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시명: 임진왜란 조선인 포로의 기억 기 간: 2010.11.30~2011.2.6 장 소: 국립진주박물관 | |
|
교코, 리산페이, 고코센. 요타이난 - ‘누가 이 사람을 아시나요?’ 이들은 한국 이름은 강항(姜沆)이며 이삼평(李參平), 홍호연(洪浩然) 그리고 여대남(余大南)이다. 이들은 일본에 있으면서 교코, 리산페이 등으로 불리우며 유명해진 사람들로 임진왜란 때 포로로 일본에 잡혀간 것이 공통점이다. 다른 점은, 일부는 살아서 조선에 돌아왔고 일부는 일본 땅에 눌러앉아 점점 일본인처럼 살다 죽었다.
1592년 4월12일에 시작된 임진왜란은 1598년 8월 왜군이 조선에서 완전히 물러날 때까지 만 6년을 끌었다. 그리고 그 사이 40여만 명에 이르는 사상자를 냈고 10여만 명이 일본에 포로, 인신매매의 대상이 되어 끌려갔다고 한다.(일본에서는 이 숫자를 2만~3만으로 본다) |
|
사가현 가라츠는 당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선침략 전진기지로 나고야성이 세워졌다. 그림은 당시 나고야성에 주변에 배치된 다이묘 진지들.
| |
어느 일본인 승려가 일기에 ‘모든 것이 불타고 사람은 베어지고(...) 이렇게 가슴 아픈 광경을 난생 처음 본다’고 했을 정도로 처첨했던 전쟁 와중에 포로로 끌려간 사람들은 생이별과 낯선 땅 그리고 중노동 등 고난의 생을 살았다. 한 연구 결과에 따르면 대부분은 전쟁으로 일손이 부족해진 일본 농촌에 끌려가 농사짓는 종노릇을 면치 못했다고 한다. 그 중에서 더욱 불행했던 것은 포르투갈 상인 손에 넘겨져 인도네시아, 베트남에까지 팔려갔던 사람들이다. 조선 사람들을 사고파는 일은 일본 내에서도 이뤄졌는데 특히 미녀는 30냥에 팔렸다고 한다.(정문자「임진왜란과 포로」에서 일부 인용)
| |
|
《영산정방문(靈山定榜文)》1597년 정유재란 당시 경상도 영산면 일대에 걸렸던 왜군의 방문. 두 번째 항에 ‘높은 관리되는 자는 찾아내 죽이고 그 처자 무리도 죽일 것. 관리의집은 불을 지를 것’이라고 적혀있다. | |
한 예를 보면 권율 장군의 부하였던 노인(魯認, 1566~1622)이란 사람은 1597년 포로가 돼 3년 동안이나 잡혀있다 일본에 온 중국 배를 타고 요행히 명나라로 탈출해 겨우 돌아올 수 있었다. 또 진주사는 선비 조완벽도 포로가 돼 일본에서 노예 생활을 하다 장사하는 왜인을 따라 3번이나 안남국(베트남)까지 갔다가 십여년 만에 귀국했다고 한다. |
|
|
《금계일기》보물311호, 1599년 필사본 노인의 일기로 일본에 잡혀가 포로생활을 할 때부터 중국 에 탈출할 때까지의 생활상이 잘 기록돼 있다.
| |
하지만 노인, 조완벽처럼 조선에 다시 돌아온 사람은 극소수였다. 이유는 여럿인데 조선 정부가 적극적으로 귀환 작업을 펴지 않은 점, 일본의 지방 다이묘들이 노동력 확보를 위해 귀국을 제지한 일, 일본 생활이 십년, 이십년씩 이어지며 생활 기반이 만들어진 일 그리고 귀국한 사람들에 대한 대우가 좋지 않다는 소문 등등이 있었다고 한다. 돌아온 사람들은 불과 수천 명 선에 그쳤다.
