 매죽문 병》은 목에서 받침으로 흐르는 선이 조금 밑으로 쳐져 안정감을 보이는 백자이다. 중앙보다 밑으로 내려간 병의 중심이 시대가 19세기라는 것을 말해주는데 여기에 양각으로 활짝 핀 매화꽃과 몇 개의 꽃망울이 양각으로 새겨져 있다. 뒷면에는 대나무 줄기가 마찬가지로 새겨져 있다. 온 사방이 눈으로 뒤덮인 속에 하얗게 핀 매화꽃이 바로 이것이다. 그 시절 이 병의 주인은 시동이 지고 온 짐 속에서 이를 꺼내 마음 맞는 친구와 함께 한 잔 두 잔 주거니받거니 하며 매화를 즐겼을 것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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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과 봄을 상징하는 문양은 매화만은 아니다. 대나무, 소나무도 늘 푸르른 그 모습 때문에 추운 겨울을 굳건히 이겨내는 상징이 됐다. 조선 중기의 유덕장(1541~1622 이후)이 그린 대나무 그림은 예부터 격이 높다고 칭송돼왔다. 이《묵죽도》는 작은 그림에도 불구하고 큰 그림 못 않은 분위기를 풍긴다. 잘된 그림일수록 그림의 크기를 짐작키 어렵게 한다는 말이 맞는 듯하다. 가늘지만 골기가 분명한 대나무 가지는 간결한 묘사 속에 한층 맑은 기운을 전하고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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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자기에서도 대나무는 매화와 짝이 돼서 혹은 단독으로 그려지며 사용하는 사람의 품격을 담고자 했다. 18세기 이후의 청화백자에 대나무 문양이 많은데 이 전시에서는 17세기 철화로 그린 대나무 문양의 항아리와 병이 선보여 눈길을 끈다. 항아리의 경우는 17세기 대나무 단독 문양이라는 희귀성이 돋보이고 병의 경우는 간결한 선에서 높은 격조를 느낄 수 있어 명품이라 할 만하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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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18세기에 활약한 풍류화가 최북(崔北, 1712~1786 무렵)이 그린《토끼》한 점을 소개하자. 토끼가 옛 그림 속에 등장하는 일은 매우 드물다. 수수가지가 삐죽이 나와 있는 밭에 앉아 수수를 바라보는 토끼를 그렸는데 토끼도 그렇고 알이 잔뜩 영근 수수도 모두 풍성한 수확과 다산을 상징하고 있어 무언가 다복다산을 바라는 축하의 그림으로 그려준 듯하다. 토끼의 해에 어렵게 보는 최북의 그림이 아닐 수 없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