위의 네 사람은 일본에 있으며 재능과 학식으로 일본인 사회에 이름을 남긴 사람들이다. 그러나 그 이름 속에는 수만 명에 이르는 무명 포로들이 일본 땅에서 겪었던 처참했던 삶의 고통과 비극 그리고 원망 등이 첩첩이 겹쳐있다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
|
강항 글씨 편액《난방(蘭芳)》27.5x61.0cm | |
강항(姜沆 1561~1619)부터 보자. 그는 37살 때인 1597년 9월, 남원에 내려가 명나라 군사의 보급을 지원하는 명을 받았으나 전라도 전선이 무너지는 바람에 영광 앞바다에서 포로가 됐다. 처음에 시코쿠 북쪽에 끌려갔다가 나중에 후시미로 옮겨졌다. 그리고 그곳에서 일본 주자학의 시조라는 후지와라 세이카(藤原惺窩, 1561~1618)를 만났다. |
|
|
《강항/후지와라 세이카 왕복편지》23.4x187.0cm(부분) 일본 天理大도서관 주자 시를 병풍으로 써달라는 요청 내용 등이 실려 있다.
| |
후지와라는 자신과 동갑인 강항을 만나, 그의 지식에 탄복하며 주자학에 관한 새로운 지식을 얻었고 또 그를 학문적 동지로 대접했다. 그리고는 강항의 도움을 받아 일본 최초의 주자 주석본인 『사서오경 왜훈』을 완성했다. 에도시대 활동한 일본유학자들을 집대성한 『선철총담(先哲叢談)』(1817년간행)에는 후지와라가 스승의 부음을 받고 통곡하면서 강항에게 쓴 편지 글이 소개돼 있다.
‘아카마쓰공(赤松公, 후지와라의 스승)이 새로 사서오경의 경문을 쓰면서 저에게 부탁하길 송나라 학자들의 뜻에 왜훈(倭訓)을 달아 후학들에게 쓰기 편하게 하고 송학을 공부하는 자는 모두 이 책을 가지고 근본을 삼으라 하셨습니다’라고 보낸 글이다. |
|
강항의 문집인 『수은집(睡隱集)』속에 들어있는「간양록(看羊錄)」 | |
『선철총담』 첫 권 제1절에 소개되는 후지와라 조항에 강항의 이름은 이렇게 당당히 등장하고 있다. 그후 강항은 귀국했으나 다시는 벼슬길에 나가지 않고 후학만 가르쳤다. 그러나 일본에서의 경험이 어땠는지 그는『간양록』을 지으며 그 속에서 ‘명나라와 힘을 합쳐 일본을 칠 것’을 주장했다.
|
|
|
|
《백자완》높이 8.1cm 1610~1640년 사가현립구주도자문화관 소장 |
《청화백자 산수문병》높이 33.4cm 1630~1640년 사가현립구주도자문화관 소장 | |
리산페이, 이삼평(?~1656)은 일본에 자기 기술을 전수해준 사기장이다. 당시까지 일본은 저화도에서 굽는 도기(陶器)만 만들고 있었다. 사기장이었던 이삼평이 자기 생산이 적합한 백토를 찾아내 자기를 만들어 보임으로서 일본의 도자기 역사를 새로 쓰게 했다.
| |
|
|
《백자 음각모란문 항아리》높이 31.0cm 13대 가나가에 산베이 작품
|
《청화백자 불수감문병》높이 27.0cm 14대 가나가에 산베이 작품
| |
1594년 이삼평은 나베시마 나오시게(鍋島直茂) 부대에 붙잡혀 큐슈로 끌려갔다. 그리고 그의 부장인 다쿠 야스노리(多久安順)에게 맡겨졌는데 여기서 사기를 만들게 된 것이다. 이삼평의 자기 생산으로 경제적인 번영을 누리게 된 다쿠 집안은 대대로 그에게 후한 대접을 해주었다. 조선의 금강에서 잡혀왔다고 해서 가나가에 산베이(金江三兵衛)란 이름도 지어주고 하녀와 결혼까지 시켜주었다. 현재도 가나가에 산베이의 후손들은 이곳에서 도자를 굽고 있다.
여대남(1581~1659)은 경상도 하동출신으로 지리산 쌍계사의 보현암에서 공부하다가 1593년 가토 기요마사 부대에게 잡혔다. 그때 13살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어린 소년은 종이와 먹을 달라해 시문을 짓고 필담을 요구하면서 범상치 않음을 보였다. 이런 영특함 때문에 일본에 끌려가서도 계속 공부를 할 수 있었다. 그리고 32살 때인 1612년에는 가토 집안의 원찰인 구마모토 혼묘지(本妙寺) 절의 주지가 됐다. 일본식 승려이름은 일요(日遙)상인이었다.
|
|
《부친 여희수가 아들 여대남에게 보낸 편지》1620년, 일본 혼묘지 절 소장 | |
그런데 1620년 9월말 그는 조선 하동에서 보내온 부친의 서찰을 받게 된다. 그 글에는 ‘지난 정미년(1607년) 아국 통신사가 일본에 들어갔을 때 우리 하동출신 관인이 길에서 너를 만나 네 성명을 물어본 즉 네가 대답하기를 내 이름은 여대남이고 아버지 성명은 여천갑이라고 했다더라’라고 적혀 있었다. 이어서 ‘무사히 살아 돌아온 다음,(...)부자가 한 곳에서 남은 세월을 함께 누린다면 그 즐거움이 어떻겠느냐’라고 절절히 귀국을 청하고 있다.
|
|
《일요상인(日遙上人) 초상》1701년 107.6x43.1cm 일본 혼묘지절 소장
| |
벌써 일본에 온지 28년이나 지난 뒤에 도착한 편지였다. 일요상인은 그해 10월 답장을 쓰며 ‘처음 붙잡힌 날부터 이날까지 28년 동안 항상 손을 깨끗이 하고 향을 피우고 아침에는 태양에 기도하고 저녁에는 부모님께 기도했습니다’라고 적고 ‘당장이라도 달려가고 싶은 심정이 가득하나 오늘날까지 주인의 녹으로 먹고살고 주인의 의복으로 입고 자랐으니(...)성의를 가지고 2,3년간 청해보려 합니다’라고 했다. 그러나 결국 일요 상인은 다시는 고향 하동 땅을 밟아보지 못하고 그대로 구마모토에서 삶을 마감했다. |
|
《홍호연 초상》에도시대 중기, 92.5x27.6cm 사가현립 나고야성박물관 소장 상단에는 찬문은 고가 세이리(古賀精里)의 글. | |
홍호연(1582?~1657) 역시 10살 남짓한 때에 진주성을 공격한 나베시마 나오시게 부대에 의해 산청 근처에서 붙잡혔다. 어렸지만 글씨와 시에 능한 그는 나오시게의 측근이 됐으며 이후에는 사가번의 초대 번주가 된 그의 아들 가츠시게(勝茂)를 모시기도 했다. 그는 특히 글씨로 이름을 날렸는데 기필 때 특히나 힘을 준 필체가 혹처럼 보인다고 해서 고부체 글씨라고 불렸다. |
|
《홍호연 오언율시》각 166.0x63.0cm 사가현립 나고야성박물관 소장 당나라 시인 이백의 시「연도가정자(宴陶家亭子)」「고숙계(姑孰溪)」을 쓴 것이다. | |
그의 이름이 일본 사회에 길이 전해진 것은 1657년 번주 가츠시게가 죽은 뒤 다른 일본무사 25명과 함께 할복자살하며 순사한데 따른 것이다. 당시 일을 기록한 문서에 보면 그는 녹미 15석을 받고 있었고 사자(寫字)하는 일이 주임무였던 것으로 나온다. 아무튼 그는 일본에서 일본 다이묘를 위해 순사했고 이 일에 대해 100여년 뒤에 고가 세이리(古賀精里 1750~1817)라는 일본 유학자가 그에 관한 전기를 써서 의리를 중시한 한 외국인 유학자로서 그를 높이 기렸다. 홍호연의 후손은 아직 일본에 살면서 조선인 姓을 지키고 있다고 한다. |
|
고가 세이리《홍호연전》1778년, 사가현립 나고야성박물관 소장 | |
돌아왔거나 혹은 그대로 남아서 기술 전수자, 승려, 혹은 순절자가 됐거나 강항, 이삼평, 일요상인, 홍호연 등은 오로지 개인의 학식과 능력만으로 역경을 극복해가면서 자신의 삶을 일군 사람들이다. 하지만 대다수 조선인 포로들은 그 역경의 파도 속에 휘말려 버린 채 이름도 남기지 못하고 이국땅의 외로운 혼이 됐다. 지금도 그렇지만 나라가 개인(백성)을 보호하지 못하면 개인(백성)에게 나라는 도대체 무엇인가.
이 전시는 지난 2003년 국립진주박물관과 일본 사가현립 나고야성박물관이 각각 임진왜란의 조사연구를 주관하는 박물관으로 학술교류협정을 맺은 뒤 첫 번째로 개최한 국제교류전이다.
